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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소공 May 09. 2024

바다가 이어 준 엄마 아빠의 인연

딸아, 



이곳 한국은 지금 여름 기운이 완연해지고 있다. 



여름 방학 때마다 우리 가족은 엄마의 고향 남해에 자주 갔었지. 엄마의 고향집은 바다를 내려다보는 환상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 바다를 보면서 너는 항상 "바다다다!"라고 말했는데, 기억나니?



엄마가 매번 바다를 볼 때마다 너에게 한국말로 "와, 바다다!"라고 말했는데, 너는 '바다'를 '바다다'로 이해했지. 그래서 언젠가부터 바다를 보면 늘 "바다다다"라고 말했고. 



'바다'라고 아무리 가르쳐 줘도 너는 한번 입에 붙은 말이라 그런지 꼭 '바다다다'라고 불렀다. 


참, 웃겼는데, 이제는 '바다'로 이해했지? 




바다! 



생각해 보니 바다는 우리 가족의 삶에 참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너도 알다시피 엄마는 바닷가 마을 출신이라, 늘 바다를 보면서 자랐지. 초등학교 5학년 무렵, 가정방문을 온 담임 선생님이 바다를 보면서 꿈꾸는 법을 가르쳐 줬다. 



엄마 고향집 앞바다에서 본 석양



그 이후로 '꿈'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꿈을 꾸기 시작했던 것 같고.  



바다는 꿈이기 전에 엄마의 가족에겐 삶의 터전이었다. 



엄마의 아버지, 그러니까 네가 한 번도 얼굴도 보지 못한 네 외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어부로 생계를 이어갔다. 나이 들어서는 고깃배를 접고 농사를 지으셨지만 말이다. 



우리가 어릴 때는 바다가 놀이터이자 먹거리의 보고였다. 



여름이면 하루 종일 바다에서 헤엄치고 놀았다. 놀면서 보말도 잡고 우뭇가사리도 캐서 집으로 가져왔지. 그게 중요한 반찬이었거든. 



돌이켜 보면 한 번도 그냥 놀기만 한 적은 없는 것 같더라. '놀면서 일하기'가 일상이었지. 물론 그걸 ''이라고 생각도 안 했다만. 



그런 '삶의 터전'이었던 바다가 엄마에게 '인연의 고리'로 다가온 것은 아빠를 만나면서부터였다. 




아빠와 엄마는 펜팔로 처음 알게 됐다. 그 얘기는 들었지?



그 당시 엄마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영어 공부를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던 때였지. 대학 부설 영어학원도 다니고, 하루 종일 CNN 뉴스도 틀어 놓고, 영자신문도 읽으면서 말이다. 목표는 캐나다 유학이었고. 



그러다가 우연히 '외국인 친구 만들기'란 인터넷 사이트를 알게 됐다. 영어 작문 연습을 하기에 최적의 기회라고 생각되더구나. 그래서 간단히 본인 소개 글을 올리고, 나도 다른 사람의 소개 글을 몇 개 보다가 2명에게 펜팔 신청을 했다. 



한 명은 스웨덴 사람, 또 한 명은 어디였지? 싱가포르였나?



네 아빠는 나에게 이메일이 온 케이스였지. 


독일 사람이고, 미국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곧 한국으로 발령 날 것 같은데, 한국에 대해 아는 게 없다. 혹시 친구가 되어 줄 수 있겠냐?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엄마야 어차피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시작한 거니, 당연히 오케이였지. 영어 공부도 하면서 한국을 소개하는 '민간 외교사절' 역할을 좀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고. 



엄마는 그렇게 아빠를 포함해 3명의 외국 남자랑 펜팔을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그런 일상 얘기였지. 



엄마의 고향집 앞바다


그때 엄마의 영어가 얼마나 별로였던지, 편지 한 장 쓰는 데 한두 시간 걸린 것 같다. 영한사전, 한영사전 옆에 놓고 단어를 찾고 또 찾아가면서 썼거든. 요즘처럼 번역 프로그램도 없었다. 



그 한 장을 써서 모두에게 '복사해서 붙이기'로 보냈지. 그럼 상대방은 그 편지 내용에 대해 딱 한마디 정도 언급만 하고 자기 얘기하기에 바빴다. 사실 모두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이라, 깊이 있는 대화는 거의 불가능했다. 



어쩌면 그 사람들 모두 엄마처럼 여러 명의 펜팔 상대에게 자기 얘기를 써서 '복사해 붙이기'로 펜팔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스웨덴 남자는 말이다. 맨날 컴퓨터로 업무를 하고, 햄버거 먹은 얘기만 하더라. 싱가포르 남자는 무슨 얘기를 했는지 생각도 안 난다. 



그러 던 어느 날, 엄마가 남해 고향에 갔던 얘기를 했거든. 



남해 외삼촌 어장



외삼촌이 물고기 키우는 양식장에 가서 물고기 밥 준 광경을 설명했지. 밥을 줄 때마다 물고기들이 펄쩍펄쩍 뛰어오르는 모습, 물고기 비늘이 햇살에 반짝이는 모습 말이다. 



그걸 영어로 옮기는 데 애 좀 먹었다. 말했다시피 그때 엄마의 영어는 참으로 보잘것없었거든. 사전 놓고 3시간 가까이나 끙끙대면서 영어 편지를 썼던 것 같다. 



그 이메일을 세명에게 보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냥 "응, 그랬구나. 재미있었겠다"라는 반응이 다였다. 



그런데  '너거 아부지' 반응이 눈길을 끌더구나. 



"와, 나도 바다를 좋아하는데, 물고기 양식장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정말 좋은 곳에서 태어났구나. 기회가 되면 나도 네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다"



그 반응에 엄마는 살짝 마음이 움직였지 싶다. 누군가가 내 얘기에 구체적인 관심을 보여준다는 것이 참 좋더구나. 엄마도 어쩌면 '관종'이었나 보다. 물론 그게 인연이 되려고 그랬겠지만 말이다. 



이후 우리는 바다를 주제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점점 대화의 주제가 확산되어 갔지. 살아온 인생 얘기며, 사고방식이며 가치관 등으로 말이다. 



그렇게 얘기가 잘 통해서 결국 1년 후쯤부터 사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때는 물론 아빠가 한국으로 발령받아서 와 있을 때였고. 



바다를 좋아하는 아빠와 바닷가 출신인 엄마는 결혼 후 틈만 나면 바닷가로 여행을 갔다. 동해안, 서해안, 남해안을 비롯해서 제주도에도 꽤 여러 번 갔지. 



해외를 가더라도 꼭 바다를 낀 곳으로 갔고. 바다를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스킨스쿠버 다이빙도 배웠다. 엄마 아빠가 스킨스쿠버 ADVANCED 자격증 갖고 있는 거 아니? 그 자격증을 신혼여행지인 보라카이에서 땄거든. 



네가 어릴 때도 바닷가에 위치한 리조트만 골라서 다녔던 것 같다. 여행이라기보다는 바닷가에서 노는 휴양이 목적인 곳들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아빠가 세상을 떠나기 2주 전에 갔던 곳도 필리핀의 어느 리조트였구나. 아만 풀로였나? 그곳 얘기를 하면 또 네가 눈물 흘릴 것 같으니, 이쯤에서 끝내자. 




생각해 보니 바다는 인생의 모든 것을 담고 있더구나. 






바다가 잠잠하다고 방심했다가는 큰일이 난단다. 언제 바람의 방향이 바뀔지, 언제 예측 불가능한 소용돌이가 생길지 아무도 모르거든. 



 때론 난폭하고 때론 잔잔하지. 태풍이 치는 바다는 세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무섭지만, 태풍이 지나간 바다는 한없이 잔잔하고 평화롭단다. 



밀물도 있고 썰물도 있다. 마치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처럼 말이다. 



그래서 바다는 그곳에 자리 잡은 사람들에게 항상 겸손을 가르치는 것 같다. 물론 파도와 맞서 싸울 강한 의지력도 바다가 준 선물이지. 



그래서 바닷가 사람들은 억세기도 하고, 생사를 초월한 듯한 초연함도 갖고 있는 것 같다. 배가 전복되고, 파도에 휩쓸려 죽는 사람들이 많았거든. 엄마 친구의 아버지도, 동네 사람들도 친척들도 그런 경우가 꽤나 많았다. 



드넓은 바다는 무엇보다 포용과 자유를 상징하지 않니? 



냇물은 흘러 흘러 바다로 간다. 그 바다는 모든 냇물을 다 받아 준단다. 더럽거나 깨끗하거나 상관없이. 그리고 경계 없는 바다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유혹하지. 



사람들이 답답할 때마다 바닷가에 가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지 싶다. 맺혀 있는 뭔가가 툭 떨어져 나가면서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거든.  



오래전에 '내가 배워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책이 유행했는데, 엄마는 '내가 배워야 할 모든 것은 바다에서 배웠다'라는 말로 대체하고 싶구나. 



그런 바다가 엄마와 아빠를 연결하고, 또 너까지 태어나게 해 줬으니, 바다는 엄마에게 은인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바다'를 '바다다'로 배운 내 딸아, 



바다처럼 우리의 삶도 참 소란스럽게 흐르지만, 그래도 바다는 희망을 품고 있단다. 



모든 것을 품어 줄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희망 말이다. 



그 희망의 불씨를 잘 살려 보자꾸나. 



2024년 5월 7일,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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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죄송합니다. 제가 브런치에 익숙지 않아서, 이 글이 원래 2편이어야 하는데, 브런치북에 들어가지 않고 엉뚱한 곳에 있더군요. 브런치 북으로 재발행합니다. 혼란을 드려서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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