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도망쳐도 괜찮아
어제의 마지막 45분은 확실히 무리였다. 해가 지고 귀신을 떼로 만나게 되더라도 좀 더 천천히 걸었어야 했다. 텐트를 설치하고 밥을 먹는 동안에도 무릎을 중심으로 종아리와 허벅지까지 통증이 줄어들지 않았는데, 자는 내내 다리가 너무 아파 몇 번이나 잠이 깨었다.
무릎은 시큰거리며 욱신거리고 종아리와 허벅지는 근육의 결들이 죄다 찢어지는 것 같다. 나의 다리를 감싸는 근육이 몇 가닥으로 형성되어 있는지 생생히 느껴질 정도였다. 그냥 배너미평전에서 잤어야 했다. 괜히 그런 얘길 들어서 억지로 벗어났다가 안그래도 저질체력인 몸뚱이가 더욱 만신창이로 되어버렸다. 적어도 귀신들은 나의 근육들을 찢어놓치는 않는다구!
잠이 들기 전과 잠에서 깨어난 직후, 텐트에 누운채로 무릎 스트레칭을 하는데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비명이 터져나왔다. 특히나 잠들기 전 스트레칭에서는 나도 내 소리가 제어되지 않을 정도였다. 산에 있는 귀신들이 나의 비명을 듣고 도망갈 판이었다.
그래도 자고 일어나서 기분은 제법 괜찮았는데, 밥을 챙겨먹고 종주를 시작하자 아침부터 기력이 쭉쭉 빠져나간다. 잠을 이룬 시루봉갈림길에서 이만봉과 곰틀봉, 사다리재까지 이어지는 길은 오르막도 거의 없이 평지같은 완만한 길이었는데, 그런 길을 걸으면서도 나는 계속 헉헉 거리고 있었다.
그저께 너무 많은 로프를 건너온 데다 어제는 너무 급하게 걸어야 했다. 이틀 동안의 무리한 산행이 오늘의 체력방전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상체에서는 계속 힘이 빠져나가고 하체에서는 계속 통증이 느껴진다. 배낭을 멘 어깨는 땅에 닿을 듯 제 위치를 잡지 못하고 무릎은 걸으면서도 푹 푹 꺾였다.
등산을 할 때는 산을 타는 동안 체력의 70%만 쓰고 하산하고 난 이후에도 30%의 체력은 남겨두어야 한다고 했다. 산에서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면 남은 30%의 체력으로 버틸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어제 그제 쓰고 난 체력을 제대로 충전하지도 못한 채 30%도 안되는 체력으로 겨우겨우 오늘을 버텨내고 있었다.
지금 나의 체력은 5%도 남지 않은 것 같다. 어젯밤부터 배터리 잔량에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다. 이 완만한 길을 걷다가 푹 쓰러진대도 하등 이상할 일이 없었다.
사다리재를 지나 평전치까지도 길은 계속 완만했다. 하지만 나는 계속 힘이 빠져나간다. 오늘은 아침부터 안개가 끼고 하루종일 흐린 날이었는데도 나의 기력이 모두 증발하는 느낌이었다.
평전치를 지나자 다시 바위지대가 나타났다. 이번엔 로프를 잡고 암릉을 기어오르는 코스가 아니라, 바위를 껴안고 돌아가는 코스다. 직벽을 오르는 게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었지만 직벽을 껴안고 지나가려니 이 또한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벽에 밀착해야 지나갈 수 있어서 발 아래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백화산 정상을 지나자 천국이 나타났다. 숲이 울창한 나무 아래가 죄다 부드럽고 여린 풀이다. 하늘도 땅도 온통 초록세상. 경북 상주의 큰재에서 회룡재를 지날 때도 이런 비슷한 곳이 있었다. 그 때도 참 예쁘다 생각했는데 여기도 정말 예쁘다. 그 때는 그저 예쁘다는 느낌이 전부였지만 기력이 없는 지금은 '혹시 여기가 사후세계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백화산 보다 고도가 낮은 황학산에 도착해서 배낭을 내려놓고 쉰다. 오늘은 이정표가 나오는 곳 마다 배낭을 내려놓고 10분씩 30분씩 쉬어간다. 이렇게까지 자주 쉰 것도 여기가 처음이다.
보통 완만한 구간을 지날 때는 잘 쉬지도 않고 쉬어도 가만히 서서 쉬었다. 오르막의 끝지점에 닿지 않는 한 배낭을 내리면서까지 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고도차가 미세함에도 계속 배낭을 내리게 되었다. 배낭을 내려놓고도 80 먹은 노인처럼 등이 굽어 어깨가 펴지지 않았다.
이렇게나 힘이 없는데도 제 시간에 기점을 통과하는 것 보면 신기하다. 지도에서 알려주는 시간과 10분 이상 차이나지 않는다. 오후 1시. 황학산에서 쉬며 점심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너무 힘이 드니까 목구멍이 꽉 막혀 밥이 들어가지 않는다. 나는 초코렛과 양갱으로 점심을 대신한다.
당 충전을 했는데도 기운이 안 난다. 그리고 황학산을 지나면서부터는 머리가 지나치게 어지럽고 구토증이 밀려왔다. 밥도 안 먹었는데 계속 구역질이 올라온다. 구역질을 다스리기 위해 물을 계속 마셨다. 소용없다. 식은땀을 흘리며 길을 이어간다.
내리막을 내려가다 보니 뜬금없이 연못이 나타났다. 속리산 못제를 지날 때 그곳의 안내판에는 못제가 백두대간의 유일한 연못이라고 씌어 있었는데 여기에 또 연못이 있는 것이다. 신기하다. 못제의 연못은 이름만 연못일 뿐 바닥까지 말라 물이 하나도 없었는데 여기는 연못 웅덩이에 물이 가득했다.
그리고 나는 이 때부터 눈 앞의 풍경이 정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너무 어지러우니 시야마저 흔들린다. 구토증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고 햇볕도 없는데 땡볕 아래 있는 것처럼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안되겠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민박을 해야지.
스마트폰으로 검색해서 곧 도착할 이화령의 산장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 숙박이 가능한지 여쭈니 예약이 꽉 차서 빈 방이 없다고 하신다. 백두대간의 산장이나 민박은 평일에 사장님이 안 계신 경우도 더러 있어서 그걸 여쭤보려고 전화한 것인데 예약이 꽉 차다니. 주말도 아닌 목요일에!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회원수 많은 산악회에서 산장을 통째로 예약한 것일까?
죽어가는 목소리로 어떻게 방법이 없겠냐 다시 여쭈니, 다른 사람들은 다 예약을 하는데 왜 미리 예약을 안 했냐고 오히려 혼구녕이 났다. 흑흑... 너무 기운이 빠져서 눈물까지 질질 흘러내렸다. 그래... 이렇게 된 거 그냥 서울로 돌아가자. 집으로 돌아가서 쉬자. 집을 떠나온지 고작 나흘, 배낭에는 아직 6일치의 식량이 남아 있었지만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내일과 모레는 비 예보가 있었다. 이 몸으로 비를 맞으며 종주를 이어가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생각을 하며 이화령으로 내려 선다. 이화령에는 굉장히 좋은 휴게소가 있었지만 나는 휴게소에 들어갈 힘 조차 없었다. 대간길을 벗어나자마자 택시를 불러 타고 연풍정류소로 가서 충주행 버스를 탔다. 그리고 충주에서 환승하여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기절하듯 쓰러졌다. 배낭을 풀어 정리하지도 못하고 기절했다. 그렇게 깜뿍 잠이 들었다가 새벽녘 잠이 깨었을 때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체력을 너무 끌어당겨 써서 집에 도착하면 열흘 넘게 요양하게 되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대간길에서 고라니 울음소리를 들은 이후로 다시 어린시절의 악몽이 시작되어 잠이 오지 않았다. 체력도 없고 피곤한데 눈을 감으면 잠이 오지 않고, 잠이 오지 않으니 어린시절 겪었던 일들이 하나 하나 다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명치가 아파오기 시작했고
다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집채만큼 커다란 스펀지가 나의 눈코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이 스펀지는 어린시절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항상 나의 얼굴 위에 존재하고 있었다. 정확이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고 1때부터 였는지, 아니면 고 3때부터 였는지.
숨막히는 나날들이 이어질 때면 실제로 나의 숨을 틀어막고 있는 스펀지가 존재가 느껴지곤 했다. 집채보다 커다란 스펀지가 나의 얼굴과 가슴과 심장을 짓누르고 있었고 나의 뇌 속에도 온통 스펀지가 들어차 있는 기분이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 눈을 감고 있으면 스펀지가 더 크게 더 크게 형체를 부풀려가며 나를 짓누르고 있었고, 그러면 항상 명치가 잔뜩 눌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너무 숨이 막혀서 눈을 뜨면 스펀지의 구멍 구멍이 눈 앞에 실제로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침대에 똑바로 누워있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린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집채만한 스펀지가 서서히 사라진다. 나는 몸을 새우처럼 말고 명치를 두드리며 숨을 뱉어낸다.
하아...
숨 쉬고 싶다...
편하게 숨 쉬고 싶다...
숨 쉬며 살고 싶다...
사는 것 처럼 살고 싶다...
결국 나는 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다시 대간길에 올랐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잠을 제대로 자야했고, 잠을 자기 위해서는 몸을 혹사시키는 수 밖에 없었다.
목요일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던 나는
일요일 아침에 다시 동서울터미널로 향했다.
지난번 대간을 마무리했던 이화령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11시 25분. 일요일이라 대간길 초입부터 산악회 회원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막상 등산로에 들어서자 사람이 별로 없어서 신기하다 생각했는데 웬걸, 조령샘과 이어지는 헬기장, 그리고 조령산 정상까지 엄청난 수의 산악회 회원들이 수십개의 원을 그리며 앉아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피해 산을 오른다.
기분이 울적한 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은 최대한 피하고 싶다.
이화령에서 조령산으로 오르는 길은 백두대간 종주자들 외에 일반 등산자들도 많이 찾는 곳인지, 입구부터 등산로 정비도 잘 되어 있었고 중간 중간 쉴 수 있는 넓은 공터도 많았다. 걷기도 좋고 완만한 오르막이 이어진다.
거기다 오늘 나의 배낭은 비박장비가 들어있는 박배낭이 아닌 당일배낭이다. 산은 가야겠지만 박배낭을 메고 다니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산에서 정말로 죽을 작정이 아니라면 가엾은 내 몸뚱아리 생각도 좀 해줘야 했다.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억지로 나선 대간길이었다.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20kg이 넘는 박배낭을 메고 다니다가 10kg이 채 되지 않는 가벼운 배낭으로 바꿔 메니, 집에서 떠나온 첫 날인데도 오르막이 힘들지 않았다. 1시간 30분이 걸린다는 조령산 정상에 정확히 제 시간에 도착했다.
< 오늘의 백두대간 >
고산자 지도/ 남쪽에서 북쪽방향으로
총 24구간 중
9~10구간
진행 구간 : 시루봉갈림길 비박(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의 경계)-이만봉-곰틀봉-사다리재-평전치-백화산-황학산-조봉-이화령-서울로 귀가-다시 이화령-조령산(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의 경계)
진행 날짜 : 2012년 6월 7일, 10일 / 목, 일요일
이번주 한주간 어두운 내용이 많았어요.
읽는 분들도 힘드셨을 것 같아요.
다음주에는 다시 밝은 내용으로 돌아올게요.
항상 감사합니다. ^^
시원한 주말 보내세요~
파란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