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캠핑을 갑니다] 일곱 번째 이야기
아이를 낳고 난 이후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 있다.
둘째는 언제 낳을 거야?
처음 들었던 때는 아들을 낳은 뒤 일 년여 만에 복귀한 회사에서였다. 그때는 둘째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고민도 없었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 낳더라도 지금 당장은 아니다.'라는 애매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또다시 내게 물은 사람은 친정 엄마였다.
둘째는 언제 낳을 거야?
혼자는 너무 외로워. 형제가 있어야지.
그때마다 나는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대충 얼버무렸다. 자식도 첫째가 있으면 둘째도 당연히 있어야 하는 걸까?
솔직히 말하면 둘째에 대한 욕심은 없었지만 특별히 거부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는 것을 이럴 때 느낀다. 분명 낳아 키우면서 무척 힘들었을 텐데도 그런 사실을 잊어버리고, 또 아이를 낳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런 고민에 마침표를 찍은 건 바로 남편이었다.
"너무 힘들었어.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아."
남편에게는 망각 효과가 통하지 않은 듯했다. 짧고도 확실한 마침표에 그 이후부터 누군가 또다시 둘째를 물어보면 난 '없다'라고 대답한다. 물론 시작은 타의로 인한 결정이었지만 나 또한 그 결정에 동의한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지금 다시 아이를 낳는다면 또 5년을 잃어야 할 테니까.
하지만 그 결정을 정말 잘한 것일까?라고 의문을 두게 되는 포인트가 단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아들이다. 아들은 정말 혼자인 것이 좋을까?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든 건 캠핑에서였다. 몇 번의 캠핑을 다니면서 만나봤던 아이들은 대부분 형제자매와 무척 즐겁게 노는 모습들이었다. 아들은 그런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무척 유심히 바라보더라. 그때마다 저들이 부러운 건 아닐까? 아님 같이 놀고 싶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캠핑은 우리 부부에게 축복과도 같은 시간이었지만 과연 아들에게도 그럴까?
아들도 정말 캠핑이 좋을까?
아들은 혼자여도 괜찮은 걸까?
우리 집에서 아들의 친구 역할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은 바로 엄마인 나였다. 아직까지는 그랬다.
그 이유에 대해 특별히 고민해본 적은 없지만 대충 짐작되는 바는 있었다. 첫째는 나와의 애착관계가 깊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아들의 놀이 성향이 내향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근거 없이 심증만 가득한 이유지만 말이다.
아들은 다른 또래의 남자아이들처럼 밖으로 나가 뛰어노는 것보다 집 안과 같이 안전하게 통제되어 있는 상황에서 장난감 같은 것들을 만지고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런 놀이에 적합한 나와 노는 것을 좋아할지도 몰랐다.
아들은 혼자 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놀이를 할 때에는 바로 옆에 누군가와 함께 있길 원했다. 꼭 뭔가를 같이 하지 않더라도 사람이 옆에 있거나 애정 가는 사람에게 부대끼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주말이 되면 항상 아들은 나를 붙잡고 여러 가지 놀이를 하고 싶어 했다. 블록놀이, 소꿉놀이, 자동차 놀이, 그림 그리기 등 그 모든 것을 같이하는 친구는 대부분 나였다.
캠핑을 가서도 아들의 친구는 바로 나였다. 아빠가 집을 짓는 동안 아들과 나는 모래놀이나 캠핑장을 돌아다녔다. 아들에게 난 엄마인 동시에 친구였던 것이다.
아들이 블리스 캠핑장을 가면 꼭 가장 먼저 방문하는 장소가 있다. 그곳은 바로 온갖 장난감이 모여 있는 놀이방이었다. 밖에서 뛰어노는 것보다 안에서 장난감 갖고 노는 게 더 좋은 아들에겐 무척 행복한 장소일 것이다. 오죽하면 '블리스 캠핑장'을 말할 때 '장난감 캠핑장'이라고 말할까. 아마도 아들의 기준엔 그곳이 장난감이 많아서 블리스(Bliss)였을 것이다. 물론 명칭과 의미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문제는 앞서 얘기한 것처럼 놀이방에 절대 혼자 있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이었다. 다른 또래의 친구들이 있다 하더라도 변함이 없었다. (당시) 4살이었던 아들은 아직 처음 보는 또래와 친해지는 법을 전혀 몰랐다. 이제 겨우 말을 텄는데 다른 아이와 처음 보자마자 친해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남편은 말했다. 당연히 캠핑은 아들에게도 당연히 좋다고. 나도 기본적으로는 그 말에 동의한다. 때문에 일 년이 넘게 캠핑을 다니고 있었고.
우리 가족의 캠핑 이야기를 처음 꺼냈던 첫 편에서 언급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들이 말도 잘하지 못하면서 ‘캠핑’이라는 단어를 얘기했다고, 그래서 나의 집은 우리의 집이 되었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보자면 아들이 캠핑이란 단어를 말한 건 언제부턴가 우리 부부의 대화 속에 캠핑이 자주 나왔기 때문에 자연스레 익힌 것이 아닐까? 어쩌면 냉정이 아닌 비판적 사고일지도 모르겠지만, 모든 일의 발전엔 긍정적 사고뿐만 아니라 비판적 사고도 필요하다. (단 비판이 아닌 비난은 오히려 독이다.)
캠핑을 시작하고 자동차 모임 카페에서 주최한 공식 캠핑 다녀오면서 기대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아들의 친구 사귀기.
하지만 이미 지난 두 번의 공식 캠핑에서 아직 아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말하자면 나의 분홍빛 상상을 무참히 깨뜨리는 현타였다.
옛날부터 들었던 외동에 대한 말들이 있다.
혼자 자란 아이는 본인 위주의 사고를 하기 때문에 협동력이 약하고 친화력이 적다고. 그건 몇 가지 행동실험을 통해서도 이미 입증된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그건 아이일 때의 일이고, 그건 자라면서 어떤 환경을 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다.
아직 아들은 가족 이외의 누군가와의 관계를 받아들이기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난 아들이 왜 아이들과 친해질 수 없을까를 고민했던 것이고, 어떻게 보면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아들에게 강요를 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래서 한 번은 남편의 여동생 가족과 함께 캠핑을 떠났다. 익숙한 사람과 사촌동생이라면 아들도 외롭지 않고 즐겁게 놀다 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장소는 블리스 캠핑장이었다.
아이들이 놀기엔 블리스만 한 곳이 없으니까.
남편의 여동생 가족에겐 3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우리 아들과는 바로 한 살 차이 동생이었다. 사촌동생이 갓 태어났을 때부터 서로 봐왔던 사이였기 때문에 사촌동생네가 도착하자마자 둘은 같이 돗자리 위에서 놀이를 시작했다.
우리가 캠핑을 했던 시기는 11월 초였기 때문에 날씨는 급격히 추워져 있었다. 아직 해가 있는 오후였지만 산 속이었기 때문에 조그만 아이들 둘은 옷을 잔뜩 껴입고 자동차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둘 다 성별이 같은 남자여서 다행이었다. 두 남자아이 모두 좋아하는 자동차 놀이를 할 수 있었으니까. 조그만 남자아이 두 명이 앉아서 놀이를 하는 순간 우리 두 부부에게는 평화가 찾아왔다.
아이들이 같이 놀아주는 덕택에 우리는 텐트를 여유롭게 치고 자리 세팅도 마칠 수 있었다. 자동차 놀이가 좀 시시해지는 듯 하자 실내용 모래놀이 세트를 세팅해줬다. 그랬더니 또 한참 둘이 앉아 모래놀이를 했다.
둘 다 외동아들인 데다가 겨우 3살, 4살이어서 친구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을 때였다. 서로 형, 동생이란 것도 알고 있었지만 아직은 자기 것만 주장하는 시기어서 제발 둘이 ‘친해지면 좋겠어.’란 생각이 들던 때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둘이 너무 잘 놀아주더라. 그때 당시 사촌동생이 팔을 다쳐 깁스를 하고 있었던 것도 좋은 영향으로 작용한 것 같았다. 본인이 ‘형아’라는 개념을 잡아가고 있던 아들이 형아니까 동생을 챙겨줘야 한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 계기였으니까.
밥을 먹을 때에도 둘이 같이 나란히 앉아서 자기 손으로 먹었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밖에서 혼자 스스로 밥을 먹는 모습을 보인 것은 말이다. 형이 하니 동생도 따라 하고 서로서로 좋은 영향을 주면서 밥을 먹는 것을 보니 이런 점이 형제를 키우는 사람들이 좋겠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평화를 깨는 순간이 찾아왔다. 다음날 일찍 일어난 아이들이 놀던 때였다. 아들은 여느 때처럼 장난감 방에서 놀고 싶었다. 그곳에서 동생과 함께 놀고 싶었다. 그런데 동생은 장난감보다 나가서 뛰어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동생이 자기와 같이 장난감 방에 가지 않고 나가버리자 아들이 결국 울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동생은 왜 안 와?”
“동생은 나가서 놀고 싶대.”
아들은 당연히 같이 놀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동생은 장난감보다는 뛰어놀거나 트램펄린(방방이)을 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서로가 다름으로 인해 나타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직 어렸던 아들은 성향이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천천히 말을 해주었지만 쉬이 괜찮아지진 않았다. 같이 놀고 싶으면 누군가는 양보를 해야 하는데 아직 그것이 잘 되지 않는 것이었다.
잠시간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둘은 다시 밖에서 뛰어놀면서 평화를 되찾았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으로 함께 대동 단결하면서 짧지만 행복한 가족 캠핑을 마칠 수 있었다.
여느 때처럼 우리 가족은 2박 스케줄을 짜고 왔지만 여동생네 가족은 1박이었기 때문에 아이스크림을 야무지게 나누어 먹고는 떠나야만 했다. 그날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우리를 제외한 모든 캠퍼들은 짐을 싣고 하나둘 캠핑장을 떠나갔다. 마침내 여동생네 가족도 떠나자 캠핑장에는 고요가 찾아왔다.
동생이 떠나고 나자 아들의 옆에는 자연스럽게 우리가 자리했다. 동생이 있었을 때에도 옆에 우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우리 가족만 남아있는 시간은 조용함과 여유로움이 있었다.
그때 새삼스레 느꼈다. 함께여서 즐거운 시간도 있고 우리끼리여서 즐거운 시간도 있구나 하고.
결국
혼자는 혼자여서 즐겁고
여럿은 여럿이어서 즐거운 거더라.
나는 아들의 엄마이자 훌륭한 관찰자이고 싶다. 아들이 왜 그런 감정이 들었고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든 것을 관찰하고 이해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고 싶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아들에게 필요한 말을 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 아들의 훌륭한 관찰자이자 조력자,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이 어렵다는 것도 알고 내가 잘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계속 아들을 관찰하고 있다. 일 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동안 아들도 캠핑을 좋아하는 것 같아 보이고, 행동도 말도 그래 왔기 때문에 아들의 감정에 대해서는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이 캠핑장에서 계속 혼자이기 때문에 같이 노는 친구가 없기 때문에 혹여라도 싫은 것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었다.
그러나 그 생각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아들의 놀이였다.
어느 날 집에서 놀이를 하는데 이불과 자동차, 쿠션, 베개 등을 이용해 캠핑 텐트를 짓더라. 캠핑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거기서 확신했다. 아들도 캠핑을 즐긴다는 것을.
이젠 고민하지 않는다.
아들에게도 캠핑은 좋은 문화이고 라이프스타일이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어린아이를 둔 가족이라면 적극적으로 말하고 싶다.
캠핑을 가자고.
우리들에게는 가족이 되는 시간이 필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