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하수가 된 일상
track 9. 그 때 그 아인 - 김필
오랜 연애는 연애 고수로 만들어 주지 않는다. 오랜 연애에서 축적된 나쁜 연애 습관은 오히려 모태솔로보다 더한 연애 하수로 만들어준다. 은근한 밀당, 강약 조절, 적당한 참을성과 같은 나에게 완전히 빠지지 않은, 내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구사해야 되는 연애 스킬은 잊은 지 오래다. 유튜브로 다시 연애 이론을 복습하려고 하지만 막상 연애를 시작하면 몸에 익은 나쁜 습관이 툭툭 튀어나와 관계를 섣불리 망쳐버릴까 걱정이다.
20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똑같았다. 그 당시 연애를 거의 2년 가까이 한 나름의 인생 업적을 달성했지만, 말 그대로 기간만 긴 연애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제대로 사랑하지도, 사랑받지도 못했고,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이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이지도 못했다. 도망쳐가는 그의 뒷모습만 쓸쓸하게 바라보지도 못하고 나도 출근해야 하니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초등학교 이후로 가장 길게 다닌 학교의 추억이 담긴 그 공간은 다시 찾기도 싫어 한동안 가지도 않았다.
20대 중반 명문대 졸업 깔끔한 스타일의 안정적인 회사원 여자 사람이라는 타이틀. 연애의 시작은 쉬웠다. 나의 유전자 제공자들은 버라이어티한 모양의 뇌신경 유전자를 주었지만 그에 비하면 너무나 평범한 이목구비 유전자를 주었다. 내(my)피셜 호불호 없는 평범한 외모의 사회화된 ND(Neuro-divergent, 신경다양인)는 NT(Neuro-typical, 신경전형인) 보다 더 NT 같은 느낌을 준다. 예의와 배려심 같은 것도 충분히 흉내 낼 수 있다.
내가 구질구질한 연애 히스토리를 가지고 있는지, 아스퍼거인지 이런 것 따윈 날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보였을 리 없다. 나도 그 당시 꿈에도 몰랐다. 다른 별에서 온 것 같을 때는 많았지만 나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이름이 있는지는 몰랐다.
내가 로봇인지 사람인지, 사람보다 눈물이 많은 로봇인지는 뜯어봐야 안다. 나에게 무표정이다가 웃을 때 변화가 너무 크다고 특이하다는 뉘앙스로 이야기해 준 사람이 있다. 사회 속에서 무표정으로 얼어버리는 내 로봇 자아를 먼저 발견했나 보다. 가끔씩 나도 모르게 하고 있던 행동을 들킬 때가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행동들이 이름이 있는 행동인지는 모른다. 나의 무(無)아이컨택, 표정 변화, 손동작 하나하나를 다 살펴봤다면 아마 나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겠지. 사실 잘 모른다. 나를 좋아한다고 느낄 때는 누군가가 아침이나 오전부터 카톡을 보낼 때뿐이다. 친해지기 전에 누군가가 나를 관찰한 결과를 말해주는 것은 불편하기만 했다. 마치 나도 모르는 나를 들킨 기분이었다. 진짜 나도 나를 몰랐었으니까.
연애의 시작과 유지는 다른 문제이다. 첫 긴 연애를 마치고 나서 또다시 ‘100일만 넘기게 해 주세요’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알게 된 사람 중 얼굴이 내 취향의 가로/세로 비율에 들어오고 어깨가 벌어졌고 목소리가 그럭저럭 좋고 직업이 있으면 만났다. 딱히 많이 따지는 건 없었다. 그렇게 만나도 대부분은 좋은 사람이었다. 달콤한 말로 다가오더니 날 떠보기나 했다고 속물이라고 실망해 버린 적도 있었지만.
잘 만나다가 어느 순간 헤어졌다. 대학시절의 추억이 서린 길바닥에 잔인하게 버려진 후 나의 오랜 그대를 만나기 전까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한 달, 50일, 70일.. 전에 다 헤어졌다. 100일을 넘기고 싶었어서 날짜 카운팅에 진심이었다. 이별의 이유를 바로 알 때도 있었고 잘 몰라서 오랫동안 고민한 적도 있었다. 당시의 내가 이유를 찾기 어려웠던 갑작스러운 이별 후에는 마음이 아파 연애에 관심을 딱 끊기도 했다. 연애를 하지 않는 나는 완벽하다. 누군가가 없어도 오히려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내 생활을 완벽히 수행해낸다.
긴 연애가 꿈이었다. 나의 오랜 그대와도 5주년이라는 숫자에 도달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다렸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이면 떠나기가 조금 더 힘들지만 연애를 한다면 둘 중 한 명이 떠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서 긴 연애를 하는 것은 누군가가 내 옆에 온전한 의지로 계속 있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긴 연애를 하면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사람과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라는 훈장을 받는 것 같았다. 마치 당신은 우주에서 왔지만 지구에도 소속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라는 의미 같았다. 한 명에게 온전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지구별에서 나의 가치가 온전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어디에도 온전히 소속된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 어려웠고 한편으론 간절했다.
그래서 이별할 때마다 그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아팠지만 ‘나는 받아들여지지 않는구나’라는 느낌이 가장 슬펐다. 어느 순간에는 누군가가 나와 절대 헤어지지 않으면 그 사람과 결혼해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살아보니 또 아니더라. 그리고 결혼을 이야기하다가도 찾아오는 게 이별이더라.
30년을 넘게 사니 좋은 점은 n번의 이별, 그리고 오랜 친구들, 오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여주는 친구들 덕분에 웬만한 곳에 속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연애를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고 앞으로 결혼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혼자여도 지구별에 당당히 두 발을 붙이고 살 수 있다. 난 작가니까! 내 이야기를 전해주면 되니까.
짧은 연애나 긴 연애나 본질은 같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랑을 하려고 만났던 연인이 맞지 않아서 헤어져도, 사랑을 하던 연인이 맞지 않아서 중도 하차해도 괜찮다. 꼭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상대방의 이별의 이유를 내가 진짜 사랑이니 가짜 사랑이니 하며 재단할 처지도 안된다. 나도 누군가에게 똑같이 속물이었다.
그래도 내면 어린아이의 속마음은 여전히 같다. 누군가를 만난다면 절대 이별하고 싶지 않다. 이 별에 속하고 싶다.
나에게 지구별 영구거주권 티켓을 주겠니?
그 때 그 어른여잔 - 해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