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이란 직장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것에 비해서 달랑 박스 하나만
들고 남편은 그렇게 마지막 퇴근을 하였다.
새벽 6시에 출근을 해서 한밤중이 돼서야 퇴근을 하는 일정한 패턴을
살고 보니 나 또한 막연하게 새벽밥에서 해방된다는 설렘과
아침마다 루틴처럼 치르는 남편의 올백을 고수하는 머리 손질에서
벗어난다는 편안함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하지만 설렘은 설렘으로 끝날뿐, 다음날부터 상상해 보지도 않은
일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30년을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던 남편은 새벽 5시가 되니 역시나 일어나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냥 일어나서 다니면 괜찮겠지만 혼잣말로 잔소리를 해가면서...
여기 있던 물건이 왜 저기 있냐는 둥, 분리수거가 제대로 안되어 있다는 둥..
문제는 새벽이 아닌 아침이 더 심각했다. 거실 한복판에 이불을 펴고 TV시청을
하는데 청소도 못하게 하고 뒹굴뒹굴 정치 프로그램을 보면서 갑론을박을 해대기
시작했다. 회사 다니면서 남들 출근하는 시간에 지겹도록 누워 있어 보는 게
소원이었다는 표현을 하면서..
하지만 난 30년을 남편 출근 시키고 나면 청소를 하고 우아하게 커피 마시고 있을
시간인데 내 시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남편의 시간만 존중되며
그렇게 우리 부부의 시간은 동상이몽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더더구나 직장생활에 시간밥을 먹던 남편은 12시가 되니 밥을 찾기 시작했고
저녁 9시가 돼서야 난 그 시간밥과 잔소리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 루틴을 고수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30년 동안 자식을 키우면서
큰 어려움 없이 살아왔었고 퇴직하기 전, 경제적인 면에서 가족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준비를 해놓은 부분들을 높이 사며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때로는 얄미운 짱구 같지만 저녁 9시면 잠들어 있는 모습에서 안쓰럽기도 하고
하루종일 잔소리 하던 입술을 꼬집고 싶지만 "내일은 더 잘해줘야지"
하며 다짐하는 나는 역시나 어쩔 수 없나 보다.
나처럼 퇴직한 남편을 둔 아내분들의 삼시세끼 여름 나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