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의 첫인상은 노팬티였다. 노팬티라니! 바지 안에 속옷을 안 입을 수가 있다니! 나는 벌게진 얼굴로 트레이닝 바지의 허리춤을 꽉 붙들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며 충격에 휩싸였다. 사진동아리 신입생 MT의 첫날 저녁이었다.
대성리에 있는 싸고 허름한 민박집 한쪽의 비닐하우스 안에는 신입생 MT답게 맨 위 기수 선배부터 입회원서에 갓 사인하고 들어온 신입생까지 총 19기의 인원이 큰 원을 그리며 골고루 섞여 앉아 있었다. 신입생이었던 나는 누가 선배인지 동기인지 구분하지 못해 이른 아침 출발 시간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안녕하십니까! 19기 OOO입니다.”를 연발하며 구십도 인사를 하느라 얼이 빠진 상태였다.
처음엔 녀석에게도 꾸벅 인사를 했다. 검은색 나이키 캡을 눌러쓰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껄렁대는 모습이 꼭 몇 년 꿇은 복학생 같았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그런 나를 향해 손을 까닥이며 “어, 그래.” 하고 인사를 받았다. 옆에 함께 서 있던 다른 친구가 “아니야, 우리 동기야, 동기.”라면서 녀석의 뒤통수를 갈겨주지 않았다면 아마 저녁이 다 되도록 나는 녀석을 선배로 알고 깍듯이 대했을 것이다. “어…뭐…반갑다고.” 그제야 녀석은 머쓱함과 느물거림이 섞인 표정으로 다시 인사를 했다. 그러곤 또 껄렁대며 쿨시크하게 자리를 떴다.
그 녀석이 트레이닝 바지춤을 꽉 쥐고, 자신이 노팬티임을 다급하게 고백하고 있는 바로 저 녀석인 것이다. 저녁을 먹고 조별 레크이레이션이 한창 진행되던 중이었다. 마침 녀석의 조에 아주 난감하고 선정적인 미션이 할당되었고 자연히 신입생인 녀석이 짓궂은 선배들의 타겟이 되었다. 이제 막 스무살을 돌파한 청춘이 드글드글 모인 행사니 수위 조절이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아무튼 구체적인 게임 룰은 상상에 맡기기로 하고, 궁지에 몰린 녀석은 허리춤을 사수하느라 온몸을 쥐며느리처럼 둥글게 말고 필사적으로 버텼다. 그래서 결국 게임이 진행됐는지 어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 역시 녀석의 ‘노팬티’ 발언에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딸만 있는 집에서 태어나 여중, 여고를 졸업한 덕에 구체적인 상상을 하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 후로 녀석은 다소 자포자기했던 것 같다.
첫 학기 내내 우리는 바로 위 기수인 18기 선배들과 매일같이 술을 마셨는데, 툭하면 서클실에 몰래 들어와 자곤 했던 녀석은 아침이면 동기들에게 “야! 휴지 없냐? 나 똥 마려운데.” 하면서 손을 뻗었다. 특히 아침 수업이 많았던 나는 녀석에게 몇 번 휴대용 티슈를 뺏기곤 아예 두루마리를 한 번씩 던져주기도 했다.
“넌 뭔 휴지를 이렇게 많이 쓰냐!”
가끔 내가 그렇게 타박하면 대답은 한결같았다.
“나 노팬티잖아. 잘 닦아야 돼.” 하곤 예의 그 느물대는 웃음을 웃었다. “아오, 이 드러운 자식아!” 하며 책으로 두들겨 패면서도 녀석을 싫어할 수 없었던 건, 웃을 때마다 훤히 드러나는 덧니와 한편으론 쑥스러운 듯 붉어지던 귀 때문이었다.
사실 알고 보면 녀석은 말수가 적고 숫기가 없는 편이었다. 나 역시 사교적인 편은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세상 편한 친구처럼 투닥대다가도 이따금 서먹해졌다. 그럴 때마다 녀석은 휴지나 똥, 담배 얘기를 했다. 가장 강력한 건 셋을 다 합친 말이었다. 이를테면 휴지를 빌리며 ‘담똥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담똥증’이란 담배를 피워야만 쾌변에 이르는 증상을 말한다. 원래 있는 말인지 녀석이 만들어 낸 말인지 모르지만, 녀석은 “아~이상하게 꼭 담배를 피워야 똥이 나온단 말이야.” 하면서 화장실로 향하곤 했다.
서로 말수가 적은 편임에도 자주 전화로 수다를 떨던 기간이 있었다.
녀석이 군복무를 하던 때였다. 운전병이었던 녀석은 차를 세워놓고 대기하는 시간이 꽤 길었고 어지간히 심심했는지 내게 자주 전화를 걸었다. 전화로 수다 떠는 걸 무척 싫어하는 편이었지만 나는 녀석의 전화를 성실히 받아주었다. 그 무렵 나는 동기 중 한 명인 M과 사귀는 중이었고 M역시 군복무 중이라 일종의 공감대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주 전화하는 것이 미안했는지 녀석은 나중에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약속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거짓말 치고 있네, 휴가 나오면 여자 후배들 쫓아다니느라 정신 없을 거면서.”라고 응수했다.
예상과 달리 녀석은 후배가 아닌 선배와 사귀게 되었다. 섹시 도발, 달콤 살벌하고도 카리스마 넘치는 바로 위 기수의 부회장 언니였다. 언니는 녀석을 꼬시기 위해 치밀한 계획하에 주변 인들을 포섭했다고 한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녀석이 우리 기수 회장이 된 것도 언니의 물밑 작업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은 타당한 의심이 든다. 뭐, 아니면 말고.
그리하여 나는 M과, 녀석은 언니와 각기 결혼을 했다.
우리는 살갑게 친한 편은 아니었지만 결혼 후 몇 번 커플로 만났다. 언젠가 노래방에 함께 갔을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기 센 선배로만 알고 있던 언니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그때의 충격과 유쾌함이란……. 나는 엄정화의 ‘초대’를 그렇게 섹시하고 웃기게 부르는 사람을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녀석도 익숙한 듯 언니와 호흡을 맞추며 절묘한 댄스를 선보였다. 진정한 환상의 커플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아이를 데리고 가족 여행도 갔다. 나의 딸은 아직도 강화도의 버섯모양 펜션을 기억한다. 나 역시 불 앞에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 먹었던 순간, 퉁퉁 부은 얼굴로 아이들과 배드민턴을 치던 아침, 바다가 보이는 횟집에서 거하게 먹었던 점심이 기억 난다. 조만간 함께 또 오자며 헤어지던 순간도…….
하지만 간간이 연락하거나 동기 모임으로 만났을 뿐,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로 나는 나대로 복잡한 개인사에 붙잡혔고 녀석은 녀석대로 잠잠했다. 그래도 뭐, 멀리 있지 않으니까, 언제든 만날 수 있으니까, 하면서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녀석을 다시 만난 건 장례식장에서였다.
부고장을 받고 병원을 들어설 때까진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해야겠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 녀석이? 여기에? 왜? 그런 의문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나는 상복 입은 언니와 녀석의 영정사진을 보고 말았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눈물이 쏟아졌다. 멈추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맨손으로 허둥지둥 눈물을 닦아내며, 언니에게 미안해요, 울어서 미안해요, 사과하면서도 나는 계속 울었다. 언니는 나를 테이블에 앉히고 녀석이 뇌종양으로 꽤 오래 투병했다는 사실과 호전되는 듯 싶더니 급격히 안 좋아졌다는 것, 하지만 호스피스 병동으로 보내지 않고 끝까지 옆에서 잘 돌보다 보내주었다는 걸 담담히 말했다.
내가 잘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동안 녀석도 살아보겠다고 애를 썼던 모양이다. 우리는 그러느라 얼굴도 못 보고 시간을 흘려보낸 모양이었다. 상황이 나아지면, 좀 더 살만해지면 웃으며 만나야지, 하다가 이렇게 되고 만 것이었다. 그러지 말걸. 가까이 있을 때 자꾸만 볼걸. 그 순간만큼은 나의 게으름이 뼈저리게 후회되었다.
빈소에는 젊음으로 들끓던 시절을 함께 보낸 선배와 동기, 후배들이 잔뜩 와 있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변한 이도 있었고, 한결같은 이도 있었다. 춤을 잘 추고 실없는 장난으로 우리를 웃기던 선배는 딴사람이 되어있었다. 몸이 안 좋아 약을 많이 먹는다고 했다.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냐는 물음에 그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어눌한 말투로 어, 어, 하고 대답했다. 그 순간은 뭔가 비현실적이었다. 과거에 살고 있던 내가 순식간에 낯선 미래로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녀석의 죽음도, 내가 과거 속에 묶어 놓았던 사람들도 모두 다 어딘가에 온전한 모습으로 있을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 주말 내내 그런 생각을 하고 또 했다.
어디로 갔을까? 내가 알던 사람들은, 그 녀석은 어디로 갔을까?
어쩌면 나는 대답을 찾지 못한 채 같은 질문을 계속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막막해져 울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괜찮을 것이다. 울음은 곧 그칠 테고 나는 한결같은 의문을 품은 채 문득문득 녀석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남은 이들의 얼굴 속에서, 여전히 온전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과거의 녀석과 나와 그들을 찾아볼 것이다.
더는 미루지 않고, 부지런히.
*나의 친구 故김진권의 평안을 바라며 이 글을 보냅니다. 오래 기억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