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의 따뜻한 이야기
밤사이 내린 눈이 마당 한편에 있는 닭장 문이 열리지 않을 정도로 쌓였다.
빗자루로 연신 쓸어내시던 아빠가 계란 두 개를 들고 나오신다.
날씨가 너무 추워져서 닭이 알을 잘 낳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
딸들에게라도 먹일 수 있어서 다행이라 하신다.
하지만 아빠 밥상에 겸상도 못하게 하시는 우리 엄마에게 통할리 없다는 걸 잘 안다.
한 개는 오롯이 아빠의 몫이 될게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서둘러 학교 갈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선다.
멀리 보이는 큰길까지 벌써 부지런한 아빠는 두 딸의 등굣길을 위해
길 위에 눈을 한편으로 다 쓸어 놓으셨다.
학교에 도착하니 이미 등교한 아이들 몇몇의 양은 도시락이 난로 위에 올려져 있다.
보통 3교시가 되어야 올리는 건데 그때쯤 도착하는 산너머 아이들을 위해
먼저 온 아이들은 점심때가 되면 식을 것을 알겠지만 미리 올려놓는 거다.
여기서 "산너머 아이들"이란 표현은 마을의 안쪽에 자리해서 산을 하나 넘어야만
보이는, 아주 아기자기한 마을이다.
여름이면 수려한 풍광과 맑은 물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지만
겨울이면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는 마을로 그나마 하루에 한두 번 다니는 버스마저
끊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눈으로 덮인 길을 서로의 발자국만으로 길을 만들며 그렇게 학교에 온다.
수업 도중, 창가 옆 자리에 있던 아이가 먼저 "선생님! 애들 오고 있어요"
모두들 창가로 우르르 달려가 창문에 몸을 달싹 붙인다.
나는 그들 무리에 섞이지 않고 서둘러 교실 문을 나선다.
그중에 "영순이"라는 ,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엔 내 가슴을 조마조마 애를 태우는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난 영순이를 마중 나가서 가방 안에 있는 "양은 도시락"을 면저 챙긴다.
교실 안에 있던 아이들은 일순간에 난로 위에 있던 양은 도시락을
일사불란하게 치우기 시작했고 이내 이 아이들의 도시락을 올리기 시작한다.
주인을 기다리던 난로 옆자리가 하나 둘 채워지고 바지에 붙어서 봄이 돼도
녹지 않을 것 같던 눈들이 어느새 녹아서 뚝뚝 떨어져도
곱은 손 호호 불어가며 책장을 넘긴다.
겨울날이 그렇지만 해가 떠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아서
도시락을 먹으며 큰 눈 굴려 가면서 눈길을 걸어온 이야기에 여념 없던
영순이는 그렇게 잠시 학교에 머물다 서둘러 눈길을 나선다.
지금은 다양한 보온 도시락의 등장과 어느 회사의 햇 O 덕분으로 양은 도시락은
잊혔지만 그 시절 양은 도시락은 단순히 도시락이 아닌 친구들 간의 따뜻한 정과
추억을 담는 소중한 그릇이었다.
난로 위에 올려 둔 도시락이 순서가 바뀌어 누룽지로 변할 때도 있지만
그것 또한 나누어 먹으며 한바탕 웃던 그 시절이 가끔씩 그립다.
빠르게 변해 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가끔씩은 이런 추억 하나 꺼내 보는
잠깐의 여유도 삶의 활력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