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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노아 레인 Aug 27. 2024

갤러그 아저씨

아저씨 고맙습니다!

 특별히 살 것도 없으면서 기웃거려 보는 아이들의 필수 코스가 되어버린

그곳! 문구점이다. 연필, 지우개, 공책 등 그날이 그날인 것 같다.

다만, 일기장이 어느 날 갑자기 자물쇠가 달려 있어서 묵직하니

그 안에 비밀을 한가득 담아야 될 것 같은 독특한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했다.

친구들과 대화하다가도 문구점에 뭔가 새로운 게 들어왔다는 정보만

입수하면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간다.


그러던 어느 날, 진짜 괴물이 나타났다!

문구점 앞을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지키는 수문장처럼

그 괴물은 그렇게 떡하니 지키고 있다.

다름 아닌 보기에도 투박하게 생긴 게임기였다.

그것도 두대 밖에 없는...

아니 아이들이 몇인데 어떻게 저걸로 버텨낸단 말인가!

역시나 남자아이들이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서로 앉겠다고 넘어지고 고꾸라져도 누구 하나 다투는 일은 없다.

살짝 어깨너머로 바라보는 그곳은 정말이지 신세계였다.


어쩌다가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만 보았지, 이렇게 여러 대가 무리 지어 빛을

뿜고 연신 뭔가를 쏘아대며 정신을 쏙 빼놓는 것은 처음이다.

절규를 하는 소리가 들리면 가차 없이 다음 아이 차례가 된 것이다.


어느 날, 이상하게도 그곳은 적막감이 흘렀다.

게임기가 아이들을 기다리다 지쳤는지 연신 하품을 해대고 있다.

그래! 나도 한번 해보자!

침을 꼴깍 삼켜가며 겨우 꼬마아이 엉덩이나 걸칠듯한 의자에

엉거주춤 앉아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누군가 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너는 비행기 봤어? 한대도 아니고 여러대?"

깜짝 놀라 뒤를 보니 우리 마을의 아저씨다!

항상 그렇듯 초점 잃은 눈동자로 방긋이 웃고 계신다.

일명 "월남 아저씨"라 불리는, 항상 방안에만 계셔서 피부가 도화지처럼 하얀 아저씨.

까만 내 피부가 싫어 내심 부럽기도 했던 그 아저씨다!

아! 그래서 아이들이 없었구나! 아저씨가 무서워서....


마을 사람들 말로는 월남전에 다녀와서 머리가 이상해졌다는 바로 그분이다.

"아저씨 해보실래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를 옆으로 밀쳐내고 손이 안 보일 정도로 버튼을 눌러 대신다.

몇 번 해보신 것처럼 아주 능숙하다.

아저씨 집에 가면 TV만 보시면서 아줌마가 내미는 인절미에 조청만 연신 찍어 드시고,

뭐라고 알아듣지 못하는 혼잣말만 하시던 모습만 봐서인지 너무도 놀라웠다.

그렇게 아저씨가 멋있을 수가 없었고 마을에 자랑하고 싶어서

게임이고 뭐고 한달음에 집에 왔다.


그럼 그렇지! 엄마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 손을 붙들고 아저씨 집으로 향했고

아줌마 또한 피식 웃어넘기는데 아저씨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좀 전의 모습은 어디 가고

파리채로 연신 애꿎은 파리만 호떡처럼 납작하게 만들어 놓으며 여느 때처럼 혼잣말을 하셨다.

나는 순식간에 거짓말쟁이가 되었고 그 이후로  마당을 서성이고 있는

아저씨를 발견하면 "아저씨 갤러그 게임 잘 아시죠?" "하러 가실래요?" "저 동전 있어요"

아무리 얘기해도 마당에서 자기네들끼리 잘 놀고 있는 닭들만 닭장 안으로 몰아대고

들어가기 싫은 닭들의 아우성은 흙먼지와 함께 거세어졌다.


그때는 "월남이 어디지?" "어디길래 대체 비행기가 그렇게 많이 날아다닌다는 걸까?"


아저씨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될 무렵, 그때는 이미 아저씨가 세상을 떠난 후였다.

난 갤러그 게임을 볼 때마다 멋있게만 느껴졌던 철부지 시절의 내 모습이 부끄러워지고

전쟁이란 참으로 슬픈 일이고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된다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 그 형태가 어떻든 아픔은 아픔이다.

다만, 그 아픔을 서로 보듬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며 손 잡아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삶에 잔잔하게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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