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게임에서 지기로 했다

그냥 ADHD만렙 천재(&)작가가 될래

by 해센스

여느 초기 연인처럼 누가 우위에 설 것인지 파워게임이 한창이었다. 난 연애에 썩 능하지 못한데, 연애에서 갑으로 군림하기에는 감정이 너무 안정적이지 못한데, 그래도 또다시 새로운 사랑에서는 우위에 서고 싶었다. 나는 명예와 권력을 좇는 보스(boss)가 꿈인 사람이다. 몇 년 내로 대표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싶다. 아주 강렬하게. OO씨나 대리, 과장, 부장 다 싫고 평상시에 작가님이나 대표님으로 불리고 싶다.


연애에 있어서도 당연히 갑이 되고 싶었다. 연인이 나에게 속수무책으로 유혹 당해 내가 가끔씩 못된 말과 행동을 해도 절대 나를 떠날 수 없게 만들고 싶었다. 사람들이 대단하게 보는 직업을 가졌거나, 돈이 엄청 많지 않아도 나에게는 다정하고 잘 맞춰주는, 내가 보스인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사람과 만나고 싶었다. 집 안에서도, 밖에서도 VIP(Very Important Person)가 되고 싶은 것이 내 진짜 욕망이다.


연애도 책으로 배워야 해서 로버트 그린의 <유혹의 기술>을 읽었다. 유혹을 하고 싶고, 그래서 갑이 되고 싶어서 읽었다. 유혹자의 유형 중에 코케트(The Coquette)가 있다. 코케트는 기쁨을 주다가 냉정해지다가(뜨겁다가 차갑다가)하는 기술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유혹자이다. 애정을 주는 척하다가 뒤로 물러서며, 자신감이 넘치고 자기 삶에 만족하는 특성을 지녔다. 코케트가 되려면 성적 매력, 지식, 명예 등 상대를 흥분시키는 요소가 있어야 하고, 때때로 상대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해야 한다.


나는 타고난 코케트이다. 뇌가 그렇게 생겼다. 대단히 즐거운 일도, 안 좋은 일도 금방 잊는다. 나를 만족시켜 준다면 금세 뜨거워졌다가 실망시키는 일이 생기면 금세 차가워진다. 뜨거워졌을 때는 뜨겁게 유혹하고, 뜨겁게 표현한다. 차가워졌을 때는 차갑게 말하고 차갑게 돌아서려 한다. 생각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정보 통합 능력이 지나치게 발달해 언러브 버튼​이 눌릴만한 일이 생기면 현연인과 전연인들의 데이터베이스와 통계치를 불러와 뇌의 이별회로를 활성화시켰고 답이 이별인지에 대해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끈질기게 생각했다.


이별이 답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은 스스로를 지독하게 괴롭히는 시간이다. 한 때 뜨거웠던, 믿음을 주기도 했던, 어쩌면 마음깊이 사랑하는 연인을 미래의 불행을 측정하는 저울에 올리고 점 같은 사건들을 하나하나 떼와 무게를 달아보는 것이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는 무게로 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허나, 아주 작은 파편 같은 그의 단어 선택, 행동 거지 하나하나에 지독히 나를 짓눌렀던 과거의 아픔의 무게를 더해 내 미래도 내 과거만큼이나 불행할 거야라며 ‘측정불가, 한도초과, 불행, 이별이 답입니다’라고 결론을 내려버리는 것이다.


아빠는 나한테 따뜻하게 말해서 용기를 북돋워주지 않았는데, 작은 실패를 하면 인생에서 실패한 것처럼 말해서 다시 어떤 도전을 할 의욕도 꺾어버렸는데, 기분 좋게 시작한 하루에 고춧가루 같은 말을 끼얹어 눈물 나고 재채기 나게 만들었는데, 나는 그에게서 이제 좋은 말을 들을 기대조차 하지 않고 더 이상 상처받기 싫어서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는데.


난 아빠처럼 말하는 사람 만나면 행복하지 못할 것 같은데. 어, 아빠가 썼던 말을 하네? 이 사람이 했던 모든 말과 행동, 한 번 저울에 올려봐야 할 것 같아. 난 혼자 있으면 지독히 외로울 때도 있겠지만 이런 말을 들으면 지독히 괴로울 것 같거든. 외로운 것은 견딜 수 있지만 불행? 난 불행이 뭔지 너무 잘 알아. 난 슬픔이 뭔지, 마음 다치는 것이 뭔지, 온몸에 힘이 풀려버리는 느낌이 뭔지 너무 잘 알아. 난 누군가의 옆에서 절대 불행해지고 싶지 않아. 홀로서기를 해서 여기까지 나를 다독이고 지켜온 시간, 지금에서 조금도 과거로 가고 싶지 않아.


그래서 끝없이 생각했고 추락했다. 불행하고 불안하고 외로웠던 성장기가 주는 선물은 아주 화려하다. 아주 아주 두터운 불행 회로, 부정 회로를 선물한다. 그는 나의 이별에 대한 사고 회로를 듣고 너무 부정적이라고 했다. 그 말에도 나는 발작했다. 부정적이라는 평가,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난 올해 1월에도 항우울제를 먹었는데, 내 인생의 아주 단단한 불행 회로와 이별 회로를 선물해 준 아빠는 너는 너무 부정적이라 자기보다 오래 못 살 것 같다고 했는데. 아빠가 나한테 했던 말, 썼던 문장, 화법 난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아. 그런 남자는 만나고 싶지 않아.


나는 조금이라도 아빠를 스치게 하는 연인의 말과 행동에 불행 측정 저울을 당장 꺼내 이별 회로를 풀가동했다. 그리고 잠시나마 특별한 감정을 느꼈던 누군가에게 하루가 급하다는 듯이 이별을 통보하기를 반복했다. 화려하고 따뜻한 언어와 손길로 유혹했다가 냉정하게 사랑을 거두어버리기를 일삼는 상처받은 코케트였다.


50일간의 우리도 그랬다. 밀고 당기기를 반복했다.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나는 가까이 갔다 멀어졌다 했다. 떠날 것처럼 멀어졌다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평생을 함께해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가, 미래를 바라보면 불행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 나에게 과도하게 맞춰주지도, 무리하게 약속하지도 않고, 그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약속하고, 믿어달라고 했다. 표현해 주겠다고, 말 예쁘게 하겠다고 천천히 기다려달라고 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를 유지하며 따뜻했다가 조금 더 따뜻했다가 하는 골디락스 상태의 수프 같았다.


난 너무 걱정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50일 사이에 몇 번이나 눈물을 보였다. 결국에는 늘 그 자리에 있는 그에게 내가 부족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 이래도 괜찮아? 이런 사람이어도 괜찮아? 이런 건 어때? 보여주고 불안해하고 확인받고의 연속이었다.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것 같아라는 말의 이면에는 난 끈질기게 사랑하는 것이 두려운데, 사랑하다가 헤어지는 것이 무서운데, 나를 위해 이런 것도 해줄 수 있어? 나에게 사랑을 보여줄 수 있어?라는 마음의 다른 표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나보다 단단하고 강했다. 나를 선택했던 것에 책임을 져보려고 하는 것, 내 어떤 나약함이나 불안감을 자극할만한 요소에도 흔들리지 않는 면에서는 확실히 나보다 강했다. 상처받은 코케트인 내가 관계를 쥐고 흔들려고 해도 흔들리지 않았다. 떠나지 않을 거면 내 뜻대로, 내가 요구하는 대로 들어줘란 태도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역시 과도하게 맞춰주지도, 과도하게 고집스럽지도 않은 골디락스 같은 통제감을 유지했다.


그래서 난 파워게임에서 지기로 했다. 연애에서만큼은, 이 관계에서만큼은 그에게 통솔권을 넘겨주기로 했다. 내가 사랑하는 나를 믿어주는 그에게 존경심 같은 것이 생겨났다. 나약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스스로 딛고 일어날 수 있는, 발전해 나갈 수 있는 내 회복탄력성과 발전가능성을 믿어주는 그를 존중하고 싶어졌다. 나를 발견해 주고, 좋게 봐주고, ADHD든, 감정기복이든, 우울함이든, 가정환경이든, 불행했던 성장기이든 다 감싸 안아주고 내 장점을 봐주는 그를 이제 믿기로 했다.


그가 주는 안정감을 그냥 편안하게 누리기로 했다. 천천히 나에게 맞춰주는 아이디얼 러버(ideal lover) 같은 그의 사랑을 조금씩 조금씩 떠먹여 주는 대로 받기로 했다.


로버트 그린의 <유혹의 기술>에서 아이디얼 러버는 연인에 대해 연구하고 그의 삶에 없는 것을 채워주는 연인이다. 관찰력, 인내심, 집중력이 필요하다.


나는 코케트를 지나 그저 아이 같은 내추럴(the Natural)한 연인이 되고 싶은 욕망을 이루기로 했다.


내추럴은 어린아이처럼 가식이 없고 솔직한 매력을 발산하는 유혹자이다. 천진난만형(연약함 과장), 개구쟁이형(무사안일, 안하무인적 태도), 신동형(타고난 재능), 개방형(열린 마음) 있다.


내가 원했던 ADHD 만렙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멘탈최약체 BABY​의 연인이 감당가능한 수준의 상위호환 버전이 되기로 했다. 그는 내가 이따금씩 하던 대로 말을 올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적지 않은 나이 차이가 나는 것의 장점을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존칭을 하고 대접해 주면 나는 오빠가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에서 어떤 혜택을 누릴 수 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인내심을 발휘해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속으로 외쳤다. Deal!(계약 성사)


나 인내심 정말 많이 필요한데, 내가 아이처럼 굴어도 참아주겠다는 것, 나를 떠나지 않겠다는 믿음과 안정감을 주는 것 너무 좋은데, 그냥 이 달콤함을 누리는 게 좋겠어.

그래서 난 잠시나마 휘두르려고 했던 마음을 내려놓았다. 그를 믿고, 존경하고, 존중하고, 그가 주는 안정감 안에서 나는 마음껏 아이 같은 모습으로 나만의 재능을 발산하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불안해하며 힘들게 사랑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알아서 나를 행복하게 해 주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다.


나는 예민한 뇌를 가지고 태어났고, 생물학적으로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잘 생산되고 합성되지 않고, 마음이 쉽게 불안해진다. 어린 시절에 아빠한테 충분히 받지 못했던 사랑을 연인에게 받고 싶다. 늘 그 자리에서 나를 사랑하고 걱정해 주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아빠 같은 사랑을 주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 밖에서는 보스이고 예술가여도 연인에게는 매력적인 여자이자 때론 아이이고 싶다.


나의 연인이 재밌고, 안정감을 주는 사람이니까 그를 일단 믿어 보기로 했다.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의 생성과 합성이 잘되게 하는 영양제와 식단관리에 더해 나를 웃게 해 주고 덜 불안하게 하는 그를 옆에 둬보기로 했다.




<참고 및 관련 도서>

유혹의 기술/ 인간 관계의 법칙 - 로버트 그린

마음이 아니라 뇌가 불안한 겁니다 - 다니엘 G. 에이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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