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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ㅋㅋㅋ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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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독성 Apr 21. 2023

요알못의 피카추 소풍 도시락

아이들을 재운 후 부엌에 도착한 시간, 밤 10시 26분.

그냥 자고 일찍 일어날까.

그냥 늦게 자고 조금 더 잘까.


내일은 둘째의 소풍날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풍 도시락을 싸가는 중요한 날이다.

웬걸. 유부초밥을 싸달라고 한다. 뭔가 찜찜하다.

초간단 유부초밥을 싸려고 했으나, 이상하다.

작년 첫째 체험학습 도시락 김밥을 먹고는 자기 소풍날에 꼭 김밥을 싸달라 노래를 불렀던 아이다.


"소풍날 진짜 유부초밥 싸줘? 혹시 형아가 유부초밥 싸가라고 해서 김밥 얘기 못한 거야?"


고개만 살며시 끄덕이는 아련한 아이를 보니 요리 못 하는 엄마의 의지가 불끈 솟아오른다.


고민이다.

싸놓고 잘까.

자고 일어나서 쌀까.

아침에 부랴부랴 준비하다간 김밥도 못 싸고 마음만 바쁘겠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커피를 한잔 들이켠다.

아뿔싸. 저녁 설거지가 아직이다. 또 내적갈등은 시작된다.


그냥 설거지만 하고 일단 잘까.

일단 김밥부터 하고 한꺼번에 설거지는 할까.

미루고 미뤄도 어차피 내가 할 일.

설거지부터 하고 김밥 재료를 준비했다.


작년 첫째 도시락에 만들어준 계란 지단을 이용한 피카추를 또 만들어보기로 했다. SNS 속 화려한 유치원 도시락은 이미 포기한 지 오래.

계란 지단에 김만 조금 붙이면 완성되는 피카추는 해볼 만하다.








계란 3개를 톡톡 풀어 소금 살짝 넣고 휙휙 저었다.

(노른자, 흰자 구별 따위는 하지 않는다.)

프라이팬에 부어 구워본다. 뒤집다가 역시나 실패.


찢어졌고 뭉개졌다. 어차피 김밥에 들어가면 괜찮겠지.

뭐 괜찮다. 다시 도전.

다시 계란 3개를 풀고 휘휘 저어 부었다.

조심스레 뒤집기. 이번엔 성공이다.

피카추 얼굴을 그릴 정도의 면적만 곱게 구워지면 된다.

 

계란 지단 식혀놓고, 당근 썰어 볶고, 햄 굽고, 참나물을 데쳤다. (시금치가 보이지 않아 선택한 참나물은 향긋한 향이 어우러져 어른용 김밥에 제격이다.)

밥을 한솥 담아 소금, 참기름, 깨소금 넣어 살살 섞어 식혀놓았다.

단무지, 우엉, 게맛살, 햄까지 쟁반에 가지런히 놓아두면 김밥 준비는 끝이다.


이제 피카추 얼굴을 만들어야 할 시간이다. 작은 칼을 손에 쥐고 계란 지단을 노려보았다. 도시락 크기를 감안한 시안을 머릿속에 그리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한 호흡 마시고 거침없이 한 번에 칼끝으로 계란을 잘랐다. 쓱 쓱 삭삭삭 착착.

한 번에 얼굴 계란 도안 완성.


이제 귀끝, 눈, 코, 입을 김으로 만들어주어야 한다.

소근육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려 가위로 김을 잘랐다.

귀끝부분을 붙여본다. 에잇. 안 붙는다.

김에 물을 살짝 발라 다시 시도한다. 에잇. 또 안 붙는다.

조금 더 눌렀다. 손에 김이 붙는다.


다시 잘라 물의 양을 적당히 조절하고 붙여본다.

이번에는 성공이다.

이제 눈을 붙여본다. 짝눈이 되지 않게 최대한 크기를 맞춰 동그라미 두 개를 만들었다.

코는 조그마한 삼각형으로 만든다.

이제 웃는 입을 만들어야 한다. 뭔가 이상하다. 입꼬리가 올라간 피카추의 귀여움을 표현하기가 어렵다.

몇 번 더 입만 오려봤다. 나름 웃는 상이 된 거 같아 만족스럽다.

피카추를 완성했다. 도시락은 99프로 완성되었다. 뿌듯한 마음을 가지고 김밥 두 줄을 빛의 속도로 싸서 썰어 넣었다.

김밥 위에 피카추 얼굴로 마무리했다.








신랑이 피카추가 멜멜해 보인단다.

이 멜멜은 어머님이 쓰는 말인데 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무언가 약간 힘없어 보이고 대범하지 못한 어딘가 소심해 보이는 그런 느낌을 뜻한다고 한다.



아들아.

엄마는 최선을 다했단다.




피카추 느낌 아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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