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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순 Sep 12. 2018

떠나는 자의 뒷모습 : 잘 살아요, 우리도 잘살았으니까

[출간전 연재 2] <내 집은 아니지만 내가 사는 집입니다>

열여섯 번째 집, 베란다.




집에 혼자 있을 때면 가만히 집을 둘러본다. 


아무것도 없는 벽 그리고 천장과 벽의 이음새, 문틀이나 전등 스위치의 위치 같은 것. 방 한 칸이니까,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아도 천천히 모든 걸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예전 세입자가 저기에 행거를 뒀었나 보구나.

집 보러 왔을 땐 저기가 침대 자리였는데, 이런 생각을 한다.


그 모든 낡아빠진 것을 오래오래 보고 있자면 그 동안 이 집엔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 그 사람들은 집에 혼자 있을 때 뭐 하고 있었으려나, 쓸데없이 이런 게 궁금해진다.


이사 오기 직전에 살았던 사람은 그나마 어떤 사람인지 조금 짐작이 간다. 집을 구하러 다닐 때 전 세입자의 방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내 열네 번째 집의 전 주인은 결혼을 앞둔 직장인 남자였다. 신혼집으로 물건을 좀 옮겼는지 가구나 짐이 많지 않았다. 주방에는 낡고 더러운 가스레인지가 놓여 있었다. 결혼하실 분이라기에 버리실 거라면 내가 사겠다고 부동산에 말해두었다. 하지만 세입자가 팔지 않겠다고 해서 새 가스레인지를 샀다. 그런데 이삿날 그분이 그 낡은 가스레인지를 버려두고 간 걸 알게 됐다. 뭐지….


가스레인지만 버리고 간 게 아니었다. 종량제 봉투에 넣지 않은 각종 쓰레기도 함께였다. 화가 났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그래, 냉장고에 음식물 버리고 가는 인간들도 있다는데, 하는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하며 쓰레기를 치웠다. 부디 그분이 결혼해서는 재활용품 분리수거도 잘 하시고 쓰레기는 합법적으로 종량제 봉투에 넣어 버리시길 빈다. 


열여섯 번째 집의 세입자는 얼굴을 보고 대화도 나눴다. 꼭 본인이 있을 때 집을 보러 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집주인이나 부동산에 집 비밀번호를 알려주기 싫었던 것 같다. 집을 보러 가는 길에 집주인과 부동산 중개인이 세입자를 욕했다. 하지만 나는 그 세입자가 너무 이해됐다. 비번을 안 알려줘도 문을 따고 들어오는 세상인데 그럼.


세입자는 빨래를 널고 있었다. 빨래를 너는 그녀 뒤로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빛과 가벼운 바람이 느껴졌다. 이 집으로 이사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왜 나가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집주인이 월세를 올려달라고 하니깐 그렇죠.”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급하게 이사를 해야 했던 나는 결국 나는 그 집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계약서를 쓰는 날 부동산에서 다시 한번 전 세입자와 그분의 어머니를 마주쳤다. 집을 보러 갔을 때와 달리 세입자의 표정이 조금 더 편안해진 것을 느꼈다. 괜찮은 집을 구한 걸까? 묻지는 못하고 부동산을 나오는데 전 세입자의 어머니가 웃으며 나에게 이런 인사를 해주셨다.


“잘 살아요. 우리도 잘살았으니까-”


그게 너무 멋있었다.


그들이 남기고 간 집 역시 정갈했다. 누군가가 항상 쓸고 닦고 사랑하던 집에 내가 살게 됐다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됐다.


나도 언젠가 다음 세입자를 만나게 된다면 꼭 그 어머니처럼 멋진 인사를 건네고 싶다.


“잘 살아요. 나도 잘살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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