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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토끼 Mar 30. 2021

겨울 지나 봄

봄의 소식, 매화



그날 밤은 모두가 알딸딸하게 취한 밤이었다. 재작년쯤 친구들과 자주 가던 술집에 모여 앉았다. 가게 안은 여러 가지 사연을 가진 이들이 모여 시끌벅적했다. 그날따라 친구들도 저마다의 깊은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커다란 창밖은 밤의 장막이 깔려 어두컴컴했다. 그 새카만 장막 아래로 몇 친구들이 바람을 쐬러 나가고 긴 테이블 자리에는 나와 한 친구만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나, 언제쯤 불행에서 벗어날까.”    



그때, 짧은 침묵을 깨고 친구가 툭 내뱉은 말에 난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불행'이라는 단어가 활자가 아닌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엔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뒤이어 푸념을 늘어놓던 친구는 울지 않았지만 울고 있었다. 그냥, 알 수 있었다. 너 울고 있구나. 난 차마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주춤거렸다. 입안에서 어떤 말들이 나뒹굴어 마구 곱씹었지만, 입술을 비집고 나가진 못했다. 그저 얘기를 들어주며 술잔을 기울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가게 안으로 친구들이 들어오고 자리가 꽉 채워졌다. 다시 새로운 이야깃거리도 함께 채워졌지만, 친구가 내뱉은 '불행'이라는 단어가 나를 짓눌렀다.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럭>


요즘 들어 겨울을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얼마 전 유튜브에 들어갔다가 코로나로 인해 오랜 기간 몸담았던 회사에서 해고를 당한 사람들의 일상을 보게 됐다. 그중 짐을 챙기고 버스 좌석에 앉아 허무하게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마스크와 코로나 통금으로 언성을 높이고, 몸싸움하는 사람들과 가게 문을 닫아야 했던 자영업자들, 마스크 때문에 콧등 위로 커다란 염증이 생겨버린 친구의 다섯 살짜리 어린 조카까지.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한 지 어느덧 2년 차.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나온 정신과 김지용 의사는 코로나 이후 유일하게 정신과만이 환자 수가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코로나 19'와 '우울감'이 합쳐진 '코로나 블루' 뿐만 아니라 ‘코로나 레드(분노)’, ‘코로나 블랙(좌절)’이라는 신조어마저 생겨났다. 금방 사그라지리라 생각했던 바이러스가 장기화되면서 너무도 당연했던 일상들이 처참히 무너져 내린 결과였다.





겨울은 언제 지나가는 걸까. 봄이 오고 있기는 한 걸까. 우리에겐 그런 시기가 분명히 찾아온다. 얇은 종잇장을 뭉개 놓은 듯 잔뜩 구겨진 하루를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음도 꾸깃꾸깃 못난이가 되는 순간. 내 삶은 왜 겨울인지, 꽃잎 휘날리는 봄이 오기는 하는 건지, 원망스러웠다. ‘, 그냥 이대로 증발하고 싶다-.’ 탁하고 흐린 생각들이 뭉게뭉게 내면에 드리워 괴로웠다. 그런 악한 상념들이 마음을 자꾸만 찔러오는 탓에 밤새 뒤척이다가 결국 책 한 권을 펼쳐 들었다. 그러다 한 문장을 만났다.



겨울만 겪어보고 포기하면 봄의 약속도, 여름의 아름다움도, 가을의 결실도 놓칠 것이다.
_ 책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류시화)> 中



"곧 겨울이 지나고 피어나는 봄, 푸르른 여름, 물들이는 가을이 올텐 데. 지금 이렇게 포기할 거야? 이대로 삶을 내던질 거야?" 꼭 문장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그래, 지금 거닐고 있는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면 곧 뒤따라 올 피어나는 봄도, 푸른 여름도, 물드는 가을도 모두 놓쳐버리겠지.' 신이 꼭 생의 테두리 밖으로 나서려던 나를 안으로 밀어 넣는 기분이 들었다.



며칠 전 집 근처 공원에 갔다가 화려하게 피어난 매화꽃을 보았다. 강물 소리와 어우러져 마치 꿈속에 있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같이 온 친구에게 티는 내지 않았지만, 어딘가 울렁거렸다. 너무 평온하고 예뻐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매일같이 소란스러웠던 머릿속이 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꼈다. 어쩐지 마음속에도 매화꽃이 피어나는 듯했다. '봄이 오는구나.'



매화는 온갖 꽃이 미처 얼굴을 들이밀기 전에 맨 먼저 피어나서 봄의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준다고 한다. 추운 날씨에 핀다고 해서 '동매', 눈 속에 핀다 해서 '설중매'라고도 불린다. 그날, 아직은 춥기만 한 나의 삶에 곧 다가올 봄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 매화꽃 하나가 피어났나 보다.






그치지 않는 비는 없듯이 언제까지고 지속되는 겨울은 없다. 비 온 뒤 하늘이 말도 안 되게 예쁜 것처럼 겨울이 지나고 나면 따뜻한 봄날이 우리의 앞에 펼쳐질 거라고, 겨울을 걷고 있는 모든 이에게 말을 건네고 싶다.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추운 마음에도 봄의 소식을 알리는 매화꽃이  찬란하게  피어나기를 바란다.





겨울의 한창에서 봄을 그린다.

봄이 오면 꽃이 필 테니까.


책 <같이 걸을까(윤정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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