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or 선물
내가 열아홉이었을 때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꿈 하나를 꾼 적이 있다. 그 꿈속에서 나는 드디어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했다. 정말 '드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아홉의 난 매일같이 끝을 꿈꾸던 아이였으니까. 모든 것들이 끝났으면 했다. 그 끝이 나의 삶일지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꿈 안에서 내가 '드디어'라는 단어를 떠올린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드디어 각오를 했구나. 이제 모두 편해질 거야. 여러 갖가지 생각이 떠오르면서 무척이나 기뻐했다. 지금 떠올려보면 가슴 한편이 아려올 정도로.
다시 꿈 내용으로 넘어가자면 나는 곧바로 죽었다. 역시 현실이 아니라 그런지 얼마 안 가 고통도 없이 죽고 말았다. 그냥 죽은 이후로 시간이 건너뛰었다. 여전히 눈을 뜨고 있었지만 숨이 끊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앞에 어떤 장면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내가 죽지 않았더라면 벌어졌을 미래의 일임을 직감했다.
장면에는 수능이 끝난 후 성인이 된 내가 존재했다. 공간은 그저 풀밭이었지만 한강공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돗자리를 펴고 앉아 그 위에서 치맥을 먹고 있었다. 친구들과 웃으며 두런두런 떠드는 그저 일상적인 모습. 그 속에서 내가 너무도 즐거워하는 게 보였다. 평화로운 광경을 넘어선 행복 그 자체였다. 그 푸르른 장면을 이미 생이 끝난 영혼이 되어 보고 있자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후회의 감정이 파도처럼 떠밀려왔다. 금방이라도 그에 휩쓸려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죽지 않았더라면, 살아 있었더라면 내가 저러고 있겠구나. 부럽다 못해 처절했다. 처음 느낀 감정이었다. 그래, 살고 싶었다.
그 순간 잠에서 퍼뜩 깨어났다. 방 안에는 아직 캄캄한 어둠이 자욱하게 내려앉은 낯선 새벽이었다. 잠시 동안 침대 위에서 얼이 빠진 상태를 유지했다. 여전히 '내가 죽었나?' 싶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이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깊이 안도했다. 아니구나. 지금, 여기, 나는 살아 숨 쉬고 있구나. 심장이 쿵쿵하고 박동하는 느낌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스무 살의 7월, 처음으로 친구들과 함께 서울로 2박 3일 여행을 떠났다. 계획대로 첫째 날 저녁에는 한강공원으로 향했다. 돗자리를 펴고 앉아 배달시킨 치킨과 맥주를 마시며 마음껏 웃고 떠들었다. 날이 저물며 선선해진 바람에 흩어지는 더운 열기가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 문득 잠시 잊고 있던 그 꿈이 기억의 수면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만약 내가 그때 끝내 버티지 못하고 생을 포기했더라면, 겪지 못했을 행복이었다. 친구들과 여러 얘기를 나누면서도 머릿속으로는 한참을 꿈이 걸어 다녔다. 마음이 자꾸만 일렁였다.
당연하게도 그때 그 꿈을 꾸고 나서도 우울하고 힘든 감정이 쉽게 가시진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한동안은 삶을 내던지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향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게 재빨리 지나가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요즘도 악한 생각이 나를 뒤덮을 때면 종점엔 그때 꿨던 꿈이 떠오른다. 그 먹먹했던 후회의 감정이 도통 지워지지가 않는다. 삶을 잘라내고 싶을 때마다 그 기분을 다시 겪게 될까 봐 두려워져 안 좋은 생각을 멈춘다. 잠깐 꾼 그 하나의 꿈이 이렇게 오래도록 나에게 영향을 주게 되리란 사실을 그땐 몰랐다.
악몽 or 선물
사실 그날 꿈에서 깨어났던 순간에는 그저 지독한 악몽인 줄로만 알았다. 방 안에 가득했던 무거운 공기가 나를 짓눌렀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흘러 스무 살, 친구들과 있었던 그 한강공원에서 그리고 생을 포기하고 싶었던 많은 날들을 지나오며 어쩌면 그 꿈이 나에게 온 선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