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 시절 그날, 그 12살짜리 소년은, 그 애가 기다린다는 친구의 농담이 신경 쓰여 부리나케 터미널로 향했던 건 아닐까.
가끔 선생님이 종례를 하지 않는 날이 있었다. 아마 교무실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거나 하는 날이었을 거다. 추측하기론, 그날은 다음 달인 5월에 갈 소풍 장소에 관한 회의가 있었던 거 같다. 종례를 하지 않은 날은 학교가 너무 일찍 마친 거 같은 이상한 기분마저 들기도 했다. 기회였다. 그 애보다 먼저 교실을 나설 수 있다면, 그 애에게서 도망칠 수 있다.
마지막 6교시가 끝나는 종이 울리자 선생님은 우리에게 그저 집에 조심히 들어가라는 말씀만 남기곤 교실을 나가셨다.
5학년 아이들이 모두 일제히 교실 밖으로 쏟아져 나가며 복도가 어수선해졌다. 그 사이를 교묘히 섞여들어 이번엔 기필코 그 애를 피해 달아나겠다 다짐하며 주위를 살폈다.
3반과 조금이라도 더 떨어진 뒷문을 통해 복도로 나가 신발장의 신발을 챙겼다. 키가 큰 편이니 허리를 조금 숙이면 어수선한 아이들 사이에 섞인 날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아이들과 섞여 5학년 반이 있는 3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는 데 성공했다. 곧 건물 밖으로 나가는 현관이 저 앞으로 다가올 것이었다. 이제 정말 도망칠 수 있는 것이다.
“야! 여기 있다, 찾았어! 내가 찾았어!”
등 뒤에서 별안간 울리는 고함소리에 놀라 흠칫 뒤돌았다.
웬걸, 아이들 사이에서 3반 머심애 하나가 내 가방을 붙잡고는 뒤쪽으로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얼이 빠져 잠시 멍하니 있으니, 멀리서 그 애가 활짝 웃으며 손 흔드는 게 보였다.
“쟈아가 너 찾아”
녀석이 날 돌아보더니 그 애를 가리켜 보였다.
이 얼탱이 빠진 상황이 황당하기 그지없어, 그 애 그리고 날 꼬바른 이 못돼 쳐먹은 머심애를 번갈아 쳐다보는 거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곧 그 애가 배시시 웃으며 아이들 사이를 헤집고 다가왔다.
“넌 대체 못 하는 게 뭐니?”
그 애의 칭찬에 놈이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무슨, 헤헤, 니가 내 우유 당번 도와줬다 아이가, 친구끼리 도와야지”
놀고들 있네.
“어휴, 그거 조금 도와준 게 뭐라고, 히히, 아무튼 고마워, 내일 보자”
나를 가운데 두고 둘이 인사를 나누더니, 곧 3반 머심애가 아이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 애와 친한 3반 너 이 자식. 니 얼굴 봐뒀다, 두고 보자.
저 멀리 사라지는 놈을 째리고 있자니, 곧 그 애가 내 손목을 잡아끄는 것이다.
“버스 놓치겠다, 얼른 가자”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가 이런 기분일까. 언제부턴가 그 애는 굳이 내 손목을 잡아끄는 버릇이 생겼다. 처음엔 횡단보도를 건널 때만 잠깐 그러더니, 나중엔 아주 아침부터 만나기만 하면 손목부터 잡아챈다. 그 모습을 엄마와 아빠도 분명 봤을 텐데 왜 도와주지 않는 건지 뒤돌아보면, 아주 흐뭇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먼발치서 우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정녕 날 이 애에게 팔아넘기려는 게 분명하다.
곧 그 모습을 본 주위 머심애들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낯이 뜨거워져 고개를 푹 숙여야 했다. 그 와중에도 그 애는, 주위는 조금도 아랑곳 않고 그저 제 갈 길에 날 끌어들이는 데만 여념 없었다.
“오늘 학교 어땠어? 수업은 잘 들었니? 친구들과는 사이좋게 지냈지?”
이봐 이 기집애야. 그런 건 우리 엄마나 돼야 물어보는 거라고. 저도 이제 겨우 12살이면서 동갑인 날 무슨 한참 어린애 취급하는지.
시끄럽고 자꾸 귀찮게 구는 그 애와 같이 다니기 싫었다. 하지만 어쩔까.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매번 이렇게 잡아내고야 마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모든 걸 포기한 채 저에게 내려질 처분만을 기다리는 불쌍한 돼지처럼 목덜미를, 아니 손목을 붙잡힌 채 그 애에게 이끌려 다닐 수밖에.
그 애에게 손목을 붙들려 순순히 끌려다니는 건 다른 머심애들에게 놀림감이 되기 십상이었다.
한 번 진지하게 말해 보는 게 어떠냐고?
하, 그게 통했다면 벌써 그 애한테서 벗어나고도 남았지. 한 번은 그랬다가 코가 납작해지도록 혼이 났으니까.
“너랑 같이 다니기 싫어!”
그 애한테 잡힌 손을 뿌리치며 나름 비장하게 말했다.
갑작스런 선언에 터미널로 앞서 걸어가던 그 애가 뒤돌았다. 그 애는 눈이 커지더니 잠시 의아해하는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그윽한 미소를 짓는 것이다.
자, 말해봐라. 네가 뭐라고 주장하든 다 받아쳐 줄 테니.
“그러니? 그것참 아쉬운 얘기구나, 나는 너와 같이 다니는 게 좋은데,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그런데 혹시 내가 잘 못 한 게 있다면 그게 뭔지 얘기해 줄 수 있겠니?”
비장한 각오로 맞서겠다 다짐한 터였지만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되려 숨이 막혔다. 그 세련된 서울의 말로 조곤조곤 차분히 얘기하는 그 애의 언변을 도저히 버텨낼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천하의 무뢰한이 된 기분이었으니까.
“어? 아... 그게, 그러니까...”
대체 그 소심한 머심애가 이 친절하고 교양있는 숙녀에게 네가 너무 싫더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아 알겠다, 그동안 내가 너무 귀찮게 굴었지? 나는 그냥 너와 잘 지내고 싶어서 그런 건데,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이제부턴 나와 같이 다니지 않아도 돼, 나는 아주 많이 슬프겠지만, 내 걱정은 하지 마...”
그리곤 저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던 걸로 기억한다.
“아, 아니라! 그게 아니고... 가.. 같이 다니자! 나도 너와 잘 지내고 싶어.. 싶구나!”
그만 당황하여 벌벌 떨면서 그 애의 서울말을 어설프게 따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만족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손이 아니라 손목이었다. 그게 그 교활한 기집애가 어수룩한 머심애를 다루는 방법이었다.
어쩌다 현우 집에 놀러 가기로 한 날이면 그 애를 피할 수 있었지만, 매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자랑 손 잡으면 아아 생긴다고 하던데, 느그 결혼할 끼가?”
현우가 BB탄 총을 쏴, 창문 너머 아파트 외벽에 쓰인 숫자를 맞췄다.
그날도 학교를 일찍 마친 한가한 토요일이었다. 집에 일찍 들어가면 그 애와 놀아야 될 게 뻔했기에 최대한 현우 집에서 죽치고 있을 작정이었다.
“니 아직도 그걸 믿나? 손 잡는데 어떻게 아아가 생기노, 생각을 해봐라”
놈에게서 총을 건네받아 창문 너머를 겨눴다.
“확실하나? 느그 아빠가, 느그 결혼 시킬라고 일부러 그러는 거 아이가?”
놈이 음흉하게 빈정거리는 것이다.
현우는 영악한 놈이다. 손을 잡는데 아기가 생길 거라고 믿는 반피이는 아니다. 놈은 그저 놀리고 싶었던 거다. 망할 자식.
“하지 마 임마! 우리 아빠는 진짜 결혼시킬지도 몰라, 하... 진짜 우짜꼬”
나름 심각했다. 눈물이 찔끔 나려 할 만큼.
총을 쏘고 다시 놈에게 건넸다. 총을 건네받은 놈이 잠시 건너편 숫자를 겨누다가, 문득 게슴츠레한 눈으로 돌아봤다.
“근데, 니 빨리 가봐야 되는 거 아니가? 니 마누라 아까 터미날에서 니 기다리고 있던데”
이젠 돌리지도 않고 아예 대놓고 놀린다 이 자식.
“아씨, 하지 마라고 진짜!”
버럭 소릴 질렀다.
놈이 킥킥거렸다.
자존심상 더 이상 놈의 집에 있을 수 없었다.
“나 갈끼라”
책상 밑에 포개놓은 가방을 둘러매니 놈이 당황하며 다가와 붙잡았다.
“아, 알았어, 미안”
뿌리치고 방문을 열었다.
“아 미안하다고, 좀 더 놀다 가”
“이씨, 니는 지금 내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제!”
거실에서 TV를 보시던 어머님이 놀라며 다가오셨다.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놀지, 또 와 그라노”
꾸벅 인사 드리고 나왔다.
놈이 어머니한테 혼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현우놈의 말과는 다르게 그 애가 기다리고 있진 않았다. 당연한 게, 현우 집에서 꽤 오래 놀다 나온 거니까,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리는 없었다.
대합실을 가로질러 우리 동네로 가는 4번 버스 앞 벤치에 앉았다.
터미널 바로 옆에 있는 참기름 집에서 들깨 볶는 고소하고도 메케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
이따금, 장에서 사 왔을 법한 고춧가루나 나물 같은 것들과, 읍내 철물점에서 샀을 곡괭이나 낫자루 같은 것들, 논과 밭에 뿌릴 농약이나 제초제 같은 것들을 아름아름 싸 들고 터미널로 들어서는 중년 이상의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각자의 귀갓길을 대신 달려줄 버스의 번호를 찾으셨다.
교복을 반듯하게 입고 삼삼오오 모여 시시덕거리는 중고등학생 형 누나들과, 읍내 오락실에서 묻혀왔을 전자기기 냄새와 담배 냄새 그리고 코가 따가울 정도로 향기로운 무스 냄새를 풍기며 흘깃 째려보며 지나가는 무섭게 생긴 형들과, 읍 가까이 위치한 빨간벽돌공장에서 방금 퇴근한 걸로 보이는 후줄근한 작업복 차림의 이름 모를 어느 삼촌, 농협이나 관공서에서나 볼 법한 깔끔한 정장에 고운 치마를 하늘거리는 이쁘장한 어느 이모도, 제각기 그날 하루를 저들 집에서 마무리하려 그곳을 찾은 것이다.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기려니, 버스 한 댈 보내고 말았다.
문득 든 생각이었다. 정말 그 애는 집에 갔을까. 혹시라도 진짜 기다리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기다리다가 잠시 화장실에라도 간 거라면, 길이 엇갈린 너는 하염없이 기다리게 되는 건 아닐까. 그건 좀 난처한데. 현우자식이 이상한 소릴 한 바람에 괜시리 신경 쓰이는 것이다.
10여 분이 지난 시간, 버스가 떠난 자리에 또 다른 버스가 들어와 섰다. 이 버스와 함께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선뜻 그 안으로 들어가진 못했다.
그때 갑자기 어깻죽지를 때리는 손길이 있었다. 꽤 매운 손길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그 애가 왠지 상기된 듯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 너, 날 기다리고 있었니?”
내가? 하! 그럴 리가 있나.
“어? 아니, 나 방금 왔는데...”
슬며시 그 애 눈을 피했다.
“응? 방금 왔다고? 정말?”
되물은 그 애는 잠시 의문스런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의미 모를 야릇한 표정이 되어선 손으로 제 입을 가리며 쿡쿡거렸다.
그 모습에 기분이 언짢아져 입을 삐죽 내밀며 반대편으로 고갤 돌렸다. 왠지 속내가 까발려진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 애가 옆자리에 턱하고 걸터앉아 제 가방을 무릎에 올렸다.
“나 애들이랑 놀다 오는 길이야”
그 애를 돌아봤다.
“누구? 승재 게네들?”
“아니, 지혜랑 영미”
그 애가 후훗하며 코웃음쳤다.
의외였다. 머심애들이랑 더 친한 줄 알았는데.
“여자애들이랑도 놀 줄 아네...”
“응? 여자애들이랑도 친하게 지내야지, 왜?”
별안간 그 애가 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설마 나한테 친구가 너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런 얘긴 한 적 없는데, 어째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건지.
그 애 얼굴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니가 남자애들이랑 더 잘 노니까...”
그러니 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음흉하게 킥킥거리는 것이다.
이윽고 다시 어깻죽지를 때리더니,
“걱정 마, 그래도 걔들 보단 너랑 제일 친하니까, 히힛”
당최가 말이 안 통했다. 얘가 지금 뭘 잘못 먹었나. 게네들이랑 불량식품이라도 사 먹은 걸까.
어깨도 조금 아팠다.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어깨만 쓸어내리고 있으니, 갑자기 내 손목을 덥석 잡아끌었다.
“버스 출발하겠다, 얼른 타자”
힘은 또 어찌나 센지, 그대로 버스 안으로 끌려 들어가 맨 뒷자리 창가 쪽에 턱 하고 쑤셔넣어졌다. 도망치지 못하게 할 심산인 걸까.
그 애가 옆에 나란히 앉았다.
“집에 가면 뭐 할까? 할머니가 해오신 튀밥 아직 많이 남았지? 근데 너희 반에 현우란 애는 집이 어디야? 걔 되게 조용하던데, 너는 걔랑 더 친해 아니면 나랑 더 친해?”
한 번에 한 가지씩만 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