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
눈 내리는 창가로 슈베르트 겨울나그네 보리수가 흐른다. 오늘 아침, 클래식 에프엠에서 벌써 세 번째 선곡된 곡이다. 겨울나그네는 슈베르트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작곡한 연가곡집이다. 작곡 당시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상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기에 겨울나그네만의 음울한 감성은 가사로 쓰인 뮐러 시의 내용보다는 소멸을 예감한 존재의 생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이 근간이 되었을 것이다.
보리수는 언제 들어도 좋지만 눈 오는 창가로 밀려드는 보리수는 더할 나위가 없다. 연이어 같은 선율이지만 성악가마다 울림이 다르다. 테너 김세일은 따뜻한 소리로 그리움을, 풍성한 톤의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는 가득 차 완전한 고독함을 그려낸다. 그런데 보리수뿐만 그런 것은 아니다. 김세일은 뭘 불러도 따뜻하고, 마티아스 괴르네는 뭘 불러도 웅장하다. 사람은 그 자신일 수밖에 없고, 예술은 창작자 본인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리라. 보리수 선율이 사위를 감싸는 눈 내리는 창가에 김 오르는 찻잔을 붙잡고 앉아 있자니 문득 좋은 사람이 그립다.
좋은 사람이라..
좋다는 건 얼마나 광범위한 말인지.
뭔가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열망하기도 했던 것 같다. 어쩌면 지금껏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조그마한 내게 특별한 사람이란 결국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스스로 감당하기에 충분히 가까운 꿈을 가지고 행복을 늘 담장처럼 두른 따뜻한 사람.
조그마한 나는 무대 중앙의 스포트라이트로 인해 더욱 어두워진 한쪽 구석에서 노래하는 코러스가 가수보다 더 좋았다. 내가 꿈꾼 건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라 노래를 한다는 것 자체였다. 빛이 쏟아지는 무대 중앙에서는 노래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내 이름이 기재된 번역 출판물을 꿈꾸는 것보다 18, 19세기 그 모든 영미, 프랑스 문학을 그저 만나는 게 더 좋았다. 내가 꿈꾼 건 내 이름의 한글이 아니라 중구난방의 알파벳이 아름다운 한글 문장으로 전환하는 여정 자체였다. 바닷마을 골목길에 숨어 있는 자그마한 독립서점처럼 나만의 작은 이야기들로 채워지는 서가라야 아름답다. 그렇게 숨어서 생은 어찌 연명할까 싶을 만큼 작은.
그래서 결국 나답게 산다는 건 좁히고 좁히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위대한 음악을 작곡해낸 슈베르트의 가을나그네도 결국 자신으로 좁혀진 프리즘의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세기를 건널 만큼 위대한 예술이 한껏 좁혀진 내면의 완곡한 발로였다고 생각하니 뭔가 따뜻해진다.
작아서 반짝이는 것들을 생각한다. 저마다 제 자신 이상일 수 없어 한없이 작아지느라 깎이고 깎이며 빛이 되는 반짝임.
눈이 내리면 그리워진다. 작고 반짝이는 좋은 사람. 그런 사람을 그리워하다 보니 밖으로 나가 그런 사람이 되어주고 싶어진다. 눈이 내리면 그리워질 작고 반짝이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