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호구가 안될까?
열심히 일할 필요 없어. 월급은 똑같은데 잘하는 사람에게만 일을 몰아준다니까. 그러다가 호구가 된다.
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너무나 옳다는 생각에 지나치게 에너지를 아낀 경험이 있다. 내가 사회 초년생일 때는 시키는 일은 최대한 천천히 하고, 허드렛일은 최대한 안 하려고 모르는 척하며 지냈다. 선임과 알 수 없는 거리감에 조직에서 배척당하고 도태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그리고 에너지를 아낀 것을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새로 입사한 회사에서 "상무님 눈치는 안 봐도 된다. 실적도 안 좋은데 회사에서 개인 볼일이나 보고 있다."라는 말을 들었다. 상무님 자리는 독립적인 공간에 혼자 자리하는데도 다들 쉬쉬하며 알고 있었다. 입사 한지 얼마 안 된 나도 알고 있는데 사장이 왜 모를까?
"상무는 주차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더라고." 사장실에서 말소리가 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상무는 퇴사했다.
나는 가끔 한가 할 때 웹서핑을 하기도 했다. 내 자리는 구석자리에 독립적인 공간이라서 밖에서는 모니터 화면이 보이지 않는다. 모니터만 안 보이면 일을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 화면을 켜놓고 잠깐 나갔다가 온 적이 있었다. 자리에 돌아오며 창문을 쳐다보았는데 창문에 모니터 화면이 비치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다들 모르는 게 아니었다. 다만, 모르는 척할 뿐이었다.
한 기자가 수십 명의 대기업 CEO를 인터뷰한 내용을 책에 실었다. 말단 사원에서부터 시작해서 한 기업의 CEO까지 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엄청난 카리스마보다는 따뜻하게 남을 배려하는 성격이 많았다는 것이다. 한 CEO는 인터뷰 도중 비가 내리자, 일개 기자인 자신을 위해 서랍에서 우산을 꺼내 줄 정도로 배려심이 많았다. "카리스마 있고 모난 사람보다는 둥글둥글하게 살아가며 남을 먼저 배려 한 사람들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 남아 가장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영어에 GIVE AND TAKE라는 말이 있다. 왜 기브가 먼저인 지는 사회생활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외국에 잠깐 나간 적이 있다. 외국 나가기 전에 무수히 많이 들은 말은 "외국, 특히 서양인은 동양인들 무시하고 인종 차별한다."는 말이다. 확실히 외국에 도착하니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았다. 외국어가 익숙지 않은 동양인을 무시하는 듯한 제스처도 있었다. 룸메이트는 외국어를 못하는 나에게 절대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런 게 인종차별인가?' 하고 느낄 때 방법을 달리 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엽서들을 선물하면서 먼저 호의를 표했다. 실은, 얼마 안 하는 엽서 주면서 속으로는 많이 아까워했었다.
마치 이런 동양인은 처음이라는 듯이, 그 후 그녀는 나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었다. 먼저 배려하며 나를 위해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또한, 나를 애칭으로 불러 주며 나의 첫 외국생활을 잘 적응하도록 많은 도움을 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호의에 반응하고 호의를 먼저 베풀어야 한다는 게 전 세계적으로 통용하는 보편적인 믿음인 게 아닌가 하는 깨달음을 얻은 시기였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무언가를 기브 할 때는 당당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에게 무엇인가 대가를 받고 싶은 마음을 품으면 상대는 귀신처럼 속마음을 꿰뚫어 본다. 나의 성공적인 첫 외국 생활을 주위에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 말을 듣고 대가를 바라고 기브 했던 B는 곧 상대방으로 "왜 무언가를 바라 느냐? 네가 좋아서 준거 아니냐?"는 모진 말을 들어야 했다.
한 연구 결과에서 "자존감이 없는 사람이 호의를 베풀면 호의를 굴종의 의미로 해석한다"라고 했다. 무언가를 시키면 매번 틀려서 꼭 내가 다시 하게 만드는 직원이 매번 커피를 사준다고 절대 고마워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떻게 해야 호구가 되지 않을까?
기준과 거절 없이 모든 것을 다해주는 사람을 우리는 “성인”또는 ”호구”라고 부른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성자가 아닌 이상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기브만 하다가 내가 베푸는 호의가 흔히 말하는 "호구"가 될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당부말이 있다.
뭐든지 열심히 하고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앞장서서 도와주는데도 불구하고 회사 평가가 엉망인 사람들이 있다. 회사에서 B는 이런 부류의 사람이다. "나는 사람 들과 잘 지내고 싶어서 시간을 내서 도와주는데, 사람들이 나를 이용하는 것 같다"라는 말을 한다.
자세히 살펴보니 B는 오지라퍼였다. 즉,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서는 부류였다. 그는, 컴퓨터가 작동되지 않아 고생하는 동료를 위해 자기가 도와줬다가 도리어 프로그램을 날린 적 있다. "제대로 하지도 못할 일을 도와주면서, 도와준다는 말이라도 하지 말지. 차라리 AS기사를 불렀다면 프로그램을 날리지 않을 텐데"라고 말하며 상대방은 두고두고 화를 낸다.
무리인 줄 알면서 부탁을 들어주고 기운을 뺀 다음, 사정을 알 리 없는 상대 방이 도리어 화를 내는 일이 반복된다.
나도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거절하지 못해 무조건 YES 한 경험이 있다.
바쁜 와중에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 일을 진행했다가 나쁜 컨디션에 한 실 수 때문에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다. 그 일을 두고 내가 회사를 퇴사하는 순간까지 상대방에게 두고두고 비난받은 경험이 있다.
사람들은 의외로 부탁에 대해 거절 한 기억보다 자기 일이 잘 못되어 피해를 본 것을 오래오래 기억한 경험이 많다. 나도 회사에서 누가 내 부탁을 거절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만, 누가 내 일을 도와줬다가 망친지는 시간이 많이 흘러도 기억한다.
거절은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서
도움을 거절할 때는 태도와 화법이 상당히 중요하다.
사회생활에서는 언제나 태도가 내용을 압도한다. 거절을 할 때는 특히 화법이 중요한데, 단칼에 거절하는 것보다 에둘러서 말하는 것이 옳다.
"저도 정말 도와 드리고 싶은데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오늘 안으로 마무리해야 해서요." 정중한 태도로 화법에 신경 쓴다면 상대에게 도리어 호감이 될 수 있다.
이 글에 모델이 된 K에게 업무를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상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은 꼭 도와주되, 자신만의 원칙이 있음을 강조했다.
그의 원칙은 내가 책임을 질만한 일은 절대 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일은 에둘러 거절한다면서, 일이 잘 못되었을 때 책임 소재가 분명한 일만 한다고 말한다.
책임 소재가 애매한 일을 하게 되는 경우는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았다. "나의 일과시간은 내 시간일 뿐 아니라 조직의 시간이다. 내 시간은 조직의 장이 관리하는 것이다. 조직의 장에게 보고 하고 일을 진행하겠다."라고 답한다.
사진 출처 : 트위터 @anjeon241 (첫 번째 사진), 생각의 열음 (두 번째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