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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선업 Feb 09. 2020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케이팝의 출발점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하여

* 빌보드매거진코리아 2호에 기고한 내용을 옮겨온 글입니다.


어느덧 국경없는 팬덤을 거느리며 범세계적 트렌드로 자리잡은 케이팝. 실력 기반의 퍼포먼스와 무국적을 지향하는 음악 스타일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해당 카테고리의 특징일 것이다. 타지인들에게는 이와 같은 높은 완성도의 결과물이 갑작스레 등장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 진화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에 걸쳐 이루어져 왔다. 만약 지금과 같은 명성을 얻기까지의 결정적 순간들을 선별하고자 한다면 꽤나 난항이 예상되지만, 이 신의 시작을 상징하는 아티스트에 대해서는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내리라 생각한다. 바로 오늘 언급할, 케이팝의 기원이자 한국 대중문화의 지형도를 일거에 바꾼,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야기다.  


사실 한국 대중문화에 있어 청소년들이 주소비층으로 등장한 건 그리 먼 옛날의 일이 아니다.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기성세대는 10대들이 TV스타들에 열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 소방차와 박남정, 김완선 등이 댄스뮤직을 구사하며 아이돌 시장의 기반을 닦기는 했지만, 주요 타깃은 어디까지나 성인층이었다. 이문세의 파트너로서 수많은 명발라드를 써 내려간 고(故) 이영훈과 클래식을 도입해 불후의 명작을 남긴 비운의 뮤지션 고(故) 유재하가 20대 초반의 여성들로 대중가요의 소비층을 확대했지만, 이 역시도 의무교육세대들이 낄 자리는 없었다. 자신들의 기호충족을 위해 팝 음악을 찾고 일본의 빽판들을 수집하던 시절, 이 3인조의 등장은 그야말로 도화선에 불을 붙인 셈이었다.


마침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이 내한하며 청소년들의 취향이 전면에 부상하던 시기였다. 흐름 좋게 선보인 그들의 데뷔곡인 ‘난 알아요’는 일대 혁신을 불러왔다. 전주에 울려 퍼지는 디스토션 기타와 샘플링 사운드, 화려한 춤과 한국어로는 불가능할 것이라 여겨왔던 랩까지. 클리셰란 클리셰는 모조리 거부한 듯한 이 노래에 즐길 만한 콘텐츠가 없어 답답해하던 10대들의 속이 뻥 뚫렸다. 팝만 듣던 이들도 음악에 관심이 없던 이들도 모두 이 노래에 홀려갔다. 어른들은 그런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멜로디가 없는 노래는 노래로 여겨지지 않았다. 이처럼 그들의 히트와 함께 ‘세대차이’라는 용어가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지금보다 범상치 않은 스타일링

처음으로 주목받았던 한 연예프로그램 출연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에피소드이다. 당시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던 기성 작사/작곡가는 새로운 스타일이지만 멜로디가 약하고 가사가 빈곤하다 비판하며 그 가능성을 높게 점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대를 바꾸려는 이들과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이들의 맹렬한 부딪힘이었으며, 신세대와 기성세대의 간극을 극명히 보여주는 순간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만큼 그들의 등장은 음악을 넘어 사회적으로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랩에 더욱 초점을 맞춘 후속곡 ‘환상속의 그대’ 역시 메가히트를 기록, 그 영향으로 가요계는 단숨에 조타수를 돌리게 된다. 빠른 랩댄스뮤직에 격렬한 안무를 탑재한 케이팝의 원형은 그렇게 확립되었고, 10대 타깃의 그룹들이 우후죽순 등장하며 넘쳐 흐르던 수요를 흡수해갔다. ‘한국 가요계는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라는 말은 더 이상 누군가의 허언이 아닌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와중에 갑작스러운 활동중단 소식이 들려왔다. 지금이야 앨범준비를 위해 휴식기를 가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시스템이 따로 없던 시절이었다. 방송국 PD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시기였기에 자의적인 스케줄 조정이 불가능했던 탓이 컸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기존의 관례를 엎고 음악작업에만 몰두하게 된다. 당시 기득권에 대한 저항이자 독자적인 행보를 만들어가겠다는 일종의 선언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그들이 불과 20대 초반일 때의 일이다.

당시에는 이렇게나 뉴스거리였다.

모험을 감행하고 발표한 2집은 팀에 대한 모든 우려와 비판을 불식시키는 명반으로 자리한다. 특히 ‘하여가’는 난해하다는 일부 관계자들의 평가를 비웃듯, 대중들로부터 역시 서태지라는 찬사를 불러오며 다시 한 번 붐을 일으키는데 성공했다. 헤비메탈과 힙합을 접목했고 동시에 국악기인 태평소를 삽입, 실험적인 측면과 대중성을 함께 취한 음악적 매무새가 그의 천재성을 대변하고 있었다. 여기에 아직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는 안무까지.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만족시키며 ‘태지보이스 천하’를 더욱 굳건히 한 결정타였다. 평론가들을 대상으로 한 서태지와 아이들 20주년 설문조사에서 당당히 최고의 곡으로 뽑혔을 정도. 여기에 ‘우리들만의 추억’, ‘너에게’, ‘마지막 축제’ 등 다수의 대표곡이 수록, 대중가요 음반 중 최초로 더블 밀리언셀러의 자리를 꿰찼다.  


이들의 활동에 있어 터닝포인트라고 한다면 역시 3집 시절이 아닐까 싶다. 보다 사회적인 메시지를 강조함과 동시에 음악 역시 록의 비중이 대폭 늘어났다. 본래 헤비메탈 밴드 시나위에서 베이스로 활약했던 출신성분이 크게 작용했을 터. ‘문화대통령’이라는 이미지는 이 때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타이틀곡 ‘발해를 꿈꾸며’는 하이틴스타가 통일에 대한 노래를 부른다는 점이 화제가 되었으며, 음악 교과서에도 실리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메탈 사운드 도입을 통해 공교육제도를 비판한 ‘교실 이데아’의 메시지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강해진 자아표출만큼 방송사와의 갈등 역시 격해지며 좀처럼 브라운관에 얼굴을 비추지 못하던 시기였기에 1위곡을 배출하지 못했으며 앨범판매량도 다소 주춤했다.


10대들의 우상이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들은 10대들을 대변하길 원했다.

10대들에게 그의 영향력이 가장 직접적으로 작용했던 곡이라면 역시 4집 타이틀인 ‘Come back home’이다. 역시나 대중들에게 낯선 갱스터랩을 통해 가출 청소년들에게 메시지를 전했고, 실제로도 많은 이들이 집으로 돌아오며 일종의 사회현상으로 번져갔다. 여기에 물질만능주의를 주제로 한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로 비판의 강도를 높이는가 하면, 시각장애인을 다룬 ‘슬픈 아픔’과 같이 다른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등 같은 자리에 안주하지 않는 작품을 완성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필승’의 염색머리는 규제 대상이었고 ‘시대유감’의 가사 역시 공연윤리위원의 수정권고를 받았다. 특히 ‘시대유감’은 아예 보컬파트가 삭제되어 있는데, 일부를 바꾸느니 아예 삭제하겠다는 서태지의 의견이 반영된 내용이기도 했다. 참고로 이들의 모든 정규앨범은 모두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현재 아이돌 가수의 원형을 제시하고 정립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영미권의 트렌드를 과감히 이식해 당시로서는 비교대상을 찾기 힘든 독창성을 획득했으며, 비주얼적인 측면을 특히 강조해 젊은 세대의 니즈를 충족시켰기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모자의 텍을 떼지 않고 활동했던 1집이나 치마나 한복을 무대의상으로 활용했던 3집, 단발머리와 함께 스노우보드 룩을 유행시켰던 4집까지. 앨범마다 확실한 콘셉트로 패션에서도 유행을 선도했다는 점은 활동의 지향점을 잘 보여주는 예시다. 그렇게 그들은 수많은 추종자를 낳았고, 현 케이팝 문화의 큰 축을 이루고 있는 팬덤은 본격적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들의 팬클럽은 단순히 가수를 지지하는 것에서 나아가 ‘서태지와 아이들 기념사업회’를 출범시켜 사회적인 이슈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수준으로까지 나아갔다는 사실이다.

팬덤의 선한 영향력

하지만, 그들의 활동이 지금 세대의 케이팝 그룹과 달리 명확한 독립적 성향을 띄었다는 사실은 유념해두어야 할 부분이다. 모든 행동이 주도적이었으며, 기성세대의 제재에 전혀 괘념치 않았다. 방송국 PD가 가수들에게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때에도 그들의 지시를 거부했으며, 그렇게 맞서 싸운 덕분에 다른 아티스트들은 보다 다양한 모습으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공연심의위원회에서 ‘시대유감’의 가사를 수정하라고 했을 땐 아예 삭제해 싣는 등 줄곧 타협과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였다. 이는 추후 사전심의제도 철폐에 있어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모든 행보가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닌, 자신의 의지였다는 것. 어렸을 때부터 삶의 많은 것을 통제당하고 24시간을 소속사에 종속당하는 케이팝의 현실을 비추어 봤을 때, 서태지와 아이들은 컨텐츠와 케이팝 신에 대한 상업적인 힌트를 제공했을 뿐 활동방식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이뤄낸 중요한 성과는 ‘10대들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자신들의 문화를 일궈 낼 수 있다’는 사실을 한국에 전파했다는 것이다. 중졸의 학력인 그가 사회를 변혁해가는 것을 목격한 청소년들은 묵묵히 공부하는 대신 조금씩 자신을 표현해 갔고, 본격적으로 자신들만의 문화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젊은 세대들이 세상을 이끌어 가게 한 원동력에 엔진을 제공했다는 점, 그것이 바로 이들의 존재의의인 것이다. 아이돌 역사의 첫장을 장식할 목적으로 이들을 소개하는 지면을 마련했지만, 이 글을 보시는 분들도 이젠 그들의 활동이 ‘케이팝의 기원’ 정도의 상징성은 가볍게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4년이라는 짧은 활동기간을 뒤로 하고, 이들은 1996년 1월 31일 기자회견을 마지막으로 갑작스레 은퇴수순을 밟았다.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모두 보여주었다”는 한마디로 대중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사람들은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극성 팬들은 소속사와 멤버들의 집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기자들은 앞다투어 “X세대, 집단 히스테리 증상”이라는 자극적인 기사 제목으로 해당 사태를 연일 보도했다. 아쉬움과 혼란, 각종 추측이 난무했던, 떠나는 순간마저도 범상치 않았던 그들다운 퇴장이었다. 그렇게 그룹과의 이별에 눈물지었던 이들은 추후 1세대 아이돌인 H.O.T.와 젝스키스 팬덤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그룹이 가요계를 떠난지도 어느덧 23년이 흘렀다. 양현석과 이주노가 다소 아쉬운 행보를 보이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서태지만큼은 그때와 변함없는 가치관으로 솔로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 2017년에 있었던 25주년 콘서트 < Time Traveler >에서는 예전 히트곡들을 BTS와 재현하며 큰 화제를 불러모으기도. 그의 꾸준함이 있었기에 아이돌 신의 전설과 영웅이 함께하는 역사적 순간이 펼쳐진 셈이다. 이렇게 세월과 관계없이 꾸준히 기억되고 불리우며 그 상징성을 갱신해 가고 있는 이들.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그룹은 ‘케이팝의 그 무언가’가 아닌, ‘케이팝의 모든 것’이라 불러 마땅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케이팝 역사가 증명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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