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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A Jul 29. 2024

할머니의 쿠키

설탕

5년 전, 이곳 애리조나 챈들러로 이사오던 날, 한국에서 도착한 이삿짐들을 내리고 있는데 까맣고 똘똘하게 생긴 개 한마리를 데리고 할머니 한 분이 다가오셨다.

"Hi, I am Barbara. Nice to meet you!
We moved here 6 months ago, and I have been waiting for the new neighbor!
And here you are, I finally meet you~"


명랑하고 유머감각 가득한 Barbara 할머니는 미국에도 정붙이고 살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해주셨다. 크리스마스엔 항상 맛있는 땅콩버터 쿠키를 구워 나누어주셨고, 새해 첫날엔 와인파티에 초대해 주셨고, 동네 수영장에서 만나면 앙증맞은 튜브 동동 띄워 앉아 맥주도 나누어 주셨다.


내가 일이 잘 안풀린다고 투덜거리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You know? Shit happens. You are doing just fine."


그러면,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들어오곤 했다.


그런데 어제 아침, 남편인 Peter 할아버지로부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받았다. 약 1년 전부터 혈액암으로 투병생활을 하셨지만 근래까지도 씩씩하게 치료를 잘 받고 계셨는데... 엊그제는 쿠키에 필요한 설탕도 빌려드렸는데... 


나는 설겆이를 하다 멈추고 멍하게 한동안 서 있었다. 차고를 열고 앉아 가을이 오기를 기다리던 그 모습을 더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내가 만든 뜨게 지갑을 받아들고 'You are so talented!'라고 해주시는 그 말씀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가 더 이상 가족들과 둘러앉아 추수감사절을 함께 보낼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이상 Peter 할아버지 옆에 앉아 계시지 않을거라는 사실이, 아랫층에서부터 들려오던 바가지 긁는 소리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엊그제 나눈 설탕이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이었다는 사실이, 그녀가 어제 아침 이후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녀가 이제 무(無)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서.




직면하기 어려운 두려움.

하지만 거실 한복판의 코끼리처럼 도저히 못 본 척, 모른 척 지나갈 수 없는 것,

그것은 죽음에 대한 생각,

사랑하는 이들이 무(無)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상상


미국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와 독서모임을 시작했을 때, 그녀와 나는 부모님과 오래,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음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그리고 언제나 결론은 이러했다.


부모님과 함께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잘하자.
공히 지지가 필요한 사춘기의 자녀와 노년의 부모님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그럴려면 우리부터 일단 잘먹고 잘자고 건강챙기자.


그리고 또 이런 이야기도 나누었다. 떨어져 있는 사이, 한국에서 부고가 온다면? 

급히 항공권을 구하겠지.

공항으로 달려가겠지.

보안검색대를 지나고, 대합실에서 탑승을 기다리고, 경유하는 시간을 보내겠지.

태평양을 건너는 비행기 안에서 발을 굴려 본대도 정해진 시간이 지나야 한국에 도착하겠지.

그럼 나는 이 건너뛸 수 없는 이 모든 과정에서 어떤 마음일지.

대합실의 이방인을 붙들고 울건가, 주저앉을 건가.

각자 사연을 가진 많은 승객들 틈에 하나로 묻혀서 갈 뿐이겠지.

그리고는 다시 좀 전의 결론으로 돌아간다. 도돌이표 노래처럼.


부모님과 함께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잘하자.
공히 지지가 필요한 사춘기의 자녀와 노년의 부모님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그럴려면 우리부터 일단 잘먹고 잘자고 건강챙기자.




가끔 창문을 열 때마다 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Barbara 할머니가 태우시는 줄담배가 미웠던 날,

와인 파티에 초대해 주셨는데 가지 못했던 새해 첫날,

뜨게 지갑 색에 맞춰 떠드린다 약속하고 아직 완성하지 못한 뜨게 가방...

그리고 그 외에 많은, 나중에, 나중에라고 미뤄둔 많은 말들과 해드리고 싶었던 것들이 머릿 속으로 마구 쏟아져 내렸다.

늦은 저녁시간이지만, 혹시라도 Peter 할아버지를 마주칠 기회가 있을까 싶어 밖으로 나갔다. 현관 바깥의 모든 것은 그대로다. 그녀가 매일 채워두는 새 먹이통도 새 물그릇도, 그리고 그녀가 가꾸던 꽃나무들도...

때마침 할아버지가 차고문을 열며 쓰레기통을 밀고 나오셨다.


I'm so sorry to hear your loss...
I feel numb. I don't feel anything now. But, she passed away in my arms yesterday.
I am sure that she had a good life.
She was loved and she loved so many people.
I am happy that I could be there for her when she needed me.
 
그녀는 마지막까지 그녀의 일상을 살았어. 내 생각엔 그게 그녀의 목표였던것 같아.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으로 살다 가는 것.

So, I am happy for her.


그녀가 행복했고, 남겨진 가족들이 그녀가 행복했음으로 이렇게 위로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남은 시간을, 온갖 기구에 의존해 면회 가족수도 제한되고 시간도 통제되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보내지 않고, 마지막날까지 쿠키를 굽고, 딸과 수다를 떨고, 남편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참 다행이라고 말씀하시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이 시간을 마주하는 새로운 안목이 생겼다. 어둑해지는 시간, 눈에는 눈물이 맺혔지만 웃고 계시는 할아버지를 꼭 안아드리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날, 한달에 한번 하는 부모님과의 영상통화가 있었다.

중복이라 닭 사다가 고아 드셨고, 비싸긴 해도 자두가 달달하니 맛나다고 하시고, 오도카니 에어컨 앞에 앉아 두손들어 손가락 하트를 흔드시는 부모님과 수다 삼매경.


"요즘 뭐가 제일 재미나요?"
"요즘 올림픽하잖아. 그거 보느라 재밌어. 어제 한국은 펜싱 금메달따고, 또 미국은 수영에서 금메달따고 그라드라. 느그는 올림픽 안보나?"
"아! 맞네~ 봐야겠네~"


영상통화를 마무리하고 바깥을 내다본다.

Barbara할머니처럼 생의 마지막날까지도 쿠키를 굽는 내가 될 수 있기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두려워하느라, 평안한 오늘을 눈치채지 못하는 미련한 이가 되지 않기를 희망해본다.


Barbara할머니,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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