꽃을 의무감에 보게 되는 날들이 쌓여간다.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다는 기후위기에도 제철에 피어야 할 꽃은 시기에 맞춰 피고 있다.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 후 학교 주변을 자주 다니게 되면서 겨울을 지나 봄으로, 봄을 지나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 피어있는 넝쿨 장미를 수시로 보게 된다. 색이 얼마나 화려한지 칙칙하게 변해버린 녹슨 철조망에 걸쳐 있어도 있는 그대로 그림이 되어 핸드폰을 꺼내 사진 찍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언제부터 장미를 좋아했던가. 아니, 장미가 아니라 꽃에 관심을 뒀던가.
시골에서 나고자란 나에게 꽃은 화원이 아닌 들에 피어야 맛이고, 그것도 잡초들과 뒤엉켜 군락을 이룰 때 직정한 생명력에 감탄하고 만다. 서울 도심에 자라는 꽃들은 조경의 일환으로 사람 손을 거친 게 대부분일 텐데 너무 가지런하고 때로는 인공적인 느낌이 들어 고개한번 돌리기를 그 자태가 대단한 것이어야 했다. 대한하다는 기준은 나의 고향 그곳에 피고지는 시골뜨기 식물에 견주기 나름이다.
그런 내가 조금의 변화를 느끼고 있다. 엄마가 식물을 아끼고 가꾸길 좋아한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된 나는 이름 모를 꽃 앞에서도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 보며 이름이 뭔지 향기는 있는지 언제 피고지는지 궁금해 한다. 특히 시골집 입구에 대충 자리를 잡고 계절을 보내는 라일락이며 담벼락 아래 어수선하게 고개를 쳐드는 봉선를 마주칠 때면 통하는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싶어 한참을 서있게 된다.
우리 엄마가 꽃을 좋아하니까. 봄에 그 흔한 꽃놀이 한번 가보지 못한 우리 엄마가 서운해한다. 가고 싶어도 몇발짝 못 떼고 주저 않게 된 지금에서야.
꽃을 좋아하게 된 건 아니다. 좋아하지 않을 뿐이지 싫어하는 건 아니니 그 중간정도 되는 듯하다. 엄마 대신 꽃을 보고 맘에 들면 사진도 찍어 '엄마 꽃 예쁘지?' 메시지와 함께 문자를 보낸다. 기약없는 약속도 해가면서.
"엄마 다음 봄에 꽃축제 한번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