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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A Sep 27. 2024

아.친.엄_Part 1

겨울, 일요일, 작지만 따순, 우리집이 오랫만에 맘에 들던 날.


군고구마가 너무 맛있다며,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만, 더 격렬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나를 불러낸 아친엄_아들친구엄마_가 있었다. 그녀는 공인중개사였다. 


입고 있던 후줄근한 복장 위로, 두껍고 긴 패딩을 둘러 입었다. 군고구마가 먹고 싶었다기보다는, 우리집 방바닥보다 그녀의 사무실이 별일이 생길 가능성이 더 지 않겠나 싶어서였다. 물도, 우유도, 김치도 없이 꾸역꾸역 입으로 욱여넣는 고구마같은 일상에, 사이다같은 일탈 한모금을 기대했다. 


잘 익어 끈적살결의 달달한 군고구마에 달달 씁쓰그리한 믹스커피 한  곁들이 나니, 사무실이 답답해졌다. 

그나저나 영어학원 안 차려요?
우리 심심한데, 학원자리나 한번 구경가볼래요? 봐야 또 안목이 생기지. 나중에라도 학원할라면.


월급강사 그만하고 영어학원차리면 잘될거라는 말은 귓구녕에 차고도 넘치게 들어온 얘기였으나, 학원자리 구경해보자는 말은 처음 들어봤다. 귀가 솔깃했다. 구경은 재밌겠는데요? 아친엄은 바로 컴퓨터 자판을 탁탁탁 두드려보더니 근처에 학원매물이 몇개 나온게 있다며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도 얼른 일어섰다.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았다.


그녀가 모는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내가 자전거로 자주 가는 공원 근처 아파트 대단지 안에 위치한 상가였다. 자전거로 지나가보기만 했지 이렇게 멈추어보기는 처음이다. 쌩하고 지나갈때는 몰랐는데 생각보다 더 낡고 늙은 상가 안으로 그녀가 성큼성큼 들어섰고 나도 쭈삣쭈삣 따라 들어섰다. 3층이라고 했다. 각종 간판이 촘촘히 붙은 계단을 따라 3층에 도착하니, 빨간 망속에 잔뜩 담긴 양파들이 이곳저곳에서 발에 채인다. 학원자리로 매물이 나온 곳은 중국집과 세탁소를 마주하고 있는 수학교습소였다. 안을 들여다보니 수업 준비를 하고 있는 분이 보인다. 사실은 지금은 그 실내가 어떠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양파들이 발에 채일 때, 비록 구경일뿐이지만, 이미 내 맘 속에서  자리는 탈락이었다. 자장면 너무 사랑하지만, 춘장 냄새 매일 풍기는 영어학원은 상상하기 싫었다.


그 상가를 나와 도보로 얼마 가지 않아 또 상가가 하나 나왔다. 상가 바깥에 학원 간판들이 빼곡하다. 무슨무슨 영어라고 적힌 간판만 3개를 찾았다. 작은 아파트 상가에 영어학원만 3개라니... 안으로 들어가보기도 전에 터줏대감들과 경쟁할 생각에 겁부터 덜컥 났다. 아 맞지. 구경이지. 구경이야. 구경만 하는거야.


학원매물이 있다는 2층으로 올라가니, 소아과와 태권도, 그리고 바이올린 교습소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구경할 학원자리가 소아과 옆에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작은 공간이 2개, 큰 공간이 하나, 여기는 일찍 온 아이들 숙제하며 기다리면 좋겠고, 여기는 영어독서하는 공간이면 좋겠고...어느새 이런 상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 속내를 읽었는지 어쨌는지 아친엄이 말했다.

여기 어때요? 난 여기 좋다.
여기 소화과가 엄청 잘되서 유동인구도 많대요. 여기 보증금 2000만원에 월세 50만원, 권리금은 500만원이라는데, 나는 이거 너무 아깝다. 그냥 구경만 하기엔.


보증금 2000만원, 권리금 500만원... 합리적인 보증금과 월세와 권리금에 대한 아무런 감도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때 나는 전세대출금 상환에 마음이 좆길때였다. 코 앞에 있는 시원한 편의점 맥주를 두고, 돌고돌아 더 저렴한 맥주 찾아 삼만리하던 매우 궁상스러울 때였다.

오늘은 구경만 할께요.


돈이 어딨어.

군고구마 먹으러 나온건데,

상가 계약은 무슨.

구경하다가 덜컥 티셔츠는 살 수 있어도

구경하다가 덜컥 상가 계약이 말이 되?


다음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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