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유발자의 일상
track 6.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거야 - 장범준
ADHD의 전문 분야가 있다면 이별 유발이다. 내가 ADHD 하면 떠오르는 불성실한 태도, 호기심과 충동성으로 여기저기 다른 이성을 기웃거리는 행위 이런 걸로 이별을 유발했다는 것은 아니다.
팩트(fact) 폭격이 이별 유발의 사유이지 성실성으로 따진다면 나는 12년 개근의 연애모범생일 것이다. 학교도 데이트 약속도 지각은 종종 했지만 결석은 안 했다. ADHD에게 이 정도 면죄는 해주길. 난 잘 아프지도 않고, 아프다고 해서 못 만날 정도인 적도 없었다. 참고로 모솔이라면 지병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아프다며 데이트 자주 취소하는 사람은 진짜 최악이니 절대 상대도 하지 말길! 병중이 자주라면 당신이 그냥 out of 안중인 것이니!
그런데 진짜로 시각적, 청각적으로 정신이 팔리는 일은 꽤 있다. 어딘가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연예인 최정원 닮은 사람이 있으면 한번 더 보게 되고 코인노래방에서 벽을 뚫고 중저음 목소리로 감미롭게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면 누군지는 모르지만 좋다고 난리다. 이런 나한테 뭐 하는 거냐며 "나의 오랜 그대"는 제대로 삐졌었다. 사실 난 질투받고 싶고 혼나고 싶은데, 그렇게 누가 나한테 크게 뭐라고 한 적은 없다.
내가 이렇기 때문에 내 남자의 시선이 지나가는 곳을 유심히 봤던 것도 같다. 나의 로봇(BOT)이라면 지나가는 여자를 힐끗 봐서는 안된다. 뭐, 같이 좋아하는 연애 리얼리티 TV의 청순한 그녀 정도에 잠깐 시선이 스치는 정도라면 용서할 수 있지만. 대체로 난 외모든 성격이든 나와 비슷한 느낌을 풍기는 여성을 좋아하기 때문에 리얼리티 TV를 볼 때 둘이 반드시 비슷한 여성 취향을 공유해야 한다. 나랑 전혀 다른 스타일의 그녀를 픽(pick)한다면 그건 이별 사유다. 나에게 꽂혔다는 명제에 금이 가는 행위니까.
잘 데이트하다가 같이 연애 리얼리티를 보던 도중 "저들 중 누가 좋냐?"라는 질문에 그가 나랑은 너무 다른 성향의 그녀를 픽해 갑자기 집에 가려고 했던 적이 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난 나의 규칙에 이만큼 진심이다. 그는 봇(BOT)의 지위도 획득하지 못했고 나를 순수하게 사랑한다는 내 마음의 확신도 얻지 못했다.
잠시 시선과 청각이 팔릴 순 있어도, 이별 유발 근처에도 가지 않을 만큼 난 내 남자친구에게만 집중했고 성실했다. 내가 꽂히지 않은 상대와 연애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고차원적이지도 않을뿐더러 꽂힌 상대라면 ADHD의 과몰입(hyper-focus)은 빛을 발했다.
난 사람에게는 취향이라는 게 있다고 믿으며 내가 평소 취향이 아닌데 어떤 다른 이유들로 갑자기 날 골랐다고 하면 그것은 불안감을 유발한다. 다른 이유, 그런 건 싫다. 결혼하기에 좋아 보이는 이유로 나를 선택한다든지 당신의 이상형에 나를 대입해 이상화한 것이라면 더 싫다.
나는 당신의 성격적 이상형일 수 없다. 난 그런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여자친구로는 그런 사람이 아닐 것이다. 솔직히 아니고 싶다.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ADHD 만렙, 멘탈최약체 BABY이고 싶다. 음.. 내가 당신의 이상형이라서 내가 뭘 해도 그냥 사랑해 준다면 연애를 하면서도 멘탈최강자가 되겠지만 당신은 절대 그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순수한 사랑을 받을 때만 나타날 모습일 테니까. 2023년 현재 평균 4시간을 자며 직업 5개(내 맘대로 설정한 내 직업들, 난 그냥 회사원이다)를 동시에 조율하며 웃으며 일상을 영위하고 있지만 당신이 기대하는 정신적, 경제적 지주(정신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존재라는 정도의 뜻)는 되어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절묘하게 위트 있고 재미있지만 연애할 때 개그나 재미 같은 건 추구하지 않는다. 재미(humor)도 있으면 좋지만 그보다는 경험을 공유하는데서 오는 그런 재미(bond)를 추구한다. 재미(humor)를 주고받으려 하는 과정에서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 싫다. 난 그냥 아주 아주 여리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말 한마디에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상처받을 것이다. 난 다시 말하지만 성실하고, 규칙적인, 내 취향으로 생긴 로봇을 추구한다. 나를 사랑하는 "성실한" 그는 어차피 내가 좋아하는 소소한 취미를 함께 할 것이고, 우리만의 코드는 자연스럽게 생길 것이다. 공유할 수 있는 내 취미라면 기껏 해봤자 같이 연애 리얼리티 프로를 보며 한 명 한 명에 대해 분석하고 대화하는 것이지만.
나는 아주 단순하게 내가 그 사람의 타입(type)이면 좋겠고, 그도 내 타입이면 좋겠다.
이렇게 강하게 말하는 건 최근의 일주일 짜리 생채기 정도 난 연애 실패, 그리고 사랑받기 실패로 방어 모드가 되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는 나에게 반한 적 없는 것 같지만 나도 그에게 반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그가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좋아 보이는 것들로 관계를 이상화했을 뿐이다.
솔직히 나는 잠깐이나마 완전히 꽂혔었지만 그건 아마 오래 지속되진 못했을 것이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보면 우린 그렇게 잘 맞는 것 같지 않으니까. 내 부족한 마음을 너의 정성으로 채워보라고 괴롭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성을 쏟을 만큼 나에게 반한 적이 없고 나를 선택하지 않은 그의 혜안과 지적 능력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Smart Boy! 똑똑하니까 그는 어디 가서도 쉽게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게 있어야 한다. 나에겐 때로 ADHD의 축복인 망각력과 단련된 고통 감내 스킬이 있지만 그게 없는 사람들은 상처받지 않으려면 더 지능적이어야 한다.
나 같은 외모적 특성을 가진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말하는 남자의 의도를 가장 신뢰한다. 당연히 그 말이 진심이어야겠지. ADHD여도 그 정도 말의 진실성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육체적인 취향 저격과 끌림은 오래 사랑하는데 필수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내 특이함을 오래 버티려면. 결과적으로도 그랬다. 나를 사랑했다는 명제 자체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던, 최소한 그 지점에서는 상처받지 않고 끝난 모든 연애는 처음부터 그의 입에서 내 어떤 포인트가 평소 이상형이었다는 말을 반드시 동반했다.
난 수많은 여자들은 어쩌면 문제 삼지 않을 "날 좋아하는 다른 이유", " 내 좋아 보이는 것들을 좋아하는 심리"를 꿰뚫어 봤다는 걸 에둘러 전하며 이별을 유발했다.
"넌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내 판단의 이유를 하나하나 대며 사랑할 의지 자체를 완전히 꺾어버렸다. 사람 사이의 일이지만 수학적으로 증명해 버려서 다르게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숫자를 잘 못 읽지만 수학적, 논리적으로 사고하며 말을 할 때 수치적 표현을 즐겨 쓴다. ADHD의 부족한 암기력과 ASD의 부족한 사회 지능을 보상하기 위해 논리력이 후천적으로 엄청 발달했는 지도 모르겠다.
"N번의 사건 중 M번의 행동패턴으로 보건대, 정성과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 라거나 "취미, 취향이 맞지 않아 함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다. "는 말 앞에서도 만나보자고 한다면 진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의도가 확실하거나, 프로집착꾼에 가깝겠지.
난 이런 방식으로 모든 사랑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랑에 푹 빠져 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 내 입에서 나온 것부터가 이미 틀린 것이다. 최소 내가 상대방에게 순수한 호감이 없는 것이다.
때로는 사랑을 받으면 좋을 것 같아 누군가의 호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까란 생각이 들지만, 이미 머리로 하고 있다면 틀린 것 같다.
내가 우연히 사랑에 완전히 빠져버리게 된 사람이 나를 사랑해 주는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흔들리는 불빛 속에서 네 목소리만 들리는 거야 - 해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