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책과 글에 대한 이야기
집에 책이 한 권도 없는 사람과는 만날 수 없다. 누군가를 알게 돼서 잘 만나다가 집에 갔는데 책이 한 권도 없다면 진심으로 당황할 것이다. 자격증 문제집 빼고 책이 한 권도 없다고? 마음이 진짜로 식을 것 같다. 진지한 관계는 아마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들 것이다.
몇 년 전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 당시 첫눈에 반했다라는 느낌과 가까운 사람과 사귀게 되었다. 그런데, 집에 가니 책이 문제집 몇 권 밖에 없었다. 너무 신기했다. 난 평생 발에 차이는 게 책이었고 집이나 내가 자주 머무는 공간에 책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어떻게 집에 책이 없을 수가 있지? 그저 신기했다.
난 책이 늘 아주 익숙했다. 외할아버지는 업종을 바꾸시기 전까지 서점을 오래 운영했고 엄마는 서점집 딸이었다. 내가 자라면서 본 엄마는, 한 손으로 세기 어려운 근래 몇 년 간의 나처럼 늘 책을 읽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도 읽고 평범한 날에도 읽었다. 늘 책 몇 권을 동시에 읽고 있었다. 나는 책을 읽는 엄마가 좋았다.
엄마가 늘 책을 읽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책을 읽는 사람은 헤쳐나갈 수 있다는 마음속 믿음 같은 것이 생겨났다. 엄마는 화내거나 슬퍼하거나 무너지는 대신 늘 책을 읽었기에 엄마를 믿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책을 읽는다. 사소하게 어려운 일이든, 그보다 조금 더 힘든 일이든 우선 서점이나 북카페에 가서 책을 찾는다. 책은 내가 맞닥뜨린 모든 문제의 답을 가지고 있었다. 책을 계속 읽다 보니 시간이 걸렸지만 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을 쓰고 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책을 읽었고 글을 썼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초입에 다리를 다쳐서 여름방학 내내 침대에 꼼짝없이 감금됐던 적이 있다. 감금이라는 말이 맞다. 왜냐면 빼빼 마른 어린아이는 오른쪽 다리에 붕대를 하고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있었고 엄마는 내 다리 위로 접이식 소형 테이블을 펼쳐놓고 책과 공책, 연필을 두고 오전마다 운동을 갔다.
나에게는 숙제가 있었다. 하루는 책을 읽어야 됐고 다음날은 독후감을 써야 했다. 침대에 꼼짝없이 갇힌 채로 방학 내내 그렇게 읽고 쓰고를 반복했다. 귀찮았지만 받아들였다. 최소한 하루는 안 써도 되니까 이틀 중 하루는 나름 방학이라고 생각했다. 다리를 다쳤으니 밖에서 놀 수도 없었고 오전에 숙제를 다 하고 엄마가 돌아오면 책과 글 지옥에서 해방된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 엄마가 돌아오기 전에 어떻게든 다 쓰려고 했다.
엄마가 사두었던 책들이 늘 재밌는 책도 아니었고 독후감을 어떻게 쓰는 것인지 학원에서나 유튜브로 배우지도 않았다. 그땐 유튜브가 없었으니까. 책이 담고 있는 것의 반의 반도 이해를 못 했을 테지만 책 내용 중에 흥미로웠던 부분을 쓰고 그 부분에 대한 감상을 적었다. 전체적으로 요약을 한다거나 전체적인 감상을 적을 수 있는 수준은 전혀 아니었다.
한참 놀고 난 후 저녁시간 즈음에 엄마가 맞춤법과 문장 수정을 해주었고 첨삭도 아주 멋지게 해 주었다. 어린이가 엄마의 숙제로 쓴 독후감이 멋있는 문장과 멋있어 보이는 착한 나라 어른이의 감상문으로 변해있으니까 신기했다. 마치 엄마의 문장까지가 내 글인 것 같았고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그때부터 가졌다. 아직 내가 내재화한 생각은 아니었지만 엄마의 감상까지 흉내 내서 쓰면 밖에서도 잘 썼다는 이야기를 듣는 글이 되겠다고 확신을 가졌다.
글에 대해서 집에서도 밖에서도 늘 칭찬받았다. 학교에서 주최했던 글에 관한 거의 모든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대학교 리포트를 쓰기 전까지는 글을 괴롭고 힘겨워하며 쓰지도 않았다. 단기기억력이 아주 안 좋기에 중학교 백일장 대회에서 어떤 글을 썼는지 하루 뒤에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주 빠르게 휘리릭 어떤 글을 썼고 제출하고 나서 친구들하고 즐겁게 놀았고 상을 받았다. 좋은 글은 늘 빨랐다.
어떤 주제를 주면 글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금도 브런치 글은 빠르고 쉽게 쓴다.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을 문장으로 엮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향하는 것은 멋진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멋진 생각을 하는 것이고, 멋지고 새로운 생각을 쉽게 풀어내는 것이다. 내 인생의 모든 면이 거의 꾸밈이 없듯 내 글도 거의 꾸밈이 없다. 예쁘게 보이려고, 없는 감상을 만들어내려고 단어를 더하는 것은 하지 못한다. 초등학교 때는 독후감 쓰기 대회에서 상을 받고 싶어서 엄마가 썼을 감상 같은 것도 덧붙여 내 글을 확장했지만, 지금은 내 안에 있는 감상, 딱 그만큼만 쓴다.
그래서 지금 더 글 쓰는 것이 재밌다. 딱 내가 가진 만큼만 쓰면 되니까. 글의 목적은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내 이야기를 하는 목적은 내가 재밌기 위해, 그리고 누군가에게도 재밌거나 도움이 되면 좋겠어서이다.
그런 나에게, 내가 책 한 권을 사주기 전까지 집에 책이 한 권도 없었던 과거의 남자친구가 재밌는 말을 했다.
연휴라 심심했는지 연락이 와서는 "요즘은 어떤 낙으로 지내? "라고 물었다. 내가 늘 몰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기억했나 보다. 나답게 믿도 끝도 없이 그냥 "나 이제 작가야. "라고 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난 늘 책을 읽었고 다른 일이 없으면 서점에 있었기에 글 쓴다는 얘기에 "그렇구나, 그럴 줄 알았어, 잘 어울려. " 이런 반응일 줄 알았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투 잡 뛰어?" 였다. 그 순간 깨달았다. 단 1%라도 있던 그와의 재회에 대한 생각은 사라졌다는 것을. 집에 책이 없는 사람은 앞으로도 만날 수 없겠다는 것을.
이 사람과 다시 만날 바에야 평생 혼자 사는 것이 낫겠다고 그 순간 생각했다.
작가, 글 쓰는 사람의 가치를 ‘투 잡’이라는 하나의 돈벌이 수단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집에 책이 한 권도 없는 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N잡이 성행하는 시대이니만큼 글 쓴다고 하면 "돈이 돼?"라고 묻는 사람들은 종종 있다. 전자책을 출간해서 돈을 버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나는 종이로 된 책을 출간하고 싶다. 만질 수 있고 표지를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종이로 된 책을 출간할 것이다. 책을 많이 팔아서 돈을 버는 것만이 나의 목표가 아니다. 단지 돈 때문이 아니라 내 책이 많이 읽혔으면 좋겠고, 나와 내 책이 유명해지면 좋겠어서 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책이 팔려야 서점에 진열이 될 것이고 그래야 눈에 많이 띌 것이고 그래야 더 많이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이 읽혀서 다양성, 자기 수용, 더 많은 사람에게 편안한 환경이 보편화되는 것 등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 목적이다.
책과 글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는 사람, 에세이 쓰는 작가의 용기를 돈벌이 수단으로 표현하는 사람과 연애를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