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성과 통제권이 중요한 사람을 만나는 일

파워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by 해센스

연애 초반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인내심을 발휘 중이다. 그가 나에게 딱히 잘못하는 것은 없다. 속 썩이지 않는, 세상 그 무엇보다 어렵다는 "적당히 알아서 센스 있게" 이것저것을 하는, 다른 취미는 별로 없어도 연애는 꾸준히 해온 이상적인 연인과 연애 중이다.


내가 1%의 사람이라면 그는 99%의 사람이다. 잘 모르겠다. 첫인상이 맞다면 그도 1%의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특이한 만큼 그 역시 조금 특이한 뇌구조를 가지고 태어났을지도 모르니 최대한 이해해려고 한다. 이 사람의 작동방식을 관찰해 보고 '아, 이럴 땐 이렇게 반응하는구나. ' 패턴 파악이 되면 처음엔 시행착오가 있었더라도 과민 반응을 하는 입력값을 넣지 않으려고 한다.


심리서적과 대화법에 대한 책을 몇 권 읽고 책에 나오는 대로 접근을 해보려고 했다. 지적과 비난을 최대한 하지 않고 I 화법을 활용해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이렇게 느낀다. ’라고 해보았다. 그런데 책에서와는 달리 이 사람에게는 딱히 잘 작동하지 않는다. "알아서 적당히 센스 있게" 할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이라서 그런지 나름대로 공부하고 연구해서 대화법을 적용하는 것인데도 기댓값과는 다른 반응이 나온다.


그는 자율성과 통제권을 모두 중시하는 사람이다. 지적받고 싶지 않으니 적당히 말하면 알아서 빠르게 행동 변화를 하기는 하는데, 나의 요구에 거부반응을 심하게 일으킨다. 그래서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나 역시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해내고야 마는 사람이라서, 그가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라면 더 정교하게 접근해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연애에 있어 자율성과 통제권을 중시한다는 것을 바꿔 말하면 상대방의 요구사항에는 사안에 따라 꽤나 극적으로 반응하고, 반대로 상대방이 하거나 하지 않았으면 하는 점에 있어서는 분명하고 단호하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지시당하거나 휘둘리고 싶지 않고, 오히려 나 자신, 심지어는 상대방의 자기결정권에 속하는 부분에까지 통제권을 지닌 상태에 있고 싶다는 뜻이다.


나 역시 자율성과 통제권이 정말 중요한 사람이다. 그래서 더 그의 마음을 잘 이해한다. 그는 내게 통제권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인지하고 있고, 나 역시 그가 자율성을 중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통제권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처음부터 명시적으로 말했고,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성향 파악을 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나이차이가 있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서 기본적으로 평등한 관계를 지향한다. 그가 주는 안정감 속에서 어느 정도의 통제권을 내려놓으려고 했지만, 자존감이 허락하지 않아서 포기했다. 어차피 그는 아빠도 아니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천사 같은, MBTI 가운데 두 글자가 NF인 사람(주관적인 생각)도 아니다. 아이 같은 연인이 되기 위해 통제권을 조금 내려놓는 일은 NF와 만날 때나 가능할 지도 모른다.


연인 관계에서 대놓고 통제권을 행사하면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율성과 통제권이 중요한 사람들은 상대방이 아무리 미묘하게, 혹은 교묘하게 원하는 것을 주입해도 귀신같이 알아챈다. 이미 어딘가 불편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장기적으로 관계에 악영향을 끼친다.


나도 모르게 내가 어딘가 조금 손상되는 느낌,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을 잃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트렌디한 내 모습을 좋아했는데, 연인이 좋아할 것 같은 옷을 입는 내 모습을 발견했을 때, 나는 사실 ADHD의 어떤 이면, 미친 몰입력과 추진력, 그리고 ASD가 주는 어떤 종류의 천재성을 발휘할 때의 내 모습을 좋아했는데, 예민함을 줄이고 평범한 사람처럼 둥글둥글해져 가는, 그리고 재능도 함께 잃어가는 내 모습을 발견했을 때, ‘이건 내가 아닌데?’란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연애를 하며 나를 잃어간다는 느낌은 패션, 성격과 성향뿐 아니라 시간을 보내는 방식도 포함한다. 연애를 할 때는 이런 데이트를 하고 싶고, 데이트를 하면 이런 것들을 교류하고 싶고, 이런 종류의 감정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까지가 나의 자아상이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만, 그리고 급기야는 이상적인 데이트와 감정 상태마저도 현연인에 맞춰질지 모르지만, 그 이전에 분명히 확립된 이상적인 데이트에 대한 그림이 나에게는 있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연애를 하는 일이 새로운 우주를 받아들이고, 그 사람의 현재뿐 아니라 살아온 인생을 조금씩 조금씩 내 안으로 편입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낯선 것들, 혹은 거부감이 드는 익숙한 것들을 갑작스럽게 너무 빨리 너무 많이 흡수해야만 하는 상황이 나의 이상과 내가 원하는 나, 나에게 속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와르르 무너지게 한다.


연애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나를 조금은 잃는 일이지만,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을 만날 때, 그리고 내게 기존에 익숙했던 것보다 높은 정도의 통제권을 행사하는 사람을 내 세계에 들일 때, 나를 잃는다는 느낌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다.


자율성과 통제권은 멋있다. 내가 중시하는 가치를 가진 사람을 볼 때 매력적이게 느낀다. 나에게 휘둘리지 않는 남자, 적당한 통제감을 유지하는 남자는 분명 멋있다. 그 모습 또한 흔들리는 내 마음을 묶어두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멋있는 것들은 내가 가질 때 더 가치 있다. 내가 나를 우선 멋있게 볼 수 있을 때, 내가 나에게 중요한 가치와 우선순위를 지켜내고 있다는 확신이 들 때, 자존감이 바로 서고, 관계에서 일차적인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연애에 있어 파워게임이란 단지 누가 더 통제권을 행사할 것이냐, 누가 더 관계에 있어 우위를 점할 것이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연인 관계, 그리고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의 파워게임에서 나 자신의 욕구를 희생시키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 연인이 나를 완전히 일방적으로 휘두르려 했던 적은 없다. 그도, 나도, 그저 호불호가 있는, 그리고 자기 생각이 조금 강한, 하지만 꽤 이해심이 많고 양보도 잘하는 사람들이다. 그저 자율과 통제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 작은 것들에 여전히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끌려간다는 것을 안다.


내 결정, 내 인생 끌려가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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