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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노아 레인 Aug 23. 2024

빨간 구두

 몇몇의 사람이 겨우 오갈 수 있는 다리 밑에서 조잘조잘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미끌거리는 물고기를 잡았는데 손가락 사이로 어느샌가 빠져나가고 있다.

"잡았다!" 나이라야 나보다 두 살 터울의 오빠가 의기양양하게 나를 향해 소리친다.

"야! 고무신이라도 벗어서 물을 채워" 신발이라고 해봐야 여섯 살 여자아이의

발에 겨우 들어가는 건데 무슨 군대의 이등병처럼  나도 잽싸게 벗어서 물을 채운다.

사실 오빠들은 종종 아빠의 큰 고무신까지 들고 와서 물고기를 가두다 들켜서 혼나는 일이 많았다.


좀 전에 큰소리친 것에 비하면 결과물이 초라하다.

신발의 크기만큼이나 새끼손가락만 한 미꾸라지가 뭐가 그리 화나고 억울한지

좁은 고무신 안에서 발버둥을 친다.

"오빠! 불쌍하다! 놓아주면 안 될까?"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평소엔 실눈을 뜨고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웃어넘기던

오빠가 앙칼지게 쏘아 부친다. "야! 작은 미꾸라지 잡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평소와 다른 오빠 모습에 화들짝 놀라기도 했지만 고무신 안에서 금방 발가락 방향으로

이동했다가 눈 깜짝할 사이도 없이 뒤꿈치 방향으로 이동하는 미꾸라지 모습에 내 눈이

빠질 것 같은 거 보니 고사리 손으로 잡을 수 있다는 게 대단한 것 같았다.


바로 그때, 다리 위에 서서 냇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 사람,

눈곱 떼자마자 만나는 내 친구,  일명 "막순이"였다.

왜 시골은  집에서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었을까? 막순이는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지만 우리들은 뚫어져라 보지 않아도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동시에 "빨간 구두!"라고 외쳤다.

그렇다! 빗물이라도 들어가면 삑삑 소리가 나는 고무신은 어디로 가고

반짝반짝 눈이 부신 빨간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 시절 빨간 구두는 학교나  입학해야 신어 볼 수 있는

신발이었다.

막순이 아빠가 "사우디"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사 왔다 한다.

"사우디"가  어디인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 우리는 거기에만 가면

무조건 돈을  벌어 오는, 도깨비방망이를 아주 많이 가진 그런 나라로 막연하게 알고 있었고  내심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고민할 것도 없이 냇가로 뛰어들겠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막순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우리들  또한 들어오란 말도 못 해보고  오빠가 좀 전에 보인 반응을 신경 쓸 사이도 없이

난 고무신의 물을 쏟아 버렸고 무슨 계라도 탄 듯 손가락만 한 미꾸라지는

신나게 몸을 흔들며 물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미꾸라지를 버렸다며 소리소리 지르는 오빠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난 한달음에 집으로 갔다.


어떻게 뛰어갔는지 숨이 턱까지 차올라서 다급하게 아빠를 부르는 내 모습에

마루에 앉아 유유자적 책을 보던 아빠가 맨발로 뛰어 내려온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빨간 구두! 빨간 구두!" 외쳐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빠가 답답해서 그냥  울었다.

나는 "빨간 구두 사주세요!" 그제야 아빠는 구두는 학교에 들어갈 때 사준다고 하신다.

한번 맘먹으면 해야 하는, 눈앞에 있어야 하는 성격인 내가 그냥 체념할리 없다.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나는 다짐했다.

"그래 이번 추석에 꼭 가져야겠다!" 사실 추석이 얼마 남지 않은 때라 통할 것도 같았다.

어차피 추석이 지나고 나면, 터울이 많아 서울로 돈 벌러 갔다 돌아오는 형제를 둔 아이들은

종종 구두를 신고 나타나곤 한다.


다음날 눈 뜨자마자 난 밥도 거부하고 막무가내 떼를 쓰기 시작했다.

아빠는 학교에 들어간 언니도 사주지 않은 구두를 사줄 수 없다며 단호하게 하시지만 나 역시나

아침에 눈곱을 떼자마자 붙어 다니는 막순이의 옆에 고무신을 신고 함께 다닌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역시나 그날 아침도 막순이는 어김없이 담장 옆에서 나를 부른다.

아빠 또한 빨간 구두를 한눈에 알아 보셨고,

퉁퉁 부은 눈으로 어그적 어그적 마당으로 내려가는 내 고무신에 시선이 멈춰져 있다.

내가 빨간 구두를 신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날 밤  결정이 되었다.


고무신을 신고 막순이 옆에 서 있던 내가 안돼 보였던지 엄마도 사줘야 되지 않느냐는 말씀을 하셨다.

문제는 언니였다!  잠깐 졸린 눈을 하고 있던  언니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 제 것도 사주는 거지요?"

순간 부모님은 언니는 생각지도 않은 표정이다.

"이번 추석은 막내 것 사주고 우리 큰딸은 돌아오는 설날에 사주마"

아빠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언니는 방문을 박차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난 그런 언니가 신경이 쓰였지만 당장  내일 내 곁으로 와줄 빨간 구두 생각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다음 날 아빠는 빨간 구두를 사 오셨고 언니의 지독한 시위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평소에 라면이라면 자다가도 한 그릇 뚝딱 비우던 언니였지만 아빠가 마음 달래 주려고

한 개도 아닌 두 개를 끓여서 주는데도 쳐다보지도 않고 나가버렸다.

나가봐야 담장 옆에 붙어서 상황을 주시할게 뻔할걸 아빠는 아셨던지 담장을 향해 큰소리로

"우리 큰딸  라면 꼼이 다 준다!"  여기서 삐꼼이는 우리 집 강아지다.

삐꼼이 역시 평소에는 밥을 줘도 먹는 둥 마는 둥 삐꼼히 쳐다보지만

라면이라면 달려오는 속도가 그렇게 빠를 수 없다.

담장 옆에 언니는 무슨 배짱인지 요지부동이었고 아빠는 결심을 하셨던지

꼬들꼬들 라면을 꼼이 밥그릇에 쏟아부었다.


설날이 돼서야 언니의 지독한 시위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내 빨간 구두와 막순이 빨간 구두는 저녁노을이 온 동네를 물들일 때까지 그렇게 춤을 추고 다녔다.


지금이야 크록 o 다, 레인부츠다, 형형색색 액세서리를 따로 부착하고 나름대로 멋을 낼 수 있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 시절 빨간 구두 한 켤레 선물 받는 날은 밤이 그렇게 길 수가 없었다. 머리 맡에 두고

밤잠을 설칠 정도로 설렘을 주던 그 시절의 빨간 구두처럼 나 또한 그 누군가에게 설렘이고 싶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끔 무디어진 감정의 날을  갈아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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