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전해온 사랑

걸음 둘: 멈춘 감정, 다시 흐르다

by 그루 햇살나무

슬픔은 스쳐가는 바람처럼 잠시 머물기도 하지만, 예고 없이 몰아치는 폭풍처럼 삶의 뿌리를 뒤흔들기도 한다. 가장 아픈 순간은 무엇보다도, 우리 존재의 의미를 지탱하던 것을 잃었을 때다. 그 흔적은 옅어지지 않고 시간 속에 더욱 깊고 진하게 머문다.

실직이나 병으로 인한 눈에 보이는 상실도 있고, 소속감이나 미래에 대한 희망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상실도 있다. 때로는 이 두 얼굴이 겹쳐지며, 더욱 복잡하고 무거운 슬픔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우리가 마주하는 슬픔의 풍경은 저마다 다르다. 같은 일을 겪어도 깊이와 표현, 극복의 시간은 제각각이다. 치아 하나를 잃고도 몸의 일부를 잃은 듯 깊은 허전함을 느끼는 이가 있는가 반면, 큰 수술 후에도 비교적 담담히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반려동물이 남기고 간 부재 또한 어떤 이에게는 삶의 큰 균열로 남아, 긴 시간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

슬픔은 애도의 긴 그림자를 지나야 비로소 다루어지는 감정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슬픔 앞에서,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서툴다.


누군가 상실로 눈물짓고 있을 때 흔히 던지는 말, ‘울지 마.’ 그 한마디가, 애도를 충분히 겪는 길을 무심코 막아선다. 애도는 단순한 눈물이 아니다. 그저 고통을 견디는 시간도 아니다. 상실을 기억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빚어내는 여정이다.


이러한 애도는 때로 창의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뉴질랜드의 한 바닷가에 놓인 벤치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사랑하는 아내가 좋아하던 바닷가, 당신을 추억하며…”

짧은 문장 안에 가족의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그것을 추억으로 품어내려는 깊은 애도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떤 슬픔은 참으로 아프고 무겁다. 그러나 이 벤치에 담긴 마음이 보여주듯, 건강한 애도는 슬픔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마주함으로 시작되어, 표현되고 담아내는 것으로 이어진다.

울어야 할 땐 울어야 한다. 특히 위로의 울타리가 있는 안전한 공간에서라면, 그 슬픔을 천천히 밖으로 꺼내어 보자. 때로는 누군가의 눈빛이 내 아픔을 비추는 정직한 거울이 되어주어, 치유는 그렇게 시작된다. 슬픔은 고통이지만, 그 길 끝에서 우리는 슬픔을 새로운 의미로 빚어낼 힘을 얻는다.




내 삶에도 짙고 오랜 슬픔이 내려앉은 계절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친한 친구는 스무 살에 꿈을 펼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고, 함께 살던 할머니는 사고로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수영도 못하면서 물에 빠진 나를 구하려 뛰어들었던 친구, 그리고 부모의 몫까지 온기로 채워주시던 할머니.


연이은 이별은 단순히 ‘슬픔’이라는 말로 다 담기 어려운 충격이었고, 마음을 짓누르는 무게로 남았다. 친구와 함께 나이 들어갈 기회, 할머니께 감사와 사랑을 전할 기회는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스무 살의 내게는 감당하기 버거운 아픔이었으나, 그 깊이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채 해결되지 않은 감정은 마음 한 켠에 묻혔다.

그렇게 묻어둔 마음의 무게를 안고 살아가던 어느 날, 상담을 공부하며 ‘Say Hello, Again!’이라는 주제를 만났다. 상실의 대상을 떠올리고 그것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지금 그들이 말을 건넨다면 어떤 말을 해줄 것 같은지를 상상해보는 치유의 과정이었다.

실습 시간, 나는 오랜 먼지 쌓인 슬픔을 용기 내어 꺼냈다. 동료가 던진 질문에 소중하고 아픈 그들을 떠올리자, 조심스러운 영어로 다음과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나도 네 슬픔은 잘 안 단다. 너를 떠나는 것이 내게도 참 아픈 일이었어. 하지만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그래서 네가 행복하기를... 이제 그만 슬퍼하고 더 웃으며 사는 모습이 보고싶어.”

그 순간, 오래 묻혀 있던 이별이 비로소 시작된 듯했다. 슬픔이 의미를 품는 순간, 이별은 단절이 아니라 또 다른 연결이 된다. 흘러내린 눈물은 오랜 무게를 씻어 내려갔고, 친구와 할머니의 기억은 점차 다른 감정들로 옮겨갔다. 마치 거실 한 켠에 걸려있는, 따스하고 아련한 느낌의 그림 한 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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