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캠핑을 갑니다] 여섯 번째 이야기
당신이 좋아하는 자연의 색은 무엇인가요?
누군가 묻는다면 단연코 하늘색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세상에 하늘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하늘 말고도 좋아하는 자연의 색들이 있다. 따뜻한 봄날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분홍빛이 그러했고, 꽃잎이 지고 여름이 오기 전 새로 돋아난 나뭇잎의 싱그러운 초록빛도 좋았다. 그리고 시리도록 추운 겨울날을 반짝반짝 빛나게 만드는 새하얀 눈 색깔도 무척 좋아한다.
유년시기를 눈만 돌리면 산과 논, 들판이 보이는 시골에서 보냈기 때문인지, 벼가 익어가는 황금빛 논이라던가 울긋불긋하게 옷을 갈아입은 산 같은 건 내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런 건 매일매일 보는 것들이었으니까.
언젠가 지방 출장에서 만난 어떤 공무원에게 매일 초록 초록한 나무들을 봐서 좋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 공무원이 말했다. 매일 봐서 지겹다고. 그 사람에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도시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도시에 전근을 신청해놓고 자리가 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언제든 시골생활을 접고 도시에서 멋지게 펼칠 공무원 생활을 꿈꾸며 말이다.
생각해보니 웃겼다. 내가 할 말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사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19년의 시골 생활을 안녕하고 도시로 왔으니까.
그런데.
서울에서의 생활이 길어지자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시골에서 매일 보아왔던 논 풍경과 울긋불긋한 색으로 물들어가는 산이 보고 싶어 졌다. 갑자기 오랫동안 잊고 살아왔던 것에 대한 추억이라도 샘솟은 걸까? 아님 해가 지날 때마다 늘어가는 나이에 대한 변명일까? 자꾸만 도시가 아닌 시골이 보고 싶어 진다.
단순히 단풍으로 물든 가을산을 보고 싶다면 등산하는 것이 최고겠지만, 우리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도 걷고 뛰기가 불완전한 아들을 데리고 가기엔 어려운 미션이다. 그 대신 우리에겐 캠핑이 있다.
아름답게 변해가는 가을의 빛을 두 눈에 담기엔 캠핑만 한 것도 없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저만큼 달려가 있다. 두 번의 여름 캠핑을 휴림에서 보내고, 남편의 자동차 모임 카페에서 추진한 두 번째 캠핑을 다녀오고 나니 어느새 가을이 훌쩍 앞으로 다가왔다.
일, 육아와 글쓰기가 바쁘게 돌아가는 생활에 있다 보니 항상 계절 라이브를 챙겨보질 못했다. 꽃이 만발하고 나서야 봄이구나. 옷장에서 여름 원피스를 꺼내 입을 때 여름이구나. 도로에 낙엽이 무성해질 쯤에야 가을이구나. 나도 모르게 추워서 옷장에 있던 두꺼운 패딩을 꺼내 입을 때 겨울이구나 한다.
딱히 가을이어서 캠핑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알다시피 우리는 캠핑을 처음 해보는 초보 캠핑가족이었고, 그 첫해를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이때만 해도 가을 캠핑이 어떤지 우린 눈곱만큼도 알지 못했다. 그저 매번 캠핑을 다녀오면 당연하게 '이다음 캠핑은 언제 어디로 갈까?'가 되었다. 그리고 그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름이었고, 이제는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에 캠핑을 떠나게 된 것이다. 마치 도미노처럼 말이다.
이번 캠핑은 남편이 전부터 가고 싶다고 했던 장소로 정했다.
바로 홍천에 위치한 블리스 캠핑장이다.
블리스 캠핑장은 잔디가 무척 예쁜 캠핑장이다. 산비탈의 흙길을 따라 고불고불 올라가면 낮은 산자락 안에 숨겨진 보석처럼 자리한 캠핑장이 나타난다. 밖에서는 도저히 그 안에 캠핑장이 있을 거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꼭꼭 숨어있다.
그럼에도 블리스 캠핑장은 이미 캠퍼들에게 추천 캠핑장으로 소문나 있는 곳이다. 특히 아이들이 있는 가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 이유는 아이들을 위한 시설이 많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뀌고 놀 수 있는 트램펄린(일명 방방이)과 모래놀이터는 물론이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들이 잔뜩 모여있는 놀이방이 있었다. 게다가 매년 특정 시기에 맞춰 각종 이벤트를 개최했다. 일 년 중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날인 어린이날이나 핼러윈에 특별한 이벤트를 연다. 이런 이벤트를 개최하는 날짜에는 예약이 치열할 정도로 인기가 많다.
그 대신 주변에 뛰어난 자연환경을 갖고 있지는 않다. 어떤 캠핑장처럼 커다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거나, 사계절 내내 깨끗한 계곡물이 철철 흘러내리는 곳은 아니다. 사이트 주변에 있는 나무들도 조성하면서 새로 심었는지 아직 어린 나무다. 때문에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여름에는 이곳을 사랑하는 캠퍼들도 그늘을 찾아 다른 캠핑장으로 가곤 했다.
그럼에도 이곳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건 개인적으로 잘 관리된 잔디와 한적함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가을 캠핑을 떠나기 전에 준비한 물품이 있었다.
지난 6월의 캠핑이 급격히 더워진 것과 달리 10월에는 급격히 날이 추워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했던 것은 바로 난로였다.
난로도 종류가 무척 많다. 전기로만 사용하는 것부터 가스나 등유 기름을 사용하는 것, 둘 다 사용하는 것, 나무를 사용하는 것까지.
그중에서 우리가 선택한 난로는 등유를 사용하는 석유난로다. 우리가 사용하는 ‘선셋’은 지난 회에서도 소개했지만 6명 이상 사용할 수 있는 큰 거실형 텐트다. 때문에 바로 앞에만 따뜻해지거나 전압이 높은 전기난로는 일단 제외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터질 것 같은 불안감이 있는 가스난로도 제외했다. 그렇게 결정한 난로는 텐트 안의 공기를 전체적으로 데울 수 있는 석유난로다.
다들 알다시피 난방기구는 무척 위험한 용품이다. 그만큼 안전에 유의해서 사용해야만 한다. 전열기구는 과열되지 않게 하고 가스는 누출에 유의해야 하며 등유도 혹시 모를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때문에 필수적으로 일산화탄소 감지기를 구매했다.
계절 때문은 아니지만 구매한 물품이 또 있었다. 그건 주물로 된 샌드위치 메이커였다. 그 안에 빵과 재료를 넣고 눌러 구우면 귀여운 펭귄 모양의 그림이 나오는 그런.
구매할 때는 잘 몰랐는 데 사용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물론 사용법은 무척 간단했다. 재료 넣고 닫고 굽는다. 그러나 처음 써보는 물건이라 원하던 샌드위치 모양이 잘 되질 않았다. 인터넷 사진에서 본 것처럼 그림 모양이 잘 나온 샌드위치를 원했는데 그렇게 만들기가 쉽지가 않았다. 결국 태운 게 반이었지만 갓 만든 샌드위치를 먹으며 신나게 데크 위를 뛰어다니는 아들을 보니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간식으로 가져간 호떡을 거기에 살짝 구워봤는데 그림과 글씨가 너무 잘 나와서 깜짝 놀랐다. 덕분에 우린 따끈하고 귀여운 호떡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앞에는 펭귄 뒤에는 글씨가 새겨진 호떡을 말이다.
캠핑을 시작하면서 놀란 것 중 하나는 다들 캠핑에서 먹는 음식들이 무척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도저히 이건 캠핑장에서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비주얼의 요리까지 말이다.
그에 비하면 우린 이제 겨우 샌드위치 하나 구워 먹는 정도였지만, 앞으로는 캠핑요리에도 신경을 좀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올 때마다 삼겹살과 간편식만 먹을 수는 없으니까.
우리가 블리스 캠핑장을 처음 방문했던 그날은 10월의 첫 번째 주말이었다. 한글날이 화요일에 끼어 있어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여유롭게 쉬다가 오는 일정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날씨는 정말 완벽했다. 지금도 그때만 떠올리면 'perfect!'를 외치고 싶을 정도로. 아직 2년 치 데이터밖에 되지 않지만 10월 7일부터 9일까지 3일간의 날씨는 일 년 중 최고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다. 작년이 그랬고 올해도 그랬다.
과연 날씨만 완벽했을까?
뜨거운 여름이 지나면서 우리 가족에게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아들이 말을 트기 시작한 것이다. 분명 자동차 모임 카페의 첫 번째 공식 캠핑에서만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아이가 아직 말을 잘 못해서...'라는 말을 계속해야만 했었다.
그런데.
나무가 여름 햇살과 빛, 바람과 함께 잎을 틔우고 자라나는 것처럼, 아들도 여름을 나면서 몸안의 움켜쥐고 있던 무언가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항상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에에, 에에.' 하던 아들은 어느새 다양한 단어를 말하기 시작하더니, 두 음절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말이 트이기 시작하니 표현도 다양해졌다. 하루는 늦은 오후, 아들과 나 단둘이서 하던 동네 산책에서 아들은 지나가는 구급차를 보고 흥분하며 말했다.
엄마! 엄마! 아파! 많이 아파!
라고 말을 하더라.
아들은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구급차만 보면 항상 그 말을 했다. 엄마가 아팠다고.
우리 가족이 캠핑을 시작하기 전 겨울. 난 골반염으로 추정되는 고열과 통증으로 병원에 열흘 넘게 입원해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이른 아침부터 병원 응급실에 갔던 게 아들에겐 큰 기억으로 자리한 것 같았다. 그래서 한동안 구급차만 보면 엄마가 아팠다는 얘기를 했다.
아팠던 당시 아들의 나이는 고작 3살. 지금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그때 아들은 병실에 누워있는 날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런 아들이 어느새 커서 말로 그때의 기억을 표현하고 있으니 신기하면서도 미안할 따름이다. 엄마는 또 그때의 널 지켜주지 못했구나 하고.
말을 하기 시작하는 아들.
그런 아들과 함께한 블리스에서의 캠핑은 그야말로 사랑스러웠다.
잔디 위에 지은 우리의 두 번째 집은 새하얗게 빛이 났고, 캠핑 의자에 앉아 바라본 새파란 하늘과 솜털 같은 구름 그리고 푸르고 울듯한 산은 저절로 글을 쓰고 싶어 질 정도로 완벽했다. 잔디 위로 떨어진 낙엽들을 밟는 소리도 무척 감성적이었다. 아들도 캠핑을 즐기는 내내 신이 나서 잔디 위를 뛰어다녔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바로 이런 맛에 캠핑을 하는구나.
지금 누군가 캠핑은 언제가 제일 좋아라고 물으면 난 당연히 가을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가을 중에서도 10월 초, 한글날의 전후가 가장 캠핑을 떠나기에 이상적이다.
옛말에 봄볕에는 며느리를 가을볕에는 딸을 내보낸다는 말이 있다. 알고 보면 굉장히 씁쓸한 말이지만 딸이고 며느리 고를 떠나서 일 년 중 가을볕이 가장 좋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을은 영어로 fall이다. 낙엽의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여 fall이라고 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사랑에 빠질 수밖에(fall in love) 없는 계절이기 때문에 fall이 가을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떠나자.
눈부신 가을날의 사랑스러움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