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헤어져야 덜 아프지 않을까
track 3. thank u, next - Ariana Grande(아리아나 그란데)
집착과 질척거림이 긴 연애의 패턴이었다면, 짧은 연애에선 이별은 만남만큼 빠르고 쉬웠다.
내가 먼저 이별을 고한다면 보통 만난 지 1-2주일 이내이다. ADHD가 한 달 정도 만날 인내심을 발휘할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 정말 푹 빠졌거나, 둘이 꽤 잘 맞거나 둘 중 하나이다. 20대 땐 직장 때문에 주로 롱디를 했으니 2-3달을 지켜봤다면 지금은 한 달이면 충분 할 것 같다. 한 달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이면 1년, 2년, 아마 평생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작은 고통은 정말 잘 참으니까. 궁극적으로 그 사람의 선의가 의심되거나, 내가 정말로 싫어하는 조건이나 습관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매력을 느끼는 상대에게 먼저 이별을 고할 리 없다.
ADHD의 한 달은 일반 사람의 1년과도 같다. 5분을 집중한다는 건 50분을 집중하는 것과 같다. ADHD는 누군가와 만나고 싶은 지 여부를 순식간에 결정한다. 첫 만남에 밥 먹고 카페 가고 산책을 한다면 산책을 시작하고 10분 내로 좋은 지, 안 좋은지는 결정되어 있을 것이다. 밥을 먹고 돌아온다면 집에 와서 1, 2, 3, 4, ... 10초 내에 결정 끝이다. 어쩌면 만나러 가기 전부터 결정되어 있던 적도 많다. 사랑에 빠질 사람이라면 첫 카톡을 한 순간부터 느낌이 다르다.
연애 시작에 있어 충동적이고 신중하지 않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절대 아무나 만난다거나 인간관계에 진지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연인을 결정하는 시간은 아주 짧지만 어떤 사람이 나와 맞을지 나는 몇 년 동안 아주 진지하게 고민하고 적어왔다. 나는 인간관계에 궁서체로 정말 진지하다. 단지 호기심에만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이 분비되고 의욕과 열정이 동하는 단순한 ADHD 인간일 뿐이다.
나의 아주 상세하고 촘촘한 "센스 있고 가치관이 바르며,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것 같으며, 혹여 미래에 가정을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들지 않을 사람을 걸러내는 조건 리스트"에도 결격 사유가 없으면서, 내가 마음이 끌리는 상대는 아무리 열심히 사람을 만나고 다니려고 해도 일 년에 한두 명 나타날까 말까이다. 내가 알게 된 상대가 그 한두 명에 속하는 것 같다면 어찌 확신을 가지고 직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음이 강하게 끌리지 않더라도 조건에 부합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직진하기도 하는데 보통 이럴 때 1-2주 이별 방정식이 나타났다. 나의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과 생각은 아주 높은 확률로 틀린다. 수많은 정보가 도처에 있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니까. 2명을 알아가다가 둘 중 한 명을 만나는 상황이라면 늘 2명 중 결과적으로 더 안 좋은 1명을 선택했다. 나에게 더 잘 못해주는 1명을 골랐던 것 같다. 나쁜 남자라서 끌렸던 게 아니라 나에게 덜 성의있게 행동에도 그 사람이 어떤 측면에서 "좋은 사람"일 것이라는 착각으로. 더 이상 나의 이성적 판단을 신뢰하지 않는 게 현명할 것 같다.
설레고 편안하며 "센스 있고 가치관이 바르며,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것 같으며, 혹여 미래에 가정을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들지 않을 사람을 걸러내는 조건 리스트"에 부합하는 사람과 이별을 결심하는 때는 설레지 않거나 편안하지 않으며 위 조건 리스트에 부합하지 않는 면모가 나타날 때이다. 이별의 고통과 미래에 받게 될 상처를 극도로 경계하는 나는 5G급 이별을 고한다.
마음을 크게 주었든, 작게 주었든 이별을 늘 어렵고 그 끝은 공허하다. 그나마 설레지 않았던 경우의 이별이 가장 덜 아프지만 그래도 이별은 늘 아프다. 그리고 내 선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점이 오기도 한다. 5G급 이별인 만큼 하나 하나에 대해 실제로 확인해보고 면밀히 검토한 후 이별을 한 것이 아닐 때가 많다. 그냥 나의 편견이나 혼자만의 판단으로 이별을 생각하고, 생각과 동시에 상대방에게 통보함으로써 결정이 될 때가 많다. 일반적이라면 문제가 되는 지점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한 후 상대와 대화를 해보고 천천히 결정해 상대에게 통보하는 과정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미래의 고통회피"라는 최우선 과제 앞에 ADHD력이 만렙이 되어 빠른 이별통보가 발생한다.
오래 사귄 연인과 헤어지지 못하는 것이나 만난 지 얼마 안 된 연인과 빠르게 헤어지는 것이나 행동은 크게 달라 보이지만 추구하는 지점은 똑같다. 미래의 고통회피. 오래 사귄 연인과 헤어지면 당장 엄청나게 큰 고통이 생길테니 이별을 미루는 것이고, 사귄 지 얼마 안 된 연인과 빠르게 헤어지지 않으면 사귀면서 고통이 커질 수 있고, 나중에 헤어지려면 고통이 더 커지게 되니 지금 이별을 고하는 것이 가장 덜 고통스러운 행위인 것이다. 이에 따른 행동패턴이 일반인에 비해 아주 정교하게, 하지만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일어난다.
인생의 다른 결정도 그렇겠지만 연인과의 만남과 이별에 있어서의 결정도 "호기심 추구" 와 "고통 회피" 사이에서 일어나는 아주 정교한 행위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엄청난 속도로 이 두 가지 동기 사이의 일들이 일어난다. 시간을 두고 상대의 여러 행동을 관찰해보고, 머리로 분석해보고, 그 결과 만남과 이별을 결정한다면 좋겠지만 가능하지 않다. 모든 것들이 감각적으로 아주 빠르게 진행될 뿐이다.
이별 후 혼자 있는 순간에 전 연인에 대한 생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기간도 일반인에 비해 압도적으로 짧다. 미친 듯이 일부러 더 생각하고 기억하고 아파하고 울다가 어느 순간 그 감정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진을 지우고 보지 않으면 부산한 ADHD의 머릿속에 전 연인이 들어올 틈은 자주 없다.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면 모든 것들이 빠르게 잊혀진다. 그날 하루의 일, 돈을 벌기 위해, 취미 생활을 하기 위해 기억해야 할 것들 사이로 전 연인과의 상세한 것들까지 기억할 여력이 없다.
나에게 주인공과 줄거리를 자세히 말할 수 있는 소설과 영화는 거의 없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뭐냐는 질문이 나에게 가장 난감한 질문이다. 영화 보는 걸 좋아하고 많이 봤지만 몇 년 전에 본 영화의 기승전결을 난 절대 기억해서 말할 수 없다. 배경이 좋았고 느낌이 좋았던 영화는 몇 개 말할 수 있지만 몇 번이나 본 노트북의 구체적인 줄거리와 주인공들의 상황도 기억이 안 난다.
과거 연인과의 기억은 그나마 내가 인생에서 비교적 많이 기억하는 것일 것이다. 시각, 촉각, 어떤 특별한 순간의 감정, 여행지에서의 추억이 가장 기억에 생생히 남는다. 보통 만났던 사람에 대해 생각이 나기 시작하는 건 다른 연애를 시작한 이후이다. 다시 새로운 사람의 손을 잡았을 때, 새로운 사람과 침대에서 안았을 때 전 연인의 모든 촉감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전 연인의 촉감보다 더 촉감이 좋아야 덮일 것도 같다. 아니면 더 많이 빠져있든지. 머리는 잘 기억을 하지 못하는데 몸은 머리보다 기억력이 좋은 것 같다. 그리고 낯선 것에 대해 일반인보다 더 민감하고 예민하다. 익숙한 얼굴을 보는 것, 익숙한 음성을 듣는 것, 익숙한 체온과 촉감을 느끼는 게 나에겐 안정감을 준다. 그리고 그 반대는 약간의 불안감과 긴장감, 불편함마저 유발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연인을 사귀게 되고 이런 새로운 감각들에 익숙해지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내가 평소 익숙하게 생각했던 유형의 외모나 음성, 뼈와 근육의 모양 등이 아니라면 더.
어쩌면 이런 지점에서 호기심이 강한 나이지만 익숙한 사람을 두고 절대 바람을 안 필지도 모르겠다. 낯선 감각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thank u, next, oh, wait! - 해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