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가 될까? 위기가 될까?
요즘 나는 역할을 옮기고 있다. CX Manager에서 CRM Architect로.
이걸 개인의 선택이라고만 말하긴 어렵다. 회사가 변했고,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 내가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내게 옵션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옮길지 말지에 대한 선택지도 있었고, 이걸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결정할 권리도 분명히 있긴 했다. 다만 그 비중이 100%였다고 말하긴 어렵다. 체감상으로는 한 3~40% 정도였던 것 같다.
회사는 대규모 투자를 받았고, 이에 맞춰 두 명의 새로운 임원과 팀장이 투입되었다. 그 시점을 전후로 조직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도 바뀌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이 회사에 처음 왔을 때 인원은 30명 정도였다. 서로 얼굴을 다 알고 있었고, 누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대충은 알았다. 그땐 많은 일이 사람의 책임감이랑 감각으로 굴러갔던 것 같다. 조금 무리하면 돌아가는 구조였고, 실제로 그렇게 버텨온 시간도 있었다.
지금은 인원이 100명이 넘는다. 조직은 커졌고, 일은 훨씬 복잡해졌으며, 고객 수도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되게 늘었다. 이 정도 규모가 되면 예전 방식으로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회사도 하고 있었던 것 같고, 나 역시 꽤 또렷하게 느끼고 있었다. 머리로 이해한다기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래서 조직개편이 있었다. 단순히 포지션을 옮기는 문제라기보다는, 우리가 그동안 어떻게 일해왔는지를 다시 돌아보는 과정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해온 일들을 데이터로 다시 보고, 잘됐다고 생각했던 선택들도 다시 보고, 솔직히 말하면 아쉬움이나 후회가 남는 지점들도 꽤 있었다.
늘 최선을 생각하고 이행했었지만, 회고하는 과정에서 후회되는 점들은 역시나 있었다.
왜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을까. 왜 이렇게 1~2명의 사람이 다 몸빵으로 버텨내야만 하고, 사람에게 의존하는 구조를 오래 유지했을까. 매번 임시로 때워버리던 것을 더 장기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했었지 않았었나?. 이런 질문들이 쌓인 끝에, 회사는 하나의 결론에 가까운 판단을 내린 것 같다.
이 규모에서, 이 방식으로는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렵다는 결정이었다.
그래서 사람이 다시 배치되는 쪽을 택했다. 각자가 어떤 일을 잘하는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지금 회사에 어떤 역할이 더 필요한지를 기준으로.
나는 그 과정에서 CRM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 선택에도 나름의 맥락이나 이유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CX에 있으면서 단순히 들어온 문의를 처리하는 데서 멈추기보다는, 좀 더 전체적으로 보고, 왜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지를 더 오래 들여다보는 편이었다. 앱 기능 하나, 앱 내 퍼널 하나가 고객에게 어떻게 오해되고, 어디서 막히고, 어떤 순간에 이탈로 이어지는지를 계속 추적해왔다.
CX매니저면 다 하는 일이겠지만
문제가 생기면 우선 방어했고, 같은 문제가 반복되면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앱 기능과 퍼널을 CX 관점에서 정리하고, 망가지지 않게 지켜오는 일이 내 역할의 중요한 부분이었던 것 같다. 고객이 헷갈리지 않게 만들고, 불필요한 문의가 생기지 않게 막고, 이미 만들어진 흐름이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계속 손보는 일들.
그 과정에서 질문의 방향도 조금씩 달라졌다. 왜 고객은 이해하지 못했을까. 이건 설명의 문제일까, 아니면 설계의 문제일까. 그 질문들은 점점 사후 대응보다는 사전 설계 쪽으로 나를 옮겨지도록 만든 것 같다.
이제 내가 맡은 역할은 CRM Builder이자 Data-Driven Product Owner다. CRM을 단순한 마케팅 도구라기보다는, 매출과 리텐션을 직접 만들어내는 하나의 제품에 가깝게 보고 있다. 그래서 CRM 기능이나 시나리오를 고민할 때도, 결국 이게 비즈니스 가치로 설명될 수 있는지부터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우리 회사의 CRM 상태를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직 CRM 1.0에 가깝다.
타겟을 정하는 논리와 셋팅은 충분하지 않고, 고객의 상태를 입체적으로 설명해 줄 상태값도 부족하다. 언제 발송하는 게 맞는지에 대한 타이밍 슬롯 역시 명확하지 않다. 지금의 CRM은 그냥 “보내고 있다”에 가깝지, “설계되어 있다”라고 말하긴 어렵다. 한마디로 영점조절 없이 막 쏴대는 거다.
그래서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CRM 2.0에 맞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 고객을 상태로 이해하고, 타겟을 논리로 정의하고, 타이밍을 데이터로 판단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가끔은 이 과정이 0에서 1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꽤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미 뭔가가 있긴 하지만, 제대로 작동한다고 말하긴 어렵고, 다시 정의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갈 수 없는 상태. 그래서 더 기본적인 질문부터 다시 하게 된다.
이 메시지는 왜 이 고객에게 가야 할까. 지금 이 타이밍이 맞을까. 이걸 보냈을 때, 어떤 행동이 일어나야 정상일까.
CRM으로 옮기고 나서 일의 감각도 조금 달라졌다. 여기서의 실패는 대체로 조용하다. 고객은 불만을 크게 말하지 않는다. 그냥 떠난다. 그래서 대응보다 예측이 더 중요해지고, 감각보다 데이터가 더 필요해진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러니하게도 고객을 직접 가장 많이 만났던 시절보다, 지금이 고객을 더 오래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회사도 변하고 있고, 나 역시 변하고 있다. 이제는 예전 방식으로 계속 일할 수는 없겠다는 걸, 둘 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상태인 것 같다.
이번 포지션 이동이 정답인지 아직 확신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해 보이는 건, 이게 실패나 도망에 가깝지는 않다는 점이다. 지금 나는, CRM 2.0을 만들어야 하는 입장에 서 있다.
이 글은 그 출발선에서,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일하려고 하는지 정리해보는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