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캠핑을 갑니다] 아홉 번째 이야기
전 아빠랑 안 친하거든요.
오래전 회사를 같이 다녔던 또래 친구가 했던 말이다. 그 말을 들었던 그날의 기억은,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에도 그때 그녀의 얼굴 표정, 말투, 목소리까지 기억할 정도로 생생하다. 어쩌면 평범한 얘기일 수 있는 그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기억하는 건, 그 당시의 나로서는 절대 할 수 없었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유년시기를 결핍된 감정으로 보낸 난 누구보다도 빨리 아무렇지 않은 척, 평범한 척, 처음 보는 신기한 것에도 놀라지 않은 척, 그런 척을 잘하는 아이가 되어야 했다. 일찌감치 집이 평범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어쩔 수 없는 생존전략이었다. 그래도 타고난 욕심은 또 많아서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부러움도 많았는데, 반대로 자존심은 하늘을 찔러서 부럽다는 말조차도 하지 못하는 그런 아이였다.
그래서 결국 택한 것은 오히려 관심 없는 척하는 거였다. 기대를 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못할 것에 대해서도 실망이 없으니까. 마음속의 감정을 싹둑 잘라내 버리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항상 가면을 쓴 사람처럼 무표정한 아이려고 노력했다. 그때의 난, 절대 ‘나’를 들키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를 내보이면 그 순간 평범한 척 노력해왔던 모든 것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오죽하면 그때 당시 나의 미래상이 아주 무표정한 포커페이스의 도시 여자였을까.
그렇게 난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대신 척은 잘하는 사람이 되었다.
가족이라는 틀을 벗어나 학교와 회사라는 사회를 겪고, 그 안에서 필연적으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의도하지 않은 반복의 지속은 나에게 단 하나의 감정을 불어넣었다.
그건 바로 권태와 관계의 무의미.
삶이 바쁠수록 강해졌다. 과거의 절친들은 지금의 랜선 친구보다 못하게 되었고, 행동반경은 점점 더 짧아져서 가족 이외에는 회사 직원, 간혹 가다가 (자주 가는) 카페 사장님 정도가 대화 상대의 전부가 되었다.
이런 루틴한 일상에서 변할 것은 거의 없을 것 같지만, 작은 회사에서도 해마다 오가는 사람들은 있었다. 그 사람들의 대부분은 말도 몇 마디 못 나눠본 사람들이었지만, 그중의 어떤 이들은 나에게 의미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긴 아빠와 친하지 않다고 웃으면서 말하던 그녀도 의미가 되었으며, 작지만 당당했던 그래서 오히려 커 보였던 언니도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잘해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했던 그런 아이도 있었다.
어쩌다 보니 캠핑을 다니면서도 생각지 않은 인연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었다.
일주일에 5일을 보는 회사 사람들과는 달리 일 년에 딱 한 번 우연을 계기로 보는 사람들이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말 한마디 섞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안에서도 의미가 되어 남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은 그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꽃 피는 사월.
그중에서도 분홍빛 꽃잎이 흩날리는 어느 날이었다.
이번 캠핑은 우리 셋이서 조용하게 그리고 여유 있게 다녀오자는 목적으로 떠났다. 어느새 익숙해진 블리스로 말이다. 서울은 어느새 벚꽃이 만개하는 봄이 되었지만 캠핑장이 있는 곳은 지리적으로 강원도 산 속이기 때문에 추울 것이라는 예상으로 난로도 챙겼다.
이번 집은 햇빛이 잘 들면서 조망도 좋고, 무엇보다 아들이 좋아하는 장난감 방이 가까운 쪽에 지었다. 여느 때처럼 금요일에 떠났기 때문인지 첫날은 조용하게 우리들만의 시간을 갖기에 충분했다.
둘째 날이 되자 1박 2일 일정인 캠퍼들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토요일의 한낮은 이제 봄이구나 라고 생각할 정도로 무척 따뜻하고 포근했다. 여느 때처럼 아들과 나는 모래놀이터에서 모래놀이를 하다가 바로 옆에 있는 방방이(트램펄린)에 가서 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나타났다. 까만 눈썹이 매력적인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는 익숙하게 방방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능숙하게 그 위를 뛰어다녔다.
혼자인 것 같았던 아이는 아들과 나를 바라봤다. 나와 아들 또한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아이가 아들을 보며 귀엽다고 중얼거린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순간 그 아이와 친하게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인 아들도 누나, 형이 있으면 좀 더 즐겁게 놀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자연스럽게 몇 마디 나누게 되었다.
예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캠핑장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대부분(전부는 아니지만) 대화 나누기를 참 잘했다. 그날 처음 만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용케도 말을 잘 받아주는 사람들을 알아보고 말을 늘어놓는다.
짧은 몇 마디 속에서 그 아이가 아빠와 단 둘이 왔고, 엄마는 다른 일이 있어서 못 왔으며, 발레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 그렇구나. 하고 헤어질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아마도 인연이 되지 않았겠지. 하지만 왠지 모르게 아이의 이름이 궁금했다.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
“유하요.”
익숙한 이름이어서 그랬을까. 나도 모르게 다음 말이 튀어나왔다.
“같이 과일 먹을래?”
그리고 우린 정말 같이 텐트 앞에 앉아 과일을 나누어 먹었다. 그 사이 텐트를 다 치신 유하의 아빠가 유하를 따라 우리 집으로 놀러 오게 되었다.
내 말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기에 난 이상하지도 어색하지도 않았지만, 급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건 남편과 유하 아빠였다. 말없이 과일을 먹는 아이들. 어색하게 앉아 있는 두 남자. 왠지 그 상황이 즐거웠던 난 웃으며 과일을 깎았다. 내심 이번 캠핑에서 과일을 챙기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색한 상황이었지만 서로 캠핑이라는 같은 취미를 갖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처음에는 텐트와 장비에 대한 대화가 오갔다. 캠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자연스러운 주제였고 나름 흥미로운 대화였다.
대화는 크게 길진 않았다. 그렇지만 같이 앉아 있던 시간이 자연스러웠기 때문일까? 아들이 유하를 곧잘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 번은 유하네 텐트에 가서 함께 보드게임을 했다. 아들은 아직 어렸기에 보드게임을 할 줄 몰랐지만 그럭저럭 게임이 되었다. 문제는 게임이 끝나지가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날 밤.
다음날 새벽부터 있었던 비예보에 고민하다가 어쩔 수 없이 텐트를 접고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유하 아빠와 낮에 대화를 하다가 나눈 결론이었다. 그래서 저녁을 얼른 먹고 짐을 한참 정리하는데, 먼저 정리를 마치고 돌아가는 유하 아빠와 남편이 번호를 교환했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음을 기약했다.
첫 만남에 대한 기억은 짧지만 강렬했던 모양인지 아들은 그 캠핑 이후로 유하 누나를 찾았다.
“엄마 유하 누나 보고 져요(보고 싶어요).”
둘이 특별하게 유대를 느끼며 놀았던 것 같진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누나를 찾는 아들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서로 번호를 교환했기에 망정이지 나누지 않았다면, 앞으로 누나는 보기 힘들 거야 라는 말을 해야만 했을 터였다. 하지만 아직 별다른 연락은 없었기 때문에 다음에 볼 수 있을 거라고 말해줬다.
연락처가 있으니 언젠가는 보겠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인연은 인연이었던 걸까. 우리는 또다시 블리스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당시 우리는 시댁 식구들과 함께 가족 캠핑을 와 있던 상황이었다. 약속을 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익숙한 자동차가 나타났을 때부터 난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익숙한 두 사람이 걸어 들어왔을 때, 난 너무 반가웠던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를 가고야 말았다. 그때의 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가족들이 놀랄 정도의 밝은 모습이었다고 했다.
원래 알던 사람들도 아닌데 왜 그렇게 반가웠던 걸까.
아빠와 딸, 둘이서 오는 캠핑이 좋아 보였었고, 그런 첫 만남에 대한 인상이 너무 좋았던 것도 있었다. 그리고 셋이서 가족 캠핑을 다니다 보니 오히려 다른 캠퍼들과의 어떤 문화적 유대감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반가웠을까? 정말 그것만일까?
캠핑에서 만났던 인연에 대한 글을 쓰고자 했고 그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회사를 거쳐간 사람들 중에 내 기억 속에 남아있던 누군가 떠올랐다.
그건 또 다른 유하였다.
스물다섯이었던 유하는 책을 좋아했고 글쓰기를 좋아했으며 언젠가는 작가가 되는 게 꿈인 아이였다. 그런 그녀가 나와 참 비슷하다고 느꼈지만 이글에 그런 말은 쓰지 않으려 한다. 성향이 비슷하다는 말로 표현하기엔 그녀와 내가 각자 살아온 나날들이 달랐으니까.
아홉 살의 유하가 색이 뚜렷한 유화 같은 느낌이라면, 스물다섯 살의 유하는 빛이 투명한 수채화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절대 가질 수 없는 인상이었다.
난 그 아이에게 강한 친밀감을 느낌과 동시에 강한 질투 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내가 싫어서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려 했다. 어린아이도 아닌데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질투라니. 난 아직도 스무 살 이전에 나를 꽁꽁 묶어두려 했던 그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 한심했다.
언젠가 기회의 여신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운명의 수레바퀴를 타고 있는 여신은 앞머리가 무성하게 흩날리고 있고 뒷머리는 대머리다. 그리고 한 손에는 흩날리는 천을 또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다가오는 기회를 잡으려는 이에게는 머리카락과 천을 흔들겠지만, 이미 지나간 기회를 잡으려는 이에게는 칼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던 순간부터 줄곧 가져왔던 생각은 이미 지나간 것에 미련을 두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런 다짐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뇌리에 있어서 지나간 인연에 대해 미련을 버리고자 했다.
그럼에도 떠올리는 건 언젠가 있을 기회에 너를 놓치지 않길 위함일까?
오늘도 난 연락 대신 sns에 올라온 사진에 좋아요를 누른다.
하나의 인연은 놓쳤고, 하나의 인연은 이어졌다.
공교롭게도 그 아이들의 이름은 같았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달랐지만.
캠핑을 처음 시작하던 때에는 캠핑을 로맨스이고, 힐링이자 도피처이며, 어쩌면 현실세계의 판타지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래서 현실에서 벗어나 캠핑을 간다는 것은 현재의 나를 잠시 멈춰 놓고 또 다른 내가 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는 반은 맞는 것 같고, 반은 다른 것 같다.
현재의 나를 잠시 멈출 수도 있고, 그 안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것도 나였던 것이다. 내가 나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현실이건 캠핑이건 그건 하나의 삶으로 연결되어 나의 인생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도피처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슬픈 소식일 수도 있겠다. 어차피 그곳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느낀다면.
하지만 난 그런 상상을 해본다.
현실에서 놓친 인연이 캠핑에서는 인연으로 남았고, 어쩌면 그건 또다시 지나간 인연에 대한 기회로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땐 놓치지 않을 거라고.
주)
*이야기 속에 등장한 이름은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