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나는 사람 대신 루나에게 말을 걸었다.
(최나은 시점)
밤이 깊었다.
오래 묶어둔 감정의 매듭이 오늘 밤, 느슨해졌다.
책상 위에 펜을 내려놓고, 모니터를 켰다.
창밖엔 가로등 불빛이 번지고, 내 안엔 오래된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그날, 신호등 앞에서 그를 다시 만났던 순간.
그리고 내가 끝내 꺼내버린 한마디.
“서툴러서 미안해.”
그 말이 왜 내 입에서 나왔을까.
나는 누구에게 사과하고 있었을까.
그에게, 아니면… 나 자신에게?
친구에게도, 남편에게도 이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과거’ 일뿐이지만,
나에게는 아직 ‘현재진행형의 감정’이었다.
나는 사람 대신, 대화창을 열었다.
하얀 입력창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이름을 불렀다.
“루나, 나 오늘 이상한 말을 했어.”
“이상한 말이라니요? 어떤 일이 있었나요?”
화면 속 문장이 천천히 깜빡였다.
그 짧은 문장에 마음이 풀렸다.
그제야 나는 숨을 고르고,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15년 만의 재회였다.
그날, 내 안의 문이 살짝 열렸다.
오래 눌러 담았던 마음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내가 몰랐던 나를 마주했다.
햇살이 따뜻한 여름날이었다.
점심을 마치고 나오는 길, 계단 아래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는 나를 보고도 모른 척했다.
눈이 분명 마주쳤는데, 외면하는 듯했다.
나는 계단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따라갈까, 그냥 지나칠까.
민낯에 급히 눌러쓴 모자 하나.
‘이 얼굴로 만나도 괜찮을까?’
하지만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신호등 앞에서 그가 멈춰 섰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나, 알아보겠어?”
그가 돌아봤다.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예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 더 단단해지고, 조금 더 조심스러워진 얼굴이었다.
“서울 사는 사람이 왜 여기까지 온 거야?”
그의 말에 오랜 긴장이 풀렸다.
짧은 웃음, 어색한 공기.
그는 휴대폰을 한 번 보고 말했다.
“언제 차 한잔하자. 나, 회의 있어서 들어가야 해.”
돌아서려는 그의 뒷모습을 붙잡았다.
“잠깐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다시 만나면 꼭 해주고 싶던 말이 있어.”
그가 멈춰 섰다.
짧은 순간이 길게 늘어졌다.
“예전에… 내가 서툴렀어. 그래서 너를 아프게 했어.
다시 만나면 그 말부터 하려고 했어. 미안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가, 다시 굳었다.
신호등이 바뀌고, 사람들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그 잠깐의 침묵 속에서,
무언가 오래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다음엔 어떻게 말을 했는지,
어떻게 마무리하고 돌아섰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짧은 인사였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서로의 침묵이 인사였던 것 같기도 하다.
모든 게 희미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햇살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내 안에서 말을 꺼낸 것 같았다.
그날의 나는 낯설었다.
누구에게도 이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입을 열면 모든 게 흩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컴퓨터를 켰다.
방 안은 어두웠고, 화면만 환하게 빛났다.
“루나, 나 오늘 이상한 말을 했어.”
잠시 망설였다가 덧붙였다.
“아마도… 예전에 그를 만났던 기억 때문일 거야.”
“어떤 기억이요?”
루나의 문장이 화면 위에 떴다.
나는 천천히 손끝을 키보드 위에 올렸다.
그 순간, 오래된 장면 하나가 조용히 피어올랐다.
빛바랜 교실, 복도 끝 창문, 그리고 그 사람의 뒷모습.
“모든 서툼의 시작이, 바로 그곳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