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을 쉽게 만드는 것
track 7. 사랑은 늘 도망가 - 임영웅
이별을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난다. 꽤 끈끈하고 단단하다고 생각했던 둘을 이어주는 끈이 어느 날, 어느 순간 '툭' 하고 끊긴다. 진짜 끊어진 것일까, 우리 끝난 것일까 생각하지만 답은 시간만이 알려준다.
우리는 정말 끝이 났다. 그의 간혹 희끗희끗한 검은 머리가, 간혹 검은 선들이 보이지만 하얗게 덮인 머리로 변해도 여전히 나는 그의 풍성한 머리숱을 사랑할 것이라고, 이런 남자를 선택한 20대의 나를 칭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굽 높은 운동화를 신고 데이트를 나가면 내가 조금 더 큰데, 할아버지가 된 그는 더 쪼그라들어서 아주 작아지겠구나 생각했다. 그와 함께했던 나는 늘 먼 미래의 순간을 생각했지 가까운 미래의 어느 순간을 생각하지 않았다.
사소한 갈등이 있어도, 우리의 벌이가 그렇게 많지 않아도, 우리의 주식과 코인이 폭락해 피땀 흘려 벌어서 사고 싶은 것 안 사가며 모은 돈이 물려있어도, 지금 조금 힘든 것만 견디면 우리는 결국 행복한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길에서 할머니의 손을 절대 놓지 않고 꼭 잡아주는 할아버지를 보면 당연히 그와 나의 미래라고 생각했다. 점잖게 나이 든 그가, 멋쟁이 할아버지의 전유물인 헌팅캡을 쓰고 여전히 한 끗 차이를 아는 패션센스를 뽐내며 내 손을 꼭 잡아주고 내 사진을 정성껏 찍어주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의 타고난 센스에 더해 나의 40년 간의 이야기로 양말 선택과 신발과 바지밑단의 길이 조화까지 완벽한 패션을 구사하겠지. 그를 처음 만났던 2018년부터 2022년도까지 이 생각엔 단 한 번도 변함이 없었다. 2019년에 처음 헤어지고 나서도 내가 당장 힘든 것, 걱정되는 것을 못 견디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와 함께 내가 꿈꾸는 완벽한 노년 라이프를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린 서로에게 늘 진심일 것이고, 둘 다 몸에 안 좋거나 인생을 망가뜨리는 습관을 경계하며 건전끝판왕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크게 상처를 준다거나, 상대방을 힘들게 할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하루 하루, 한해 한해가 차곡차곡 쌓이면 당연히 잘 때도 꼭 붙어서 자고 (그는 나이 들면 예민하니까 같은 방에서 자되 각자 침대에서 자야 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밖에서도 손 꼭 잡고 다닐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36년 후에도 서로를 미워하거나 싫어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우리는 헤어지기 바로 직전에 만났을 때까지도 물리적으로 꼭 붙어있었다. 마음도 일시적으로 벌어진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나는 그와 나 사이에 어떤 사건이 있고 나서 달력이 한 장 한 장 넘어가도 나는 마음이 편안하지는 게 아니라 더 분노에 사로잡혔고, 관계를 지키기 위해 혼자 그 분노를 잘 해소하지 못했다.
우리의 관계가 이별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운명이라고 믿었던 지점들, 그가 아니면 누가 나를 이렇게 이해해 줄까라는 생각, 단지 편해지고 당연해진 것뿐이지 나는 그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 그의 무표정을 제외하고는 그를 바라볼 때, 그를 만질 때 아무런 감각적 불편함이 없는 나를 생각하면 그가 이번 생의 내 남자라고 생각했다. 첫사랑이자 끝사랑. 내 사랑과 이기심을 테스트하는 수많은 난관들을 뚫고 지나가면 우리는 결국 같이 살게 될 것이고 같이 살기만 한다면 더 이상 이렇게까지 힘들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하면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우리는 연애했던 3년 중 2년 8개월 정도를 롱디를 했다. 난 꾸준히 보는 게 중요한 사람이었고 남자친구가 내 정서적 욕구충족에 절대적인 요소였기 때문에 그가 주말 근무를 하는 주를 제외하고 모든 주말에 최대한 만나기 위해 다른 주말 악속도 잡지 않았다. 그 역시 나를 우선순위 1순위에 두고 꼭 가야 하는 결혼식만 빼곤 주말에 아무 약속도 잡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단지 연애를 했던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했다. 그는 나의 모든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회사, 운동, 독서를 제외한 모든 것이었다. 모든 이야기, 모든 고민, 모든 슬픔, 모든 기쁨, 모든 설렘, 모든 감각, 모든 집안일, 주말의 모든 식사, 모든 TV 프로그램, 내 옷장의 모든 옷, 모든 신발이었다. 그는 내 옷장의 모든 옷이었지만 나는 그의 옷장의 모든 옷과 신발은 아니었다. 그는 이상하게도 샀지만 안 신는다는 옷과 신발이 많았다. 내가 ASD지만 어떤 면에서 그는 나보다 더 ASD였다. 옷과 신발을 사는데 애초에도 나보다 훨씬 신중했지만, 그렇게 신중하게 산 아이템들도 마음에 쏙 들지 않으면 착용하지 않았다. 똑같은 옷과 신발만 닳도록 입고 신었다. 그는 옷을 항상 마치 세트처럼 조합해 입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상의, 하의, 신발, 액세서리 조합을 다 외워버렸다. 마치 바지만 보면 티셔츠는 A, B 2개 중에 하나 매칭해 입었겠군 이렇게 다 맞출 수 있었다. 어떤 옷을 언제 입었는지도 그는 외우고 다녔다. 우리는 서로의 착장을 언제 어떤 데이트를 할 때 입었는지 대부분 기억했고 서로의 기억이 잘못되었으면 둘 중 한 명이 정정해 주었다.
나의 20대 후반, 그의 30대 중반 우리 연애의 시즌1에서는 데이트 약속 전에 꼭 어떤 옷을 입을지 물어봐서 대충 어울리게 맞춰 입고 나갔다. 몇 년이 지나자 나는 추측게임을 하기 위해 더 이상 그의 착장을 묻지 않았고 그가 입고 올 옷에 대해 추측을 해서 맞춰서 입고 나갔다. 내 예상이 맞았을 땐 내적으로 환호했다. 옷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기억력은 마치 사진과 동영상과도 같았다. 나는 시각적, 촉각적 기억력이 좋은 편인데, 그는 시각, 청각, 언어적(대화 내용), 시간적 기억력까지 좋았다. 내가 몇 년 전에 했던 말까지 기억해 몇 년 후에 그 말이 서운했다고 말해 나를 놀라게 했다.
우리는 서로의 디테일(detail)함을 사랑했다. 나의 편식과 시각적, 후각적, 미각적 감각 과민이 이별을 쉽게도 했지만 그는 내 감각적 정확성과 미세함을 사랑했다. 그리고 나도 전혀 예상 밖의 순간에서도 튀어나오는 그의 감각적 발언을 사랑했다. 그는 건물 주차장 바닥의 색상, 새로 지은 건물의 엘리베이터 안에 설치된 보호용 부직포의 색상과 같은 것을 말하며 예쁘다고 했다. 나 포함 사람에겐 잘하지 않는 말인 예쁘다란 말을 그런 곳에는 쉽게 했다.
우리는 사랑에 빠지기 전 온갖 사전에 학습된 정보와 경험으로 여러 가지 잣대를 만들어 예비 사랑후보를 재단한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고 나면 연인의 “평균에서 넘어선 그 지점들”을 가장 사랑한다. 일반적인 사람들로부터 벗어난 것 같은 그 지점을 나의 연인의 특성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려면 그런 특성들을 사랑한다고 말하게 된다. 이렇게 말을 하고 나면 진짜로 그 지점이 사랑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어버린다.
나는 그에게 '나를 왜 사랑하냐고' 만날 때마다 물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연애 이론 따윈 적용하지 않았다. 그냥 듣고 싶은 말, 궁금한 건 다 물어봤다. 그게 진짜 나다. 왜냐고 끊임없이 묻는 어린아이가 진짜 내 본질이다. “그는 해일리니까 사랑한다, 이유가 없다, 이유가 있으면 사랑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나중에는 그 말을 외워버렸고 내가 묻고 내가 대답했다. 그는 재밌어했다. 그는 ASD에게 안정감을 주는 완벽한 로봇이었다.
ASD는 일관성에서 마음의 완벽한 안정을 얻는다. 내가 백번 물었는데 백번 같은 대답을 한다면 그건 의심할 수 없는 진짜가 된다.
토씨하나 바꾸지 않고 매일 똑같은 말을 하는, 좋아한다와 사랑한다는 말 외에 다른 언어적인 애정 표현을 하지 못하는 그에게 왜 이렇게 표현을 하지 않냐며 나무랐지만 그때 나는 몰랐다. 매일 똑같은 말을 해줘서 내가 그를 완전히 신뢰할 수 있었다는 것을.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명제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내가 편안했다는 것을.
사랑하는 데 이유가 없다고 했지만 나는 이유를 듣고 싶었다. 그래서 계속 물었다. 그는 “아름다워서”라는 말을 추가시켰다. 왜 아름답냐고 하니까 “그냥 아름답다, 해일리 네가 아름다움의 기준이다”라고 했다. 그 말도 무수히 반복해 완전히 믿게 만들었다. 만약 신체의 어느 지점을 콕 집어 그 부분이 좋다는 말을 쉽게 나한테 했다면 사랑의 문제에 있어 이상하게 의심이 많은 나는 ‘그럼 그 부분이 아름다운 다른 사람도 사랑하겠지’라며 무의식적으로 생각해 어차피 그 대답을 좋아하지 않을 터였다. 그는 내 마음을 완벽하게 안정시켜 주는 멘트만을 했다. 무려 5년의 우리가 알고 지낸 기간, 그리고 3년의 여자친구, 남자친구로의 기간 동안.
해일리 너라서 사랑한다, 해맑고 순수한 게 좋다, 해일리 네가 아름다움의 기준이다란 말들로 대체될 수 없는 나 자체를 사랑한다고 무의식으로 확신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은 구체적인 걸 말해달라는 내 집요함의 끝에 그가 다른 이야기를 했다. 자취방의 행거의 기울기를 유심히 관찰하는 내가 좋다는 것이다. 바닥에서 천장 쪽으로 행거의 세로축이 완벽하게 수직인지를 살펴보기 위해 내가 행거를 유심히 관찰하는 모습을 그가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는 그 장면을 기억해 그 지점이 좋다고 했다. 너무 진지해서 귀엽다고 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포인트였다. 하지만 이별을 하고, 몇 달이 흐르고 ASD라는 자각을 하게 되고 그 말을 돌이켜보면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가 사랑했구나라고 느낀다. 그는 ADHD는 100% 아니고 ASD도 아닌 것 같지만 청각 과민이 있었다. 같이 TV를 보거나 유튜브를 들으면 볼륨을 줄여달라, 다시 조금 올려달라, 다시 한 칸 내려달라 아주 구체적이었다. 심지어는 나와 통화를 하다가 2칸을 줄여달라고 했다. 볼륨은 그가 그의 휴대전화로 줄이면 되는데 재밌었다. 나는 그런 그를 사랑했다.
나는 그를 너무나 사랑했지만 시즌2, 3의 우리는 싸움도 잦았다. 이별로 향하고 있다는 순간순간 드는 감각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꼭 맞는 관계이고 이게 정답이라면 하루 하루가 이렇게 힘들면 안 된다는 생각이 점점 자주 들었다. 영원히 함께하는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되는 관계라면, 그 과정의 하루 하루도 편안해야 될 것 같았다. 이별은 아프고 쉽지 않다. 하지만 한 때 사랑했던, 인생의 가장 젊고 빛나는 날들을 서로에게 바쳤던 연인이 각자의 길을 가기로 결정하고, 이별 이후에 하루 하루를 평온하게 보내게 되었다면 만나는 동안에도 많이 힘들었다는 것 아닐까. 그리고 바로 그 힘들었던 지점들이 “이별을 쉽게 만들어주는 것들”이 아닐까.
나에게 그의 입장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몇 년간 나에게 화를 낸 적이 없는 그가 결국 화를 내게 만든 지점이 있었다.
길을 가다가, 혹은 식당에서 갑자기 기분이 확 바뀌어 버리는 그런 지점들이다. 너의 기분 변화 때문에 분위기가 좋았다가 갑자기 안 좋게 바뀌지 않냐며 그게 너무 불편하다고 화를 냈다. 나는 화를 내지 않는 그가 좋았는데 이제 나한테 길에서 이렇게 화를 낸다고? 너무 속상했다. 우연인지 그날 우린 이별의 결정적 계기가 되는 대화와 싸움을 했고 다음날 그는 나에게 1년간 숨겨온 진실을 밝혔다. 어쩌면 반복된 나의 이런 행동과 100% 진심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안 좋아질 때마다 툭툭 튀어나오는 헤어지자는 내 말에 지쳐버린 그도 마음의 준비를 했는지도 모른다. 이별이 찾아온다면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
멀쩡해 보이는 성인이 가끔씩 보이는 예측불가능한 행동들을 그는 힘들어했다. 그가 찾아서 고른 식당에 갔는데 밥을 안 먹는다든지, 카페를 가자고 했는데 그가 길을 둘러 보면서 가다가 괜찮아 보이는 카페에 가려고 하면 그 와중에 기분이 확 안 좋아져 버린다든지 이런 지점들이었다.
그에게는 나의 그런 점이 예측 불가능한 지점이었겠지만 나는 예측 불가능한 그런 데이트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식당과 카페에 갈 때는 대략 찾아보고 가거나 최소한 내가 그 장소에서 느낀 감각을 믿고 가야 실패가 없었다. ASD에겐 이런 게 그냥 밥 한 끼, 커피 한 잔 먹는 게 아니다. 그곳의 분위기나 음식, 커피의 맛이나 향에 압도당해 버리는 것이다. 난 한 입 먹었는데 이상하면 안 먹어버린다. 맛있는 음식을 찾는 게 아니다. 난 올리브오일만 넣은 양상추 샐러드도 매일 먹을 수 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특유의 이상함 때문에 숟가락을 내려놓는 것이다. 아마 특정 식재료나 조미료의 곰팡이 냄새나 신선하지 않음 이라든지, 가게의 위생 상태라든지 이런 것들이었을 것이다. 난 먹는 것에 있어 가성비를 거의 따지지 않는다. 비싼 걸 먹는다는 게 아니라 합리적인 가격의 음식을 주로 먹지만 똑같은 메뉴를 가격으로 비교하지 않는다. 같은 메뉴라도 들어간 재료와 식당의 상태, 모든 것들이 다르니까. 노포, 지하 식당 이런 곳들은 정말 좋아하지 않는다.
카페에 가던 중 싸우던 날 빙빙 둘러 가던 그 길목이 어수선하고 침침하고 그런 길목이었다. 그런 분위기가 ASD의 감정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다.
우리는 지방에서 연애를 시작했고 그때 그는 모든 데이트 장소를 괜찮은 곳으로 계획해서 왔다. 우리의 데이트와 연애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롱디를 하며 서울에서 데이트를 했을 때에도 무엇을 할지, 무엇을 먹을지 대략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서로 편해지고 코로나로 집 데이트 위주로 하게 되자 갑작스러운 밖 데이트를 할 때면 식당 선택이 꽤 큰 문제가 되었다. 까다롭고 먹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내가 대부분 찾았지만 가끔 찾지 않고 그냥 가자고 할 때나 그가 첫끼에 김밥을 먹자고 하는 것은 문제가 됐다. 난 김밥을 첫끼에 먹기가 너무 싫었다. 평소에 빈속에 김밥 냄새를 맡는 것도 울렁거린다. 몇 시간 동안 상온에 재료가 노출되어 있고 각각의 재료가 양념에 절여져 있는 김밥을 싫어한다. 강한 식재료들이 입안에 한 번에 들어오는 것이 싫다. 내가 종종 가는 식재료들이 절여져 있지 않은 신선한 김밥집도 있긴 한데 자주 가는 곳을 뺀 일반적인 김밥집 특유의 분위기도 난 싫었다. 그는 어떻게 매번 좋은 곳만 가냐고 했지만 난 분위기가 깔끔하지 않고 그곳을 찾은 손님들이 깔끔하지 않은 곳들이 싫었다. 김밥집의 분위기가 기분 좋게 보내고 싶은 주말의 내 하루를 망친다고 표현했는데 그는 "네가 그 말을 해서 하루를 다 망쳐버렸다. "라고 했다.
우영우는 김밥만 먹었지만 나는 김밥 말고 첫끼로 차라리 커피와 소금빵을 먹고 싶었다. 나는 첫끼를 밖에서 먹는다면 재료가 최소한으로 들어간 빵과 같은 음식이 좋았다. 그는 우영우처럼 김밥을 좋아했다. 내 기준에 김밥과 김밥집의 향은 너무 이질적이게 강했다.
그 당시에는 나도 나의 이런 모습의 원인을 몰랐다. 기분이 갑자기 변하고 억지로 밥을 먹을 수 없는 나에게 성격 장애가 있나 싶기도 했다.
그냥 전형적인 ASD일 뿐이었다. 그를 만나는 동안 인지를 하고 설명을 해줬다면 나의 그런 지점을 이해해 줬을 것이라 100% 확신한다. 내가 새이든 닭이든 아스파라거스든 아스퍼거든 나 자체를 사랑하는 그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그런 행동들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없으니 그 당시 이해할 수 없었던 것 뿐이다.
안타깝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장애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나도 나에 대해서 이해했다면 내가 매 순간 더 적극적으로 장소을 찾고 기분이 다운되더라도 그런가 보다고 생각하면서 그에게 그냥 지금은 좀 다운됐으니 이해해 달라고 했을 것이었다. 그의 무표정을 탓하지 않고 내가 알 수 없는 표정을 바라보는 것이 힘든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의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ASD가 가지고 있는 지배적인 정서는 공포와 불안이다. 특정 장소, 특정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 예상치 못한 상황이 공포를 주는 것이다. 바로 어제도 글을 쓰고 늦은 시간 귀가하는데 핑크색 옷을 입은 모르는 아주머니가 “아가씨가 이 시간에 뭐 하다가 늦게 들어가는 거냐. ”라며 갑자기 말을 걸어와 육성으로 “무서워. ”가 튀어나왔고 도망쳐 다른 길로 왔다. 육성으로 튀어나오는 일은 나에게도 거의 없는 일인데 그 아주머니의 분위기는 진짜 무서웠다.
ASD에게 세상과 이런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은 단 한마디로 말하면 무섭다. 이번 주에 다른 한 이상한 아주머니도 몇 초에 한 번씩 계속 뒤돌아서 나를 보면서 가서 그때도 길을 삥 돌아 집으로 들어갔다. 진지하게 지하철에서 바로 연결되는 집으로 이사를 고려하게 된다. 길에서 절대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고 도움이 필요해 보이지 않는 이상 타인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나눠주지 않고 전도도 안 하는 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난 “말 좀 물읍시다. ”라는 말도 이상한 사람일까 봐 너무 무섭다. ASD의 삶에 이런 것들이 얼마나 공포감을 주는지 NT들도 이해를 좀 해줬으면 좋겠다.
뇌의 편도체(amygdala)의 과잉 성장이 ASD의 공포에 취약한 정서 상태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나의 뇌엔 공포를 느끼는 아몬드 모양의 기관(편도체)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다.
ASD 연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일반적이지 않은 행동을 보일 때 겁에 질렸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특정 상황이 미래에 대해 불안감과 걱정을 유발했든, 특정 음식이나 식당이 불안감을 주었든, 특정 장소가 공포를 유발했든,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보이는 이 사람이 지금 공포와 불안에 지배당했구나라고 이해하면 거의 맞다.
사랑을 늘 도망가게 해 - 해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