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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소공 May 09. 2024

물에서 태어난 너!

수중분만


딸아, 잘 지내니?



어제는 어버이날이었다.


엄마는 거의 잊고 있었는데, 네가 사랑이 가득 담긴 메시지랑 선물까지 보내 줘서 엄마 기분이 째졌지. 블로그에 네 자랑도 했단다. 다들 부러워하더구나.


너 낳기를 얼마나 잘했는지, 다시 한번 느낀 순간이었다. 꼭 선물 때문만은 아니지만 말이다.


오늘은 네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말해줄게.


너는 언젠가 네가 '실수로' 태어난 게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엄마 아빠가 아무 생각 없이 너를 만든 게 아니냐는 질문이었지.


절대로 아니다! Never, ever!




엄마가 결혼을 하고 나서도 한동안 아이를 갖지 않았다. 그런 엄마를 보고 외할머니가 엄청나게 야단을 쳤지.


외할머니뿐만 아니라, 꽤 여러 명의 결혼한 직장 선배가 아이 갖기를 권하더구나. 그중 한 선배의 말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그 선배는 꽤 능력 있는 분이었다. 똑똑하고 할 말 다 하는 칼 같은 성품이었지. 그 선배에겐 딸이 2명 있었다. 그 선배가 그러더구나.


"지금까지 해 온 일 중 아이를 낳은 게 가장 잘한 일"이라고 말이다.


참 의외였다. 워낙 일을 똑 부러지게 잘하고 또 나름 성공지향적이라, 아이에게 크게 관심이 없는 걸로 생각했거든. 물론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으니,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말이다.


그 선배는 더불어 자신의 성격이 "아이 낳은 후에 순한 양처럼 변했다"는 말도 덧붙이더구나. 믿기지 않았지. 사실 그때도 칼 같은 면이 많았거든.




순한 양. 사진=핀터레스트



나중에 그 선배를 아는 다른 사람이 그러더구나.


결혼하고 아이 낳기 전에는 후배 남자 기자의 조인트도 까고, 일을 잘 못한 출입처 관계자의 뺨을 후려칠 정도로 드센 사람이었다고 말이다. 엄마는 처음부터 그 선배랑 함께 일을 한 게 아니라서 잘은 모르고 있었던 거지.


그런 사자같이 드센 여기자를 순한 양으로(사실 순한 양까지는 아니었다.^^) 만든 '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지? 엄마도 호기심이 마구마구 생겼다. 내가 모르는 무슨 신비한 세계의 열쇠가 거기에 있을 것만 같더구나.


그래서 아이를 가졌다!라고 말하면 너무 웃기겠지? 인생을, 특히 아이 가지는 문제를 남의 말만 듣고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어쨌든 엄마는 외할머니의 말과 엄마의 선배, 그리고 먼저 결혼한 몇몇 친구들의 말을 듣고 '아이를 갖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데 아이를 엄마만 원한다고 만드는 것은 아니지 않니? '합의'와 '협력'이 필요하지. 그게 무슨 뜻인지 너도 이제 알겠지만 말이다.


사실 아빠는 아이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이 있어서인지, 엄마보다 아이 갖기를 더 꺼렸거든. 그런 아빠 마음부터 돌려야 했으니 말이다. 아빠가 왜 아이에 대해 나쁜 기억이 있었는지는 나중에 또 기회 되면 말하기로 하자.



마침내 기회가 왔다.


엄마랑 아빠가 결혼한 지 2년째 되던 해 크리스마스 저녁이었다. 우리는 와인 한 잔을 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지.



우리의 대화를 이끌었던 와인. 사진=핀터레스트



솔직히 엄마는 시골에서 태어난 한국 사람이라, 크리스마스에 대한 특별한 추억 같은 게 그때까지 없었다.


아빠가 주로 독일의 크리스마스 풍습에 대해 얘기하더구나. 특히 자신의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이런저런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많이 얘기해 줬지.


그러면서 하는 말이, "크리스마스는 아이를 위한 거지. 어른에게는 큰 의미가 없어"라고. 엄청나게 흥미롭게 듣던 엄마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아빠가 그러더구나.


"우리도 아이를 가질까?"라고.


아! 미안. 이건 순서가 잘못됐다.


사실은 드디어 기회를 잡은 엄마가 "우리도 아이를 가지면 어떨까?"라고 말했지. 그랬더니 아빠가 그러더라. "당신과 함께라면 아이를 가져도 괜찮겠어!"라고.


그렇게 우리는 '합의'와 '협력'을 거쳐 너를 만들었지.




네가 엄마 뱃속에서 자라고 있을 때, 너를 잃을 뻔한 일이 한번 있었다.


그때 엄마는 직장을 그만둔 상태로, 열심히 홈트레이딩으로 주식투자를 하고 있었다. 아빠가 직장에 가고 나면 아침 9시부터였나? 아무튼 그때부터 시장이 끝나던 오후 3시까지 컴퓨터를 쳐다보면서 주식 사고팔기를 즐겼지.


'돈 놓고 돈 먹기 게임'이었는데, 그때는 그게 그렇게 재미있더구나.


엄마가 주식투자를 시작한 것은 직장 일 때문이었다. 그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증권 담당' 기자를 했거든. 그런데 주식투자도 하지 않으면서 주식 기사를 어떻게 쓰느냐는  말에, 시작을 했던 거지.


처음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4~5개 기업의 주식을 10주씩(그때는 대부분 10주씩 거래했다) 매수해 등락을 지켜보면서 감각을 익혀 나갔지. 그러다가  직장을 그만둔 이후 본격적으로 재미를 붙였고.


아마도 엄마의 퇴직금 중 상당액이 투자 자금으로 들어갔을 거다. 초창기엔 꽤 돈도 벌었고.


그런데 너를 가진 지 5개월 무렵, 이상 증세가 생겼다. 병원에 갔더니 유산 가능성이 있다더구나. 유산방지 주사를 놔주면서, 움직이지 말고, 컴퓨터도 멀리 하란 조언을 들었다.


아무리 주식이 재미나도 너를 잃을 수는 없으니 의사 말대로 했다.


그때부터 엄마는 너를 건강하게 낳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산모와 출산에 관한 책을 모조리 사들여서 읽기 시작했지. 그러면서 목표를 세웠다.


바로 자연분만!  


사실 그때 엄마 나이는 한국 나이로 38세라, '노산'에 해당했거든. 요즘은 마흔이 넘는 첫 출산도 많지만, 그 당시 첫 출산이 30대 후반이라면 상당히 위험한 것으로 간주됐다.


그런데 엄마는 '아이에게도 엄마에게도 가장 건강한 출산법이 자연분만'이라는 말에 꽂혔지. 그래서 자연분만을 하기 위해 산모 요가도 다니고, 나름 다이어트도 했다. 아이가 너무 크면 안 좋다길래.



산모들의 요가. 사진=핀터레스트


엄마가 너를 자연분만으로 낳고 싶긴 했지만, 제대로 낳을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그때 엄마 눈에 띈 분만법이 '수중분만'이라는 것이었다. '최정원'이란 뮤지컬 배우가 딸아이를 수중분만으로 낳고 쓴 책을 엄마가 보게 됐던 거지.


여담이지만, 네가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혹시 내가 최정원 씨의 수중분만을 따라 해서 그런가?'라는 생각도 얼핏 했다.


어쨌거나 그걸 보고 엄마는 '이거구나' 싶었다. 그래서 수중분만이 가능한 병원을 찾다가 서울 한남동에 있는 한 종합병원이 수중분만을 한다기에 그 병원을 택했다.


최정원 씨가 분만한 병원은 따로 있었는데, 아무래도 종합병원이 아닌 것이 걸렸다. 엄마가 노산이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선 종합병원이 낫겠다는 판단이었거든.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 종합병원은 별로 잘한 선택이 아니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아마도 내가 그 병원 최초의 수중분만이 아니었나 싶다. 너무 어설펐거든.






너를 낳던 그날이 생각난다. 밤 11시쯤에 진통이 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병원으로 갔다.


엄마가 아픈 배를 부여잡고, 입원과 출산에 관한 모든 수속을 다 했다. 아빠는 외국인이라 한국어를 잘 못하니, 큰 도움이 못됐다.


두세 시간쯤 입원실에 있으면서 온갖 고통을 다 겪다가  '욕조'에 들어갔던 것 같다.


수중분만이라는 게 욕조의 물속에서 아이를 낳는 방식이거든. 책에는 진통 초기부터 물속에 들어가서 진통을 줄여준다고 되어 있었는데, 이론과 많이 달랐다.


그것보다 더 기가 막혔던 것은, 욕조 옆에 있는 샤워실이 고장 났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욕조 안에서 샤워를 했다. 원래 아이를 낳기 위한 욕조는 소독이 잘 되어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헐~ 싶었지.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고.


그렇게 엄마가 욕조에 들어가고 한참 후에 병원 간호사가 아빠도 들어와야 된다더라. 엄마 뒤에서 잡아줘야 된다고. 그래서 아빠가 급히 옷을 벗고 샤워도 제대로 안 하고, '빤스'차림으로 들어왔는데 말이다.



한참 진통 중에 물에 뭔가 시커먼 게 떠다니더라. 뭔가 하고 봤더니, 아빠 양말에 붙어 있던 섬유 보푸라기들이지 뭐냐. 참, 기가 막혔는데, 덕분에 눈물 나게 웃으면서 너를 낳았단다.


그래도 병원에 들어간 지 5시간 만에 너를 낳았으니, 노산 치고 꽤나 선방한 셈이었다. 그게 엄마의 산모 요가 덕분이었는지, 수중분만 덕분이었는지, 아빠의 양말 보푸라기 덕분이었는지 잘 모르겠다만.  


너는 태어난 순간부터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간호사들이며 의사들이 네 쌍꺼풀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거든. 이렇게 크고 진한 쌍꺼풀은 처음 봤다면서.


그리고 너는 꽤 무게가 나갔다. 3.9kg으로 태어났거든. 사실 출산 예정일보다 2주 정도 늦게 태어났는데, 그 사이에 엄청나게 커버렸지 뭐니. 출산 예정일만 하더라도 2.5kg 정도라 평균보다 몸무게가 덜 나간다고 했었거든.


너는 아마도 그 여린 몸으로 세상에 나오는 것보다 좀 더 단단해진 몸으로 세상구경을 하고 싶었던가 보더라. 엄마가 얼마나 고생할지까지는 생각을 못 했겠지.


어쨌든 우리 둘은 그날 참 잘 해냈다. 나도 고생이었다만, 너도 세상에 나오기 위해 참 애썼다.


덕분에 너를 만나, 이렇게 딸 가진 재미를 누리고 있으니, 네 외할머니와 엄마의 선배, 그리고 아빠에게 참 감사한 마음이다.


무엇보다 엄마에게 와서 건강하게 태어나 준 너에게 감사한다.


엄마도 이제 누군가에게 "태어나서 가장 잘한 게 딸아이를 낳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구나.


사랑한다, 딸아.


그리고 어버이날 선물 고마워!


2024년 5월 9일,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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