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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나는 정신병증을 ‘달래며’ 살기로 했다

by 퇴근후작가

《내일도 불안할 예정입니다만》

- 불안한 나를 고치지 않기로 한, 아주 개인적인 결정의 기록


Part 1. 나에게 불안은 너무 익숙해서


3. 나는 정신병증을 ‘달래며’ 살기로 했다

- 불안장애, 수면장애, 공황장애


코로나가 전 세계를 덮쳤던 어느 여름날, 나에게 이상한 일들이 시작되었다. 이유 없이 여기저기가 아팠다. 어지럼증, 이명, 근육통, 소화불량, 부정출혈… 증상은 하루하루 쌓여갔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단 1분도 잠을 잘 수 없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잠을 설쳤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몸은 녹초였지만 머릿속은 커피를 백 잔 마신 것처럼 각성돼 있었다. 밤을 꼬박 새우고 출근했는데도 낮 동안 눈을 붙일 수 없었다. 피로는 쌓여만 갔고, 잠들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또 다른 불안을 만들어냈다. ‘사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고문은 잠을 재우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이 실감 났다.


잠을 못 자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가 되던 날, 몸은 완전히 무너졌다. 위는 멈춰 물조차 넘기기 힘들었고, 등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통증이 올라왔다. 앉아 있는 것도, 누워 있는 것도 고통이었다. 일상 속 소리들이 자극처럼 들렸고, 모든 감각이 날카로워졌다. 나는 병원이라고 쓰여있는 곳은 모두 찾아다녔다. 내과, 산부인과, 정형외과, 가정의학과, 신경외과… 그러나 어디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없었고 진통제 처방만 늘어갔다.


found my pills aesthetic for no reason �.jpg @ 사진 출처 : Pinterest / samriddhi


결국 수면제라도 처방받고자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각종 검사 끝에 들은 진단은 자율신경계의 균형 붕괴. 내 몸은 하루 종일 교감신경이 과도하게 작동하는 상태였다. ‘지금은 긴급 상황이다’고 계속 착각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쉬지 못했고, 잠들 수 없었던 것이다.


출근은 계속돼야 하니, 약을 처방받아 들고 나왔다. 하지만 약을 먹고 자는 잠은 편하지 않았다. 다음 날이면 머리는 멍하고 세상이 안개 낀 듯 흐릿했다. 집중도 안 되고, 기분은 점점 가라앉았다. 복용하는 약의 개수도 하나둘 늘어났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건 등 통증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등을 잡아채듯, 쥐어뜯는 고통이었다. 병원을 전전해도 원인은 없다는 말뿐, 진통제만 늘어갔다.


몸을 피곤하게 만들면 지쳐서라도 잠들겠지 싶어 매일 10km, 많게는 15km까지 걸었다. 온몸이 풀릴 정도로 걸어도 잠은 오지 않았고, 통증은 여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등통증으로 찾은 정형외과에서 한 의사를 만났다.

그는 검사 결과를 조용히 살피더니, 갑자기 물었다.


"혹시… 잠을 못 자나요? 그래서 요즘, 우울하진 않으세요?"

놀란 나는 그간의 잠 못 드는 밤과 가라앉은 기분에 대해 조심스레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그만 약통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저도 이 약을 10년 전부터 먹고 있어요. 마음이 지칠 땐 큰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는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지금 환자분은 심한 불면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우울이 온 거예요. 몸이 아픈 건, 마음이 보내는 신호일 수 있어요. '나 너무 힘들어, 제발 좀 알아줘' 하고 몸이 먼저 소리치는 거죠."


나는 순간 얼떨떨했다. 지금 내가 정형외과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게 맞나? 정신과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그저 처방과 복약지도만 있었을 뿐이다.


그는 덧붙였다.

"수면제를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지금은 그게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그리고 하루에 10km씩 걷는 건 오히려 무리가 될 수 있어요. 무엇보다, 너무 애쓰지 마세요. 애쓰는 것조차 몸을 더 지치게 만들 수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건강한 사람도 아플 수 있어요. 살다 보면 이유 없이 힘든 날이 찾아오기도 하거든요. 그럴 땐 무조건 이겨내려고 하지 말고, 잠시 쉬어가도 괜찮습니다."


그날 나는 진통제 하나 없이 병원을 나섰다. 하지만 그 어떤 약보다 따뜻한 말을 들었다. 처음이었다. 병원이 아닌 사람에게, 마음을 다독이는 말을 들은 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는 지금껏 내 불면과 통증을 '어떻게든 고쳐야 할 결함'으로만 여겨왔다. 그래서 증상에만 매달려 병원을 찾아다녔고, 오늘은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레이더를 켜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감시했다. 나는 나를 수리해야 할 고장 난 기계처럼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나는 조금씩 나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잠이 안 오는 날엔 ‘지금은 약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라고 말해줬고, 통증이 심한 날엔 ‘지금 내 마음이 많이 힘든가 보다’ 하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원인을 찾는 대신, 내 몸을 쉬게 해주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놀랍게도, 몸은 조금씩 나아졌다. 통증에 신경을 덜 쓰자 통증이 옅어졌고, 수면제를 통해 잠을 자니 신경도 차츰 가라앉았다. 2주쯤 지나자 약 없이도 잠이 들 수 있었고, 등 통증도 사라졌다.


그날 만난 의사는, 내 마음의 명의였다. 그의 한마디가 내 치유의 시작이 되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모든 게 완전히 나아진 건 아니었다. 몸이 회복되자, 나는 또 예전처럼 바쁘고 예민하게 살아가기 시작했다. 컨디션이 돌아오니 긴장된 일상도 함께 돌아왔고, 그 속에서 내가 본래 가지고 있던 불안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수면장애는 다시 시작됐고, 불안은 더 깊어졌으며 결국 공황장애까지 찾아왔다. 좋은 의사를 만나 일시적으로 숨통이 트였지만, 내 안의 오랜 불안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는 걸 나는 인정하게 되었다.


그제야 진짜로 깨달았다.


불안을 없애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걸.

나는 여전히 예민하고, 가끔 잠을 못 자고, 불안에 흔들릴 때도 많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나를 억지로 고치려 들지 않는다.


불안은 나를 망치지 않았다.

불안 덕분에 나는 나를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고

오늘도 나를 더 다정하게 돌보려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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