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나
track 8.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 - 하림
이쯤이면 알겠지만 난 연애 중독자였다. 연애 프로그램이든, 로맨틱 코미디 장르든, 내가 만나는 그대이든, 새로운 연애 상대이든 연애에 대한 모든 것에 중독돼 있었다. 연애를 처음 시작한 이후로 연애를 오래 쉰 적이 없다. 처음 제대로 된 연애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공백이 길었다. 하지만 이후엔 거의 쉬지 않았다. 여기에는 그럴싸한 이유가 있다.
첫째, 관성의 법칙이다. ASD는 현재의 어떤 상태에서의 변화를 싫어한다. 좋은 쪽으로의 변화나 싫은 것으로부터의 탈피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결정을 내리고 실행해 옮기지만, 그건 연애의 문제에선 적용하기 어렵다. 정을 준 상대와 한 순간에 눈 딱 감고 헤어지는 건 할 짓이 못된다. 좋아하는데 그냥 행동이 잘 안 되는 것뿐이다. 내가 조금 더 잘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있는 한 노력해보고 싶었다. 상대방이 완전히 내가 세운 틀 밖으로 벗어나야 그나마 이별이 가능했다. 이별을 하게 되면 연애를 하던 관성에 의해 그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채우는 한이 있어도 연애를 하는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다. 난 생활에 빈 틈이 생기는 것을 못 견딘다. 한시라도 쉬지 않고 일을 하든, 놀기를 하든 해야 한다. 그대가 채우던 내 삶의 수많은 시간과 공간이 사라지면 갑자기 지구별에서 두 발이 붕 띄워질 것 같았다. 다시 나를 땅으로 끌고 내려와 줄 지구인이 필요했다.
둘째, 고통 회피이다. 이별은 생각만 해도 고통스럽다.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두렵다. 만나면서 싸워서 고통받는 건 어떤 고통인지 안다. 하지만 이별 후엔 어떤 고통이 찾아올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 사람과의 이별을 피할 수 없었다면 새로운 사람을 찾아 나서려고 했다.
셋째, 친구가 필요했다. 말 그대로 대화를 하고 깊게 교류할 친구. ASD에게 연인은 전부다. 그들은 여러 인간관계를 동시에 조율하지 못한다. 연애를 하지 않을 땐 친구들도 만나고 대화도 하겠지만 연애를 하면 사람에 대한 과몰입(hyper-focus)은 오로지 연인으로 간다. 애초에 연애를 시작할 때부터 이성적 매력만 뿜뿜 하는 그런 남자를 찾았던 게 아니다. 아스피는 인간관계에 있어서라면 부딪치고 깨져서 배워야 하는 태생적 불리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운 좋게도 연애를 시작하기 전부터도 평생에 걸쳐 나쁜 남자의 몇 가지 특성에 대해 간접적으로 아주 많이 깨지며 체득했다. 모태솔로 시절부터 아이폰 메모의 남자 고르는 기준의 70%는 완성되어 있었다.
좋은 남자들을 만났고, 시간이 갈수록 좋은 남자이면서 나와 잘 맞는 남자를 만났다. 부족한 나를 완벽히 보완해 주는 천사 같은 베프를 찾을 자신이 있었다. 학교든 직장이든 왕따나 자발적, 비자발적 아싸 인생은 늘 따라다녔다. 연인은 아스피에게 늘 부족한 사회적 상호작용 욕구를 채우는 인공호흡기와도 같은 존재였다. 밖에선 늘 긴장하고 눈치 봐야 한다. 비교적 가까운 사람들을 만날 때라도. 마음 편하게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친구 한 명은 꼭 필요했다.
그래서 확실히 대답할 수 있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나라는 질문에.
최소한 나에겐 사랑는 다른 사랑으로 절대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는 이별 후에 가장 두려운 것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연애를 하게 되는 것이 제일 두렵다. 사랑받고 싶고 이해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다. 하지만 연애를 하면 2배 더 힘들어질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경험을 통해 여러 차례 느꼈다.
ASD의 시간 개념과 기억력은 특이하다. ASD, 그리고 ADHD는 시간 개념이 없다. 엄밀히 말하면 시간 개념이 일반 사람들과 좀 다르다. 당장 하고 싶은 어떤 것이 너무 중요하게 느껴서 전체적인 관점에서 모든 과업을 제때 수행하는 것이 어렵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당연히 잠도 자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억이 희미해지지 않는다. 감각적 자극이 없으면 기억이 나지 않다가 감각적 자극이 생기면 기억은 아주 선명해진다. 단기기억장치와 장기기억장치의 기억은 입력이 애초에 되지 않거나 입력이 되었다고 해도 평소에 잠들어 있다. 그런데 시각, 청각, 촉각 같은 감각적 자극이 생기면 감각이 기억을 소환한다. 평소에 어떤 사람들의 존재를 완전히 망각할 때가 있다. 수많은 존재들을 완전히 망각해 세상과 완전히 분리가 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다면 전그대의 모든 것들이 되살아나 나를 괴롭게 할 것이다. 새로운 연인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기존에 익숙하던 소리와 피치 차이가 크다면 듣는 것만으로도 전그대와의 목소리 차이가 생생하게 느껴져 너무 힘들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용하는 어휘와 어투가 다르다면 그것 역시 나를 너무 괴롭게 할 것이다.
모든 단어 선택, 모든 말투, 모든 행동 양식에서 전그대와의 차이점이 실시간으로 비교된 보고서가 머릿속에 출력되어 나를 괴롭힐 것이다. 감각이 예민하기도 하고 단기 기억력에 비해 감각적 기억력이 매우 좋다. 그래서 새로운 이성으로부터 익숙하지 않은 감각적 자극이 주어지면 전 연인에 대한 기억이 갑자기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이다.
NT(신경전형인)들은 이런 모습을 단지 전그대를 못 잊었다거나 전그대를 너무 사랑했다거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겠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기억력의 작동 방식이 다른 것이다. 어떤 이야기의 서사(시간의 흐름에 따른 줄거리, storyline)는 잊고 순간순간의 느낌, 감각적 정보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래서 이별로 이르게 된 지난한 과정은 미화되고 전그대들의 감각적 정보는 뇌에 달라붙는 것이다.
기억력에 대해 공부를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나는 논리적으로 연결되거나 주어진 정보를 가지고 사고를 해서 결과를 도출하는 과목만 잘했다. 예를 들면 언어 비문학, 윤리, 사회문화, 경제 등. 서사를 암기해야 하는 역사와 같은 과목은 시험 공부를 해서 시험을 본다고 해도 바로 잊었다. 국사를 예를 들면 중간고사, 기말고사 때마다 공부해서 1등급을 받았는데도 수능 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다 찍었다. 이미 포기하고 응시만 한 것이다. 즉, 이렇게 돼서 저렇게 됐다는 인과가 없이 산발적으로 우연히 생겨난 이야기는 기억을 하지 못한다. A장소에서 전투가 있고 그 후에 B장소에서 전투가 있었다는 정보는 단기 기억으로 입력하기도 어렵고 장기기억으로도 넘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대학교 때 복식사 수업을 들었을 때 패션은 그림과 사진으로 공부하기 때문에 역사지만 시각적인 정보는 비교적 수월하게 암기를 할 수 있었다. 글자 대신 그림으로 보는 정보나 장면은 기억을 잘한다.
이것은 단지 연애와 연애 간에 간격을 둔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답은 딱 하나다. 새로 만나게 될 사람을 많이 보고 목소리를 많이 듣고 모든 감각에 더 많이 익숙해지는 것.
이 괴롭고 불편한 과정을 거쳐서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을 들이는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긴 연애 후의 수많은 연애는 그동안 실패로 돌아갔다. 실시간으로 출력되는 비교 분석 보고서를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는 안다.
이별을 했다면 가장 좋은 것은 혼자 있는 것이다. 게임을 하든 글을 쓰든 여행을 하든 책을 읽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가장 좋다.
새로운 연애는 전 연애를 구제해주지 못한다. 오히려 섣부른 연애를 시작한다면 전 연애가 새 연애의 발목을 잡는다.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살아나네 - 해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