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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 Oct 20. 2020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 있다

안녕 애들아!     


오늘의 제목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 있다”이에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A River Runs Through It)’에 등장하는 유명한 대사인데, 샘은 처음 듣자마자 바로 몰입되는 경험을 느꼈어요. 우리는 분명 모든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가 전혀 안 되는 사람도 종종 만나게 되죠. 그럼에도 사랑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이 말. 샘이 교사 생활을 하면서 가슴 한 켠에 늘 담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대사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샘의 인생작 중에 하나가 되었어요.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대사인데, 영화가 마치 이 대사로 향하기 위해 다양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처럼 느껴지죠. 영화가 어떻게 이 대사로 수렴하게 되는지, 그리고 왜 샘이 이 대사를 좋아하는지 같이 영화를 따라가면서 이야기해보도록 해요.      


이 영화의 핵심은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에요. 다양한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이 영화 내내 물음표를 던져요. 본격적인 얘기에 앞서 영화 배경부터 소개해 볼게요. 시카고대 영문과 교수 노먼 맥클린(Norman Maclean)의 실제 가족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으로, 그가 20세기 초 유년 시절을 보낸 미국 미주리 주를 배경으로 해요. 산과 강 등 광활한 자연을 품은 곳으로 멋진 자연 풍경이 영화 내내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아요. 맥클린 가족과 두 형제의 이야기가 이 속에서 펼쳐져요.     


출처 -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두 형제의 아버지는 마을 교회 목사님으로, 자상하지만 절제를 강조해요. 두 형제는 아버지 밑에서 가정교육을 받는데 그 속에서 절제와 인내의 미덕을 배웁니다. 이는 아버지가 플라잉 낚시를 가르칠 때도 적용돼요. 이는 영화의 중심 소재인데, 가문의 전통으로 내려오는 것이에요. 강 위에 서서 낚싯대를 앞뒤로 휘저으며 낚시를 하는 방식인데, 이때도 아버지는 메트로놈을 옆에 두고 절제된 박자로 낚싯대질을 할 것을 강조하죠. 낮에 아버지와 함께 가정학습을 한다면, 저녁에는 자연 속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려요. 절제와 자유가 균형을 이루는 교육 방식을 보여 줘요.


이 영화의 중심은 노먼과 폴, 두 형제의 이야기예요. 둘은 성향이 완전히 다르죠. 형 노먼은 소위 착한 아들이에요. 성격이 원만하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듣죠.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범생으로 자라게 되는데, 결국 시카고대 교수가 되지요. 어렸을 때 별명이 ‘목사님’이었을 정도로 바른생활 사나이였죠. 형은 교사가 가장 선호하는 학생 유형이지 않을까 싶어요. 성실하고 샘 말씀 잘 듣는 착한 아이.      


출처 -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반면 동생 폴은 자유로운 영혼 그 자체이에요. 틀에 박혀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안정이 아닌 모험을 추구하죠. 종종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저질러 늘 가족들을 걱정하게 만들죠. 이 영화의 핵심이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바로 동생 폴이 대표적인 인물로 그려져요.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들이 영화에 등장해요. 먼저, 절대 귀리죽을 먹지 않는 어린 시절 폴 장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인데, 무슨 이유인지 폴은 절대로 식사로 나온 귀리죽을 먹지 않고 바라만 봐요. 이에 아버지는 귀리는 인류가 오랫동안 먹어온 전통이니, 식사를 마무리하지 않으면 마무리 기도를 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죠. 그 후 몇 시간이 흘러도 동생은 절대 먹지 않고 부동자세로 귀리죽을 바라보기만 해요. 결국 아버지는 아들을 이기지 못하고 식사 마무리 기도로 상황을 정리해요. 관객들뿐만 아니라 가족들 역시 왜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죠. 어린 시절 에피소드를 통해 동생의 성향이 선천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죠. 마을 신문사의 기자가 된 폴은 여전히 위태로운 행동을 이어가요. 당시 인디언 원주민에 대한 차별이 심했는데, 버젓이 인디언 원주민을 애인으로 삼고, 인디언 출입금지 술집에 함께 당당히 들어가죠. 그곳에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오히려 그녀와 격렬한 춤까지 추죠. 또한 위험천만한 도박판에도 서슴없이 참여해요. 이러한 그를 이해할 수 없는 형은 크게 화를 내지만, 그는 도박 빚도 ‘나의 빚’이라고 단호히 말함으로써 형의 조언을 거부해요. 마치 ‘나의 삶’일 뿐이라고 선언하듯이 말이죠.      


출처 -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형과 동생은 각각 ‘시민형 인간 대 예술가형 인간’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인간 유형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어요. 형은 전형적인 ‘시민형 인간’으로, 성격이 원만하고 사회 체제에 순응적이죠. 세상과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고,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대부분의 평범한 시민들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어요. 반면 동생 폴은 ‘예술가형 인간’으로, 자신 만의 개성이 뚜렷하고 체제에 순응하기보다 저항하죠. 사회의 규칙보다는 자신만의 원칙을 우선시해요. 사실 모든 인간은 이 두 가지 성향이 혼재되어 있다고 해요. 다만 어떤 성향이 더 두드러지냐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결정되죠. 샘들의 언어로 바꾸면, ‘모범생 대 문제아’가 아닐까 싶어요.(ㅎㅎ) 실제로 동생이 예술의 경지(?)에 오르는 장면이 등장해요. 명문대로의 유학을 택한 형과 달리, 동생은 플라잉 낚시를 너무 사랑해 고향에 남게 되는데, 점점 자신 만의 낚시 방법을 습득하게 되고, 아버님의 가르침을 넘어 예술의 경지로 낚시를 향유하는 수준이 돼요.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 동생이 마치 강물과 하나가 된 듯 낚싯대와 사투를 벌이다가 결국 월척에 성공하는 장면인데, 이를 지켜본 형은 이렇게 말하죠.


“그 순간 나는 명백히 깨달았다. 지금 ‘완벽함’이라는 것을 목격했다는 것을. (그는) 모든 법칙에서 벗어난 예술 작품 같았다.”


동생은 결국 자신의 인생과도 다름없는 플라잉 낚시에서 예술의 경지에 오르게 돼요. 아무리 아버님의 절제된 가르침이 있어도, 자신에게 편한 방식을 찾게 됐고, 더 나아가 예술로 승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죠.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일삼는 그였지만, 그 순간만큼 예술 작품 그 자체였어요. 혹시 동생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자신만의 법칙으로 자신의 삶이라는 예술을 창조해가는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어쨌든 아무리 문제가 많은 사람이어도 찬란히 예술 작품처럼 빛나는 측면이 있다고 말해주는 장면 같았어요.


출처 -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이후 갑작스러운 동생의 죽음 통보 장면이 등장해요. 도박꾼에 의해서 총 맞아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죠. 그렇게 동생은 죽음마저도 이해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이뤄져요. 자신 만의 방식으로 불꽃같은 삶을 산 동생의 이야기가 더욱 극대화되는 죽음이었죠. 그다음 장면은 목사 아버지의 마지막 교회 설교예요.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가득히 묻어나는 그의 설교에서 바로 오늘의 주제가 등장해요.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 있다.”


아버지는 왜 본인의 마지막 설교를 이 말로 마무리했을까요? 어떤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었던 걸까요? 혹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자식을 자기 뜻대로 변화시키려고 한 순간들을 후회하는 걸까요? 혹은, 내 이해의 한계를 넘어선 순간에 사랑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일까요? 아니면, 그저 완전히 사랑했던 자식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일까요? 아무튼 이 말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 그리고 존중이 느껴져 저절로 힐링되는 말임에 분명한 것 같아요. 자식을 누구보다 사랑했지만 먼저 보내게 된 아버지가 세상에 보내는 메시지라 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다른 행성에서 온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고, 좀 더 포용적인 마음을 갖고 다양한 삶을 존중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게 아닐까 생각해요.


교사 생활을 하다 보면 순간 이 말에 반대로 행동하고자 하는 충동에 빠지기도 해요. “(학생이) 이해는 되지만, 사랑할 수 없다.” 교사 경력이 늘어나다 보니 사실 학생의 행동이 크게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고, 대부분 어떤 유형에 속하게 되는지 이해가 돼요. 하지만 샘도 사람인지라 안 좋은 감정에 휩싸여 사랑은커녕 마음속으로 증오(?)할 때도 있어요. ‘혹시 나를 무시해서 하는 행동은 아닐까? 내 권위에 도전하는 행동 아니야? 의도를 가지고 나를 공격하는 행동 아닐까?’ 등 한없이 여러분에게 마음의 문을 닫는 생각들을 하곤 하죠.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샘의 낮은 자존감이 원인일 때가 많았어요. 사실 여러분의 이해가 안 되는 행동들은 샘과 무관하고, 단지 오래 축적되어 온 그 아이의 성향일 가능성이 높죠. 때로는 깊은 관심과 사랑을 요구하는 징후적 표현일 때도 있고요. 마음의 공간이 작아질 때마다 이 말을 생각하며 작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 있다.” 물론 여러분을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 마음속 깊이 여러분을 믿고 존중해주는 마음인 것 같아요. 그게 샘에게 있어 완전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요. 다름을 인정하고, 아이만의 스토리를 파악해 존중하는 자세. 참 어렵지만 계속 연습할 가치가 있는 마음인 것 같아요.


출처 -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이 영화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랑한’ 사람을 모두 떠나보낸 노인이 된 형이, 강 위에서 플라잉 낚시를 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돼요. 형을 다음과 같이 말하죠.      


“결국 모든 것이 하나로 융합된다. 흐르는 강물처럼. 대홍수로 만들어진 강은 아주 먼 옛날부터 바위를 타고 흐른다. 어떤 바위는 영겁의 세월 동안 비를 맞았다. 바위 아래 말씀이 있고 말씀의 일부는 그들의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했든 모든 과거는 하나의 역사가 되어 강물처럼 유유히 흐르죠. 그리고 그 안에는 지구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데 녹아져 흐르죠. 이러한 강의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시야를 현재에서 인류 전체로 확장시켜요.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진 인간이 살았고, 모두 말씀이 되어 강을 형성하고 있다고. 이렇듯 인간의 다양성이란 시공을 초월하는 규모로 아득하죠. 영화 속 흐르는 강을 보면서, 쉽게 편견에 빠지고 편을 나누려고 하는 샘 마음이 얼마나 작았는지 저절로 반성하게 되네요. 가치 없는 이야기는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은 강의 맑은 소리가 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네요.            


여러분들도 이 대사가 도움이 되었으면 해요. 혹시 친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마냥 싫어하지는 않는지, 친구가 나와 다르다고 마음의 문을 너무 일찍 닫은 것은 아닌지, 친구의 다름을 틀림이라고 믿은 것은 아닌지 등을 돌아보면서 말이죠. 섣불리 판단하려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마음을 열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연습을 좀 더 해봐요. 포용적인 마음을 가질수록 삶이 더욱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될 거예요.      


마지막으로 인디언 출입금지 식당에서 형이 한 명대사로 마무리할게요.


“촛불을 밝혔으나 이 밤을 넘기지는 못하리. 하지만 적군과 아군에게 사랑스러운 빛을 비춘다.”


적군과 아군을 공히 비추는 촛불처럼, 지금 여러분의 작은 노력이 좀 더 포용 사회로 다가가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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