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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DAK 노닥 Sep 23. 2021

소슬바람 곁에서

바람을 묵상해본다.

도쿠토미 로카, <자연과 인생> 에서 이렇게 말한다. 

"표연히 어디에서 오는 줄도 모르게 오고, 표연히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게 사라진다. 처음도 없고 끝도 모른다. 소소하게 지나가니 사람의 애를 끊는다. 바람은 지나가는 인생의 소리이다." 

9월부터 불어오기 시작한 갈바람에 이 같은 감정을 느껴보지 않은 자가 누구겠는가? 뜨거웠던 여름을 보내고서 갈바람은 조금씩 조금씩 가슴 한 켠에 남아있는 뜨거운 감정을 깨지지 말라고 스멀스멀 식혀주는 것 같다. 

여름마다 뜨거운 감정이라니, 단단한 철도 새빨갛게 달구어 급히 찬물에 담그면 균열이 가는 법. 뜨거운 마음도 이와 같아서 갈바람의 싸늘함이 아니면 금세 균열이 생겨 깨져버릴 것 같은 연약한 것이다. 


캐논 오토보이 루나/자동카메라/ 코닥 컬러플러스 200 필름

갈바람은 서늘하다. 아직 9월이라 햇빛이 중천에 떠 있으면 따가울 법 한데도 계절이 한 바구니 시원하게 쏟는 갈바람 덕분에 땀이 식는다. 이 계절은 사진가들이 다니기 가장 좋은 계절. 계절이라는 것이 만약 여신의 모습을 한다면 나는 어쩌면 가을이라는 여신이 사계절을 대표하지 않을까 싶다. 

봄은 웃는 얼굴이 참으로 귀여운 상으로 이리저리 바위를 통통 뛰어다니며 나무를 어루만진다. 

여름은 살짝 탄 얼굴인데,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으며 발을 반쯤 시냇물에 담고 있을 법 하고, 

가을이야말로 나머지 세 여신이 흩뿌려 놓은 생명-죽음의 결과 보고서를 정신없이 휘몰아치면서 바쁜 듯 타자를 두들기고 있다. 

겨울은 잠을 자고 있고- 


라이카 바르낙IIIC 모델, / 캐논 세레나 28MM/ 엑타100

내가 이렇게 열중하고 있는 이 가을을 사랑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일단 가을은 여름이 벌려놓은 모든 일들을 마무리하고 있는 듯 해서다. 그 가을이 한숨을 쉴 때마다 소슬바람이 부는 것 같으니 우리의 처지와도 매우 비슷하다-, 일단 태어나서 살아보기는 하는데 바쁘게 치이는 현실 속에서 커피 한 잔으로 위로를 받는 그 작은 행복 속에서 나는 내 모습이 가을과 닮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가을이 그것을 달가워하지는 않을 수 있으나. 


소슬바람은 무심한 듯 마음을 할퀴고 간다. 로카가 이야기했던 바람이라는 것이 이런 종류의 바람이 아니겠는가? 사랑을 하고있는 사람이든 사랑을 보낸 사람이든, 가지고 있는 모든 세계를 채울 수 없다는 공허감 때문에 그들은 소슬바람을 맞으며 생채기를 이겨내고 있는 것이다. 

소슬바람을 맞으면서 꿋꿋히 견디고 잔뜩 나를 위해 비축하게 될 겨울이 올 때에 가을이 참으로 짧았구나! 하고 탄식하게 된다. 어찌하여 가을은 이다지도 짧은지! 

어렸을 적 가을을 가장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사계절 내내 가을만 우리 곁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하지만 나머지 세 여신의 미움을 받는 것은 곤란하니, 가을 예찬은 이만 하도록 하자. 

한폭의 그림같은 아버지의 사진. / 라이카 M 시리즈 중 하나/ 후지 프로비아 100F / 저물어버리고 쏘옥 모습을 감춰버린 가을 바다에 아직 남아있는 온기. 

소슬바람에도 식지 않는 이 조그마한 따듯함 때문에, 가을은 더 없이 아름답게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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