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을 접어버린 순간
track 4. Never Ending Story - 부활
사랑을 해볼까라는 마음의 시작은 늘 독립사건이다.
독립사건 : 두 개의 사건 A와 B가 있을 때, 각각의 사건이 일어날 확률이 다른 사건이 일어날 확률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때, 이 두 사건을 독립사건이라 한다(두산백과)
과거 어느 순간의 나는 그랬고 그 순간의 나는 이랬다.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점들이 비슷했지만 조금씩 달랐다. 매 사랑의 끝에서 나는 조금씩 변화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특히 최근에 겪은 충격적인 개인사로 이성에 대한 판단지점이 더 많이 변형되어 있었다.
남성다움을 구성하는 어떤 지점들에 환멸이 났고 섬세한 대화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원했다. 무의식적으로 강해 보이는 남성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 믿었는데,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내 남자라면 오히려 내가 가장 많이 이해해줄 수 있고 지켜줄 수 있는데, 때론 진심으로 자존심을 내려놓고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난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었는데 그를 만나고 준비가 되었다, 아니 되어 있고 싶었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았던 것처럼 사랑할 준비, 모든 기승전결을 함께 할 준비.
짧은 연애든, 긴 연애든, 그 끝이 결혼이든, 벗은 몸을 보고 툭 사그라드는 호감이든 상관이 없었다. 이 연애의 기승전결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내가 호기심을 느끼는 지점이 분명히 있었다. 그 지점이 평소와 달랐을 지라도.
그 순간의 나에게 제일 필요한 말을 해주었다면, 그 때의 나에게 제일 끌리는 지점을 보여주었다면 그게 그냥 사랑의 시작이었다. 내 사랑은 복잡하지만 단순했다 늘. 그냥 느낌이었다.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 10, 9, 8, 7, 6 … 숫자를 마치기 전 결정되어 있었다.
이성적인 판단이 동반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 순간의 우리, 나를 둘러싼 고민, 그를 둘러싼 고민 모든 것들이 오케스트라처럼 딱 조화를 이뤄 우리 사이에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그에게 내 한 시절을 걸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나는 그의 진심을 믿었다. 처음에는 믿지 못했는데 그래도 그의 달콤한 말들 속에 조금은 믿었다. 나는 언어에 약한 것 같다. 인정한다. 세치혀를 놀리는 것은 참 아무것도 아닌 쉬운 일인데 그 혀에서 나오는 말에 진심이 있을 것이라고 쉽게 믿어버린다. 내가 듣고 싶었던 모든 말을, 내가 들어본 적 없는 표현 방식으로 해주었을 때 그 자체로 연애 시작에 필요한 내 호기심을 충족했다.
시각적 호기심, 청각적 호기심이 나를 발동시켰던 적이 일반적이었지만 이번에는 굳이 꼽자면 그의 표현 방식이 나를 자극했다. 재미있었다. 그 재미를 끝까지 누려보고 싶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의 행동 속에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원래대로의 나라면 초반의 불편함에 사랑을 시작하지 않았을텐데 매체에서 본, 어찌보면 좋은 쪽의 편견으로 마음 속에 생겨난 경고 신호를 무시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좋은 것만 보였다, 갑자기.
그냥 모든 시와 때, 우연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우연의 일치로 갑자기 모든 것들이 좋아보이다가 다시 한 마디 말로 모든 것들이 안 좋아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혹했던 그의 세치혀의 달콤한 말과 수려한 표현이 머지않아 나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말로 변했고 난 황급히 내 용기를 거둬드렸다. '호기심 발동 모드'였던 내 마음은 '위험신호 포착, 고통회피' 모드로 순식간에 변했다. 나도 모르는 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최대한 빨리 도망쳐야해. 상처받지 않아야 해' 모드로 돌변했고 바로 똑같이 아픈 말로 그에 대한 나의 판단을 전달해버렸다. 그렇게 오래 갈 것이라 생각 했던 관계를 한 순간에 툭 놓아버렸다.
한 순간의 결정 이전에도 불편한 순간은 많았다. 나 역시 그를 알게된 시기에 마음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래서 더 최대한 천천히 알아가고 만남을 결정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호감을 느낀 상대에 대한 참을성 없는 ADHD력이 발휘되어 내 호감을 초반에 다 전달해버렸고 경험이 부족했던 그는 알아가고 싶다는 정도의 나의 호감을 내 모든 사랑을 다 전달한 것으로 받았들였다.
사랑하려고 했다. 사랑이란 강렬한 감정이며 한 순에 온다.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나를 She’s IN LOVE with me(이 여자는 나에게 사랑에 빠졌다)의 카테고리에 넣고 무의식적으로 편하게 대했는지 모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나는 Ready to FALL IN LOVE(사랑에 빠질 준비가 된) 상태였다. 언제라도 호감이 식는 순간 빠져나올 수 있지만 그 순간까지 진심으로 완주할 생각 그 뿐이었다.
나의 충동적 사랑 방지 가이드라인, “센스 있고 가치관이 바르며,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것 같으며, 혹여 미래에 가정을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들지 않을 사람을 걸러내는 조건” 리스트 중 이번에는 '"센스 있고"라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무시할 수 있었을만큼 다른 호감에 압도되었던 거겠지.
난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는 상대에게 이 리스트 상세 조항 하나하나를 들이대며 수십번의 거절을 해왔다. 이 리스트는 일일이 찾아서 보지 않아도 이미 다 내재화되어 있는 정도란 말이다. "당신은 패션에 관심이 없으니 공유하는 관심사가 없어 우리는 만나면 재미가 없을 것 같다. "라는 말도 그냥 툭 튀어나올 정도로 의식하지 않아도 적재적소에 이 리스트를 활용해왔다.
이 연애도 결국 바로 그 5G급 빠른 이별의 카테고리로 들어가게 된 그 연애가 되었다. 그리고 난 "연애 센스"에 중요 표시를 추가 해놓았다. 나는 관심있는 사람들, 그리고 일로 엮인 사람들의 취향과 니즈 파악을 잘하는 센스 있는 중견 회사원이기 때문에 내가 그 센스을 발휘하면 된다고 잠시 생각했는데 잘못 생각했다고 결론지었다.
내가 적어 놓은 연애 센스는 구체적으로 "연애 센스 - 경험 필수. 식당 찾을 때 괜찮은데 가는지. 미리 준비하는지!" 이다. 한 3-4년 전쯤 적어놓은 데이터로 기억한다. 언젠가 연애 경험이 부족해 보이는 남자가 데이트 준비도 제대로 안했던 때 짜증났던 내가 적어놓은 멘트겠지. 지금까지 나는 데이트에 성의 없는 남자와 단 두 번째 만남조차 한 적 없다.
그가 그 정도로 나에게 성의 없다고 느낀 건 아니지만 부족하다고 느꼈다. 나에게 충분한 관심과 정성을 보이지 않는 남자를 믿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단 몇 일 만에 보인 몇 가지 행동들로 그는 나에게 '신뢰'를 주려고 충분히 노력하지 않으며 '관심과 진심'이 부족하다고 판단 내려버렸다.
어느 날의 식당 선택으로 내가 추구하는 편안함이라는 가치가 멀어져간다는 것을 느꼈다. 까다로운 나쁜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알아서 센스 있게 나를 좀 맞춰주며 나에게 진심이고, 어떤 모습의 나여도 사랑할만큼 나에게 푹 빠졌음을, 내 마음에 쏙 드는 식당 선택과 메뉴 선택을 통해 증명해주기를 바랐다.
난 이번 이별을 고한 후 "연애 센스 ~" 조건 옆에 "이것 생각보다 중요. 배려와 관심의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멘트를 추가했다.
내가 더 능숙하게 사람의 마음을 진두지휘 하지 않았던 탓일지도 모른다. 그는 나에게 완벽하게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할 수 있었지만, 내 서툼으로 다 망쳐버렸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 사랑이라면 이런 것들이 의미가 있었을까?
서툴렀든, 서둘렀든, 뭐든 될 일은 되고 사랑할 사람들은 사랑하게 된다.
사랑과 열정에 빠진 연인에게 파워 게임(power game)이나 소위 밀당이 존재하는가. 그건 연애 초기에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다. 서로의 이글이글한 눈을 뚫어지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언제 저 사람을 완전히 내 걸로 만들지 이런 욕정이 끓어올라야 한다. 그리고 이 욕정이 단순한 욕정이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남자의 진심어린 구애가 필요하다.
물론 이 연애에서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구애를 나에게 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난 처음부터 실패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될 일 될 지론 앞에서 다 무의미한 생각이다.
이 모든 이해하기 어렵고 실망스러웠던 일들 가운데서도, 난 우리가 대화했을 때 느꼈던 감정을 '진짜가 아니다'라고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제3자의 시선에서는 명확히 보이는 사실일 지 몰라도 '나를 더 많이 이해해주고 보듬어줄 만큼 그는 나를 사랑할 수 없었을거야. '라고 인정하기 어려웠다. 그가 주지도 않았던 마음을 내가 받았다고 잠시나마 느꼈다는 것도.
그래서 차라리 이별의 이유를 "연애 센스"가 부족했던 그를 내가 더 믿어주지 않은 탓으로, 그 전에 나에게 진심과 관심을 담아 "연애 센스"를 발휘하지 않은 그의 열정 부족 탓으로 결론내렸다.
짧았든 길었든 그 연애가 행복하지 않았다면 이유는 하나다.
그는 나에게 미치지 않았고 나도 마찬가지였다(He was not crazy about me, and vice versa).
누군가가 사랑을 줬다면 반드시 느낄 수 있다. 받았는지 못받았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그가, 혹은 그녀가 주지 않은 것이다.
사랑의 감정은 쉽다. 어려웠다면 사랑이 아니다.
Quick Ending Story - 해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