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그 애 02화

2. 서울에서 온 애

by 차태주

아주 세련된 청바지에 깔끔하고 화사한 코트는 영락없는 서울 애라는 걸 시사하는 듯했다.

마침 봄이었다. 그 애가 옆집으로 왔던 날.
그 애는 인심 좋고 상냥한 옆집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녀다. 원래 서울 비싼 동네에서 살다가, 아버지의 사업 부진으로 가세가 기울어 어머니와 함께 시골로 내려온 것이다. 그 애를 처음 본 건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 꽃샘추위가 옅어지기 시작한 3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한가한 주말 오후. 기분 좋은 일요일의 자유를 마지막까지 만끽하려 대문 밖으로 나갔다. 점심시간에 방영하던 주말 만화영화도 끝났고, 송해 할아버지의 노래자랑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TV도 볼 게 없었다. 이제 3개월 된 백구 해피는 쬐깐한 주제에 팔랑거리며 잘도 뒤따랐다. 꽃샘추위의 여파로 엊그저께까지 꽤 싸늘했던 날씨는 어느새 햇볕의 온기가 더해져 포근한 바람으로 이마를 훑고 지나갔다.

대문을 나와 회관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지 않고, 집 뒤쪽 골목을 돌아 동산으로 향했다.

마을 뒷동산은 조그만 언덕 수준의 산이었지만, 당산나무가 서 있는 가장 높은 곳은 마을이 내려다보일 정도의 높이는 됐다. 흰색 천이 가미된 금줄이 쳐져 있는 당산나무는 곧게 뻗어 나란히 서 있는 소나무 두 그루였다. 어울리진 않지만, 당산나무가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을 꼭대기라고 불렀다. 꼭대기를 넘어서면 저어 멀리 보이는 소나무 숲까지 줄기가 이어지며, 왼편으론 들깨나 고추 같은 작물들을 키우는 작고 허름한 밭들이 삐뚤빼뚤하게 들어앉았고, 그 사이로 종종 찰옥수수나 조그만 대추나무가 보이기도 했다. 동산 꼭대기서부터 뻗어난 줄기 오른편으론, 소나무 숲의 경계를 이루는 곳까지 키 작은 잡풀들이 섞여 자란 잔디밭이 이어졌다. 그 잔디밭은 동산 줄기를 따라 조금 경사지긴 했지만, 대여섯 명이 축구를 할 수 있을 만한 크기는 됐다.

그곳에 가는 걸 좋아했다.

겨울을 지내고 봄부터 파랗게 힘을 내기 시작한 야생 잔디는 4월로 들어설 즈음이면 맨발로도 뛰어다닐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워져 있었다. 나중에, 그 생명력이 한창때일 한여름이면 그곳에서 축구를 하거나 풀썰매를 탈 것이었다.

잔디밭 가에는, 그때쯤 활짝 피기 시작한 계란꽃이 저들끼리 파벌을 나누어 한 다발씩 뜨문뜨문 자라났고, 거기서부터는 여름이면 만발할 강아지풀이나 피 같은 온갖 잡초들이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해 마을로 내려가는 샛길을 열었다. 잡초들이 자란 그 샛길 옆에는 아직 어려서 열매가 영 시원찮은 뽕나무 몇 그루가 있기도 했는데, 그들 사이에 제법 크고 오래된 참나무가 한 그루 있는 것이다.

기력이 쇠퇴하기 시작한 뒷동산의 그 늙은 참나무는 그야말로 보물창고였다. 각종 사슴벌레와 하늘소와 장수풍뎅이가 그 나무의 수액을 먹으러 즐겨 찾았던 것이다. 가장 흔한 놈은 돼지집게라고도 불리는 넓적사슴벌레였고, 장수풍뎅이도 자주 보였다. 가장 귀한 놈은 뿔이 멋지게 휘어진 톱사슴벌레였다. 놈은 정말 간혹 보였는데, 놈을 잡은 다음날이면 학교에서 그놈을 구경하러 옆반의 옆반에서까지 애들이 몰려올 정도였다. 종종 크고 무서운 장수말벌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곤충 잡길 좋아하는 머심애한텐 그놈마저도 좋은 사냥감일 뿐이었다. 놈이 나타나면 채집망을 가지러 급히 집으로 뛰어가곤 했으니까. 날이 조금 더 지나 더위가 시작되면 곧 그 참나무에 벌레들이 모여들 것이었다.

겨울을 지낸 참나무가 봄의 이파리를 돋아내기 시작할 즈음이면, 아직 이른 시기지만 뒷동산을 올라가 조그만 날벌레들이나 꼬이는 그 나무를 괜히 훑어보곤 했다. 바램과 달리 역시나 사슴벌레가 출현하기엔 이른 시기. 못내 아쉬웠던 꼬마는 나무를 발로 차 보기도 하고 작대기를 주워서 가지를 이리저리 두드려 보기도 하지만 역시나 소득은 없다.

문득 해피를 찾으니 저쪽에서 여기저기 냄샐 맡고 뛰어다니며 저 혼자서도 잘 놀고 있다.

나뭇가지를 관찰하느라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니, 먼 데서 제비 몇 마리가 분주하게 날아다니는 것이다. 해마다 찾아와 터를 잡는 녀석들이 올해도 어김없이 어느 복 많은 인가에 집을 지으려 지푸라기와 진흙을 나르고 있을 터였다.

내친김에 들고 있던 한 자가량의 작대기를 갖고 돌아가기로 했다. 소득은 뒷동산의 출처를 알 수 없는 어느 나무작대기.


뒷동산에서 내려와 집 앞 골목에서 해피와 놀고 있을 때였다.

처음 본 그 애는 여장부 같았다. 웬 서울말을 곱게 쓰는 기집애가 선뜻 다가와 의젓하고 씩씩한 말투로 같이 놀자고 하는 것이다.

“안녕, 네가 옆집 애구나? 만나서 반가워, 너도 열두 살이라며? 우리 동갑이야, 앞으로 잘 지내자”

서울 애들은 다 이런 걸까. 동화책이나 만화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대사를 현실에서 말하는 애를 처음 본 것이다. 그땐 그게 얼마나 멋있어 보이던지, 그 카리스마에 눌려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어... 안녕”

당황하여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온화한 봄의 햇살에 그 애의 흰 피부가 반들거렸다. 뒤로 묶어 정리한 긴 머리는 제가 한 건지 미처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 몇 올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려와 새침한 듯 단정했고, 아주 세련된 청바지에 깔끔하고 화사한 코트는 영락없는 서울 애라는 걸 시사하는 듯했다.

같이 놀던 해피는 그 애 발치로 다가가 냄새를 맡기도 하고 그 애의 구두를 핥기도 하면서 연신 꼬리를 흔들어댔다.

“나.. 나는 이 집에 살아...”

우리 집을 가리켜 보였다.

“응, 알아, 그저께 이사 올 때 너 봤어, 난 이 집에 살아,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알지?”

제 집을 가리켜 보이는 그 애 목소리는 시원스럽고 명랑했다. 내 눈을 똑바로 보며 가볍게 웃음 짓는 그 눈빛에서 자신감이 흘렀다. 처음 본 사이에도 어쩜 이렇게 말을 잘하는 걸까. 이런 애를 감당할 수 있을까.

“어, 알아...”

“잘 됐다, 지금 뭐 해? 우리 같이 놀자아, 괜찮다면 나 동네 구경 좀 시켜줄래?”

그냥 집 안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치만 그건 그 애를 무시하는 처사일 테니깐,

“어, 근데... 나 엄마가 밥 먹으러 오라고 해서...”

맞잡은 손가락들을 꼼지락대며 그 애 눈치를 보니, 곧 그 애가 의아해하는 표정이 되는 것이다.

“응? 지금? 아까 점심 안 먹었어? 아니면 저녁을 일찍 먹는 거야?”

아차, 늦은 오후라는 걸 생각 못한 거다. 나름 논리적인 변명을 대며 현장을 빠져나갈 궁리를 했던 거지만, 그 애의 논리에 막히고 말았다. 영리한 애다.

“아... 내가 아니고, 우리 해피”

급한 대로 해피를 가리켜 보였다. 적절한 임기응변이었다.

녀석은 어느새 뒷발로 서서 그 애에게 기대어 핵핵거리고 있었다. 저런 눈치도 없는 똥개 같으니라고.

“얘 이름이 해피야? 안녕 해피, 너 정말 귀엽다”

그 애가 쪼그려 앉아 해피를 쓰다듬었다.

그러니 저 주인도 버릴 똥개 같은 해피가 더욱 신나서는, 그 애 손을 핥고 끙끙거리더니 바들바들 떨기까지 하는 것이다. 한심한 녀석.

“해.. 해피야, 밥.. 밥 먹으러 가야지”

어색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애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잠시 해피와 놀던 그 애가 이쪽을 올려다봤다. 그 애의 표정은 호기심과 흥미로 가득 차 있었다. 큰일이었다. 설마 집에 놀러 오겠단 말은 하지 않겠지.


숟가락을 떨어트렸다.

“야아가 밥 먹다 와이라노”

엄마가 밥풀이 듬성 묻은 숟가락을 방바닥에서 주워, 내 밥그릇 옆에다 놓았다.

할아버지는 7시에 방영하는 저녁 뉴스에 눈을 고정한 채 찌개를 뜬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고 계셨고, 그 옆에서 밥숟갈을 뜬 아빤 못마땅한 표정으로 흘깃 이쪽을 쳐다봤다.

“와? 와 절카노? 돌 씹읐나?”

건너편에서 할머니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으셨다.

그 순간,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 주는 것이다.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어 서러워졌다.

“아... 나는 혼자 가고 싶은데”

밥숟갈을 입에 넣던 아빠가 동그란 눈으로 돌아봤다.

“와? 같이 학교 다니면 좋지 와 그라노, 집도 같은데”

엄밀히 말하면 집은 다르다. 옆집이다.

“그냥, 나는 혼자 다니는 게 좋아”

쭈뼛거리며 대답하니 할아버지가 끼어드셨다.

“뉘 애 말하는 기고?”

“와, 옆집 딸래미 있다 아입니꺼, 이자 여어 학교 다니야지예”

“아, 정미 가아 딸래미?”

그러면서 가족들은 밥과 찌개와 반찬을 맛있게도 먹는 것이다. 입맛이 떨어져 밥숟갈 놓고 있는 외로운 마음은 아무도 몰라준 채.

TV에선 아나운서 아저씨의 무심한 목소리가 얄밉게 흘러나왔고, 둥근 원탁의 밥상엔 숟가락과 젓가락이 번갈아 오르내리며 연신 둔탁한 소리를 냈다.

“을른 무우라, 을른!”

내 의견에 대해 아직 아무도 대답이 없길래 입을 삐죽 내밀며 잠자코 있으니, 할머니가 재촉하시는 것이다.

“놔두이소 어머이, 아아 버릇 나빠집니더”

옆에서 엄마가 눈을 흘겼다.

이윽고 할아버지가 의견을 내셨다.

“밥상 앞에서 그러고 있는 거 아이라! 내일부터 같이 핵교 댕기믄 되겄구마, 큼!”

짜증이 나 몸이 배배 꼬였다.

“아... 아아, 싫어요, 아!”

“쓰읍!”

울먹이는 소리로 떼를 쓰니, 아빠가 인상 쓰며 돌아봤다.

“아이가! 저눔 보래! 아이가!”

할머니도 눈썹을 찌푸리며 거드셨다.

이 집안에 내 편은 아무도 없다. 그 사실이 짜증 났지만, 일단은 한발 물러나 숟가락을 들었다. 밥은 먹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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