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꽃보다 스님들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by 파란동화


백두대간 옆 봉암사 수련장에서

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사는 곳에는

왜 잘생긴 남자들이 하나도 없는 것인지

대한 해답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대한민국의 잘생긴 남자들이 모두 머리를 깎고 봉암사에 들어앉아 있었던 것이다! 머리를 빡빡 밀고도 미모가 감춰지지 않는 연예인급 스님들이 울타리 너머 봉암사 수련장에 단체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헐! 대박!

원래 스님들이 다 이렇게 잘 생겼나?

스님이 되는 과정에 인물심사라도 있는 것인가?




봉암사에서 수련중인 스님들은 젊다 못해 앳되어 보였다. 이제 겨우 성인이 된 듯 어려보이는 스님들도 많았다. 저 어린 나이에 자신의 인생을 깊이 돌아보고 스님이 되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개중에는 20대 중반이나 30대로 보이는 스님들도 있었지만 모두 나보다 어려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저 사람들이 인생을 걸고 중차대한 결정을 할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저 나이 때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다. 집을 벗어난 나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매일 술을 마시며 밤마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었다.




어린 스님들을 보니 내 자신이 더욱 한심하게 느껴진다. 누군가는 꽃미모를 가지고도 스님의 길을 택하는데, 미모도 부모도 없는 나는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인생을 낭비했던 것일까?




지름티재의 흙길 숲길을 지나자 다시 90도 직벽이 나타났다. 신기하게도 하나의 벽에 로프가 3개나 달려있다. 왜 로프가 3개나 달려있지?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는데 나중에 알게되었다. 이곳은 백두대간 등산로이며 동시에 스님들의 훈련장으로 사용되는 곳인 모양이었다. 세 명이 동시에 훈련을 받기 위해 로프를 3개나 설치해 놓은 것 같았다.




로프는 잡기 쉽도록 중간 중간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그 매듭 바로 위를 잡으면 적어도 손이 미끄러질 염려는 없었다. 바위는 90도 직벽이지만 절리가 형성되어 발을 디딜 수 있는 홀드가 정확하게 딱딱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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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8d26ff27-4fdf-4ecf-bd11-8d31fb2c751b.jpg?type=w1 ※ 사진출처 : 등산 인플루언서 블로거 '란/ 오즈의 마운틴' 2013년 11월 백두대간 ※





휴우~
할 만 한데?
어디 시작해 볼까?




어제의 특전사 훈련덕분에 오늘은 모든 것이 할만 해 보였다. 하지만 바위가 참으로 높고도 길다. 나는 열심히 올라간다고 올라갔는데 여전히 로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렇게 낑낑대며 오르고 있는데 나이 지긋하신 스님이 다른 로프를 잡고 내 옆을 지나가며 한마디 하신다.




"아이고~

그 배낭을 메고...

도와 달라고 부탁하지 그랬어요.

여기 젊고 힘 좋은 스님들 많은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언제 온 것인지 모를 스님들이 줄 지어 서 있었다. 마지막 세번째 로프를 잡고 올라오던 젊은 스님이 앞선 스님의 말씀을 듣고 나에게 물었다.




"배낭 들어 드릴까요?"




스님은 내가 대답을 할 때까지 지나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배에 힘을 잔뜩 넣고 대답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거절을 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도대체 여기 어디서 배낭을 내린단 말인가! 이 높은 절벽에서, 로프에 매달려 있기도 버거운 곳에서, 도대체 어떻게 배낭을 풀어 옆에 있는 스님께 전한단 말인가! 배낭을 들어달라고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오느니 그냥 빨리 지나가는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로프에 매달려 있기만도 힘들어 죽겠는데 말을 걸고 대답을 바라니 귀찮아 죽겠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배에 힘을 주고 겨우 대답했다. 인간에게 복식호흡이 없었다면 나는 대답도 못 했으리라.




박배낭을 메고 낑낑대며 절벽을 오르는 동안, 나의 옆으로 남은 두 개의 로프를 통해 스님들이 계속 계속 올라간다. 승복을 입은 가벼운 몸짓으로 무척이나 쉽게들 올라간다. 이런 젠장... 나비처럼 가벼워 보이는 스님들 옆에서 혼자 무겁게 삽질을 하고 있는 기분이다.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나도 곧 절벽 위로 올라선다. 먼저 올라간 스님들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구경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위에 도착해보니 아무도 없었다. 절벽 끝에는 좌우로 능선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우측의 오르막을 오르면 희양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고, 좌측의 내리막을 내려가면 그 길이 곧 백두대간 길이다.




희양산 정상부는 스님들의 수련을 이유로 통제하고 있었고, 절벽을 오른 스님들은 모두 희양산 정상부 쪽으로 달려가고 없었다. 시간을 체크하는 것인지 걸어가는 스님 하나 없이 모두 오르막을 달려가고 있었다.





SE-fc190be5-5462-4302-98b1-7378dad3d91d.jpg?type=w1 ※ 사진출처 : 등산 인플루언서 블로거 '란/ 오즈의 마운틴' 2013년 11월 백두대간 ※





보통은 산의 정상부를 연결지어 이어가는 것이 백두대간 등산로인데, 이 곳 문경구간은 악희봉부터 희양산과 곧 나타날 시루봉까지 세 개의 봉우리가 모두 백두대간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다.




희양산 정상부는 로프로 얼기설기 만들어 놓은 울타리와 함께 출입금지 푯말이 세워져 있었고, 위반시 과태료는 국립공원의 과태료보다 5배나 비싼 50만원이라고 씌어있었다. 그나마 저 곳을 통과하지 않고도 백두대간을 이어갈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백두대간 경로인 내리막으로 내려섰다. 바위를 따라가는 등산로였지만 경로가 완만했고 울창한 나무숲이 그늘을 만들어주어 시원한 길이었다. 사람 많은 길에서 벗어나 다시 조용히 걷기 시작하니 편하고 좋다.




희양산에서 배너미평전으로 이어지는 내리막 길에는 등산로 왼편으로 성벽이 쌓여 있었다. 이제는 성벽이나 산성이라기 보다 '성벽터' '산성터' 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정도로 무너진 성벽의 모양만 남아있는데, 이 곳은 신라말 견훤이 군사를 보내 축조한 곳이라는 설이 있다고 한다.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보면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삼국시대까지 두루 만나게 된다. 그런 일화들을 알고 걸으면 더욱 재밌는 것이 백두대간이다. 신라말에 쌓은 성벽이 어떻게 1200년이 넘는 세월을 뚫고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인지 신기하기만 하다.




나무그늘 아래를 시원하게 걷다보니 어느덧 시루봉 갈림길인 배너미평전에 도착했다. 오후 4시 30분. 나는 여기서 물을 채워 이제부터는 야영할 곳을 물색하며 길을 이어가야 했다. 배너미평전은 계곡이 흐르는 곳이고 지도에도 분명 물이 있다는 표시가 있었다. 그런데! 물이 없다! 계곡이 바닥까지 바싹 말라있었던 것이다.




계곡 바닥과 같은 자갈길은 즐비한데 물은 한 방울도 없었다. 평전을 샅샅이 뒤졌지만 가느다란 물줄기나 작은 웅덩이도 발견하지 못했다. 아... 어떡하지? 물을 꼭 채워야 하는데... 희양산의 절벽을 오르며 남은 물을 모두 마셔버렸다. 비박을 할 물은 물론 당장 마실 물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배낭을 내려두고 물병만 챙겨 계곡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은티마을 방향으로 20분간 내려간 끝에 드디어 조금씩 흐르는 계곡물을 발견했다.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곳 까지 조금 더 내려가서 물병들을 채웠다. 하지만 수량이 약해서 물을 받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다시 배너미평전으로 돌아온 것이 오후 6시 10분. 여기서 1시간 40분을 낭비했다. 평전 근처에서 물을 찾는데 30분, 계곡으로 내려가서 물을 받아 다시 올라오는데 70분을 써버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느긋하게 올라와 배너미평전에서 비박을 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평소의 내 스타일이었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직전에 들은 말이 있었다. 이 곳에서 비박을 한 사람들이 밤새 들었다는 이상한 소리에 대해서.




누군가는 밤새 돌 굴러가는 소리, 바위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하고, 누군가는 밤새 여자들과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했다. 한 때는 이 위쪽에도 모두 수량이 풍부한 계곡이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물놀이를 위해 찾는 여름피서지였다고 했다.




어느해 여름, 사람들의 텐트가 잔뜩 모여있던 밤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고 계곡물이 불어나면서 이 곳 배너미평전의 모든 텐트가 삽시간에 쓸려가 버렸다고 했다. 그 날 계곡에서 잠을 이루던 사람들은 모두 안타깝게 생명을 놓쳐버렸고 이후로 이 곳에서 비박하는 사람들에겐 밤새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고 했다.




그 말을 듣지 않고 여기에 도착했다면 나도 여기서 비박을 했을 것이다. 희양산의 직벽을 오르느라 진이 빠졌고, 바로 아래 계곡에서는 물을 수급할 수 있으며, 배너미평전은 이름처럼 넓고 편해 보이는 안부였다.




나는 백두대간 종주를 하는 동안 분명 귀신도 만나게 되리라고 기대했었다. 도시에서는 전혀 만날 수 없는 야생동물을 대간길에서는 심심찮게 만나는 것 처럼, 귀신도 그러하리라 생각했었다. 종주를 하는 동안 적어도 서너번은 마주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기대한 귀신은 내 엄마의 다른 이름이었고, 혹 엄마가 아니더라도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서로의 고민을 얘기할 수 있는 단 한명의 귀신이었다. 떼로 모여있는 귀신은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나는 1:1의 만남을 원했을 뿐이었다. 사람이든 귀신이든 떼로 달려들면 감당이 안된다.




배너미평전에서 배낭을 찾아메고 오르막 능선을 오른다. 여길 빨리 벗어나야 해! 곧 해가 진다구! 희양산 직벽을 오르며 다 써버렸다 생각했던 체력과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지 계속해서 솟아 올랐다. 박배낭을 메고 그 어느때보다 힘찬 걸음으로 뛰다시피 오르막 등산로를 치고 올라간다.




오후 6시 55분. 시루봉 갈림길에 도착했다. 오르막의 끝에 닿은 것이다. 배너미평전에서는 1km 떨어진 곳이고 여기서부터 완만하고 평평한 등산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좁은 등산로였을 뿐이고 바닥도 울퉁불퉁 했지만 나는 더 볼 것도 없이 배낭을 내려 텐트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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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던 에너지를 끌어올려 쓴 덕분에 또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허벅지과 종아리가 터질 듯 땡긴다. 으윽... 정말로 터질 것 같다! 얼굴에서는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티슈로 얼굴을 닦고 계곡에서 받아온 물을 약간 부어 세수도 한다. 하아.... 그래도... 배너미평전을 완전히 벗어났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비박꾼들이 귀신을 자주 만난다는 곳은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지리산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귀신을 만나는 이유는 지리산이 6.25 전쟁 당시 빨치산의 마지막 격전지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국립공원 직원의 단속을 피해 불법으로 행하는 비박이지만,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비박이나 야영이 불가한 지역이란 없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찾는 지리산에서도 비박을 하며 귀신을 겪었다는 사람은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었다.




친구들 서넛이서 지리산의 인적 드문 안부에서 비박을 하는데, 자고있던 친구 하나가 새벽 어스름에 조용히 일어나더니 텐트 밖으로 나가려고 하더란다. 화장실이 급한가? 싶어 별 생각없이 "어디 가?" 물으니, 자다 일어난 친구가 "저 여자가 나를 부르잖아." 라고 대답 하더라는 얘기. 깜짝 놀라 나가려는 친구의 다리를 꽉 붙잡았더니 그제야 정신이 든 친구는 자신이 왜 서 있는 것인지 이유조차 모르더라는 얘기. 그러면서 어떤 여자가 끊임없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꿈을 꾸긴 꿨다고 말하더라는 얘기.




비박을 하며 나도 언젠가는 귀신을 만나게 되리라 상상했지만 백두대간 종주 내내 단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진짜 귀신이 있을만한 곳은 피해다녔기 때문이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9구간

진행 구간 : 지름티재(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의 경계)-희양산-배너미평전-시루봉갈림길 비박(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의 경계)

진행 날짜 : 2012년 6월 6일 / 수요일

SE-b140c7b6-bc9c-4d07-bb2d-0feb734f9bd2.png?type=w1 * 지도 : 고산자의 후예들/ 백두대간24 *








「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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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수목금 주5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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