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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찬란 Jun 19. 2024

우리는 옆으로 걷는다





월, 수, 금, 일주일에 세 번 필라테스를 한다. 아침 첫 타임에 오십 분간 개인 레슨을 받은 후, 십 분 쉬었다가 그룹 레슨을 한 시간 더 받는다. 삼월부터 시작해서 벌써 삼 개월을 넘어가는 중이다. 매일 하는 건 아니라도 평생 운동이라곤 해 본 적 없는 나로서는 대단한 루틴이 생긴 셈이다. 땀투성이가 된 채 요가 매트를 질질 끌어다 맨 앞줄에 까는 동안 회원들이 한마디씩 한다.

“오늘도 엄청 빡셌나 봐요. 등이 다 젖었네.”

“대단하다 정말.”

그러나 사실 대단할 정도의 운동을 한 건 아니다. 단지 나의 하찮은 체력이 간단한 기본동작과 몇 번의 스쿼트에 격렬히 반응했을 뿐이다.

대답할 힘도 없어 흐린 눈으로 인사를 하고 매트에 앉아 스트레칭을 한다. 뻐근한 다리를 쭉 뻗고 호흡을 길게 내뱉으며 상체를 바닥까지 숙였다 세운 다음, 발레하듯 팔을 머리 위로 넘기며 옆구리를 길게 늘인다. 그러면서 거울에 비치는 내 몸을 점검한다. 어깨가 위로 솟지는 않았는지, 목이 너무 앞으로 빠져있지는 않은지, 이전 수업을 복기하며 서투르게나마 자세를 교정해 본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하나로 쫑쫑 땋은 머리, 딱 달라붙는 운동복을 입은 모습이 나 같지 않아 어색하고 뿌듯하다.  

   

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올해 초 두 번째 코로나에 걸리고 나서였다. 이번엔 열이 나는 대신 코와 목이 달군 막대로 쑤시는 것처럼 따갑고 몸살이 심했다. 그런데 그보다 곤혹스러운 건 팔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 것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몇 걸음 걷기조차 힘에 부쳤다. 뼈와 근육이 물러져 마치 내가 살짝만 건드려도 찰랑이며 부서지는 순두부가 된 기분이었다. 주말을 껴서 꼬박 일주일 집에 갇혀있는 동안 나는 일어설 때마다 지탱할 만한 걸 찾아 팔을 뻗어야 했다. 그러면서 한 주 전 명절에 만난 자매들을 떠올렸다.


실컷 놀고먹느라 더부룩했던 우리는 배를 꺼트릴 겸, 자매들만의 속 얘기도 할 겸 산책을 나섰다. 커피 전문점에서 뜨거운 커피를 한 잔씩 테이크아웃 해 동네 돌다 셋째가 야식집에서 쓸 그릇을 보러 가자고 했다. “그래, 가자, 가자.” 마침 근처에 문을 연 다이소가 있어 우우, 몰려갔다. 지하 일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아휴, 계단이네.”

언니와 셋째가 동시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또 동시에 몸을 옆으로 돌리는 게 아닌가. 뭘 하나 싶어 나는 두 사람을 빤히 바라봤다. 둘은 아주 익숙하고 느린 동작으로 옆을 보며 엉거주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니, 여러분. 왜들 이래? 우리 아직 사십 대야.”

“요즘 갑자기 살이 쪄서 그런지 무릎이 아프더라고.”

계단 중앙의 난간을 붙잡은 채 셋째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으 야, 근력이 없으니까 힘들다.”

언니 역시 죽는소리를 했다. 이 기막힌 광경을 놓칠 리 없는 내가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찍는 나도, 원망의 눈초리로 나를 보는, 그러나 뛰어 올라와 지할 수 없는 언니와 셋째도 느닷없이 맞닥뜨린 웃픈 상황에 그만 허허, 웃고 말았다.   

   

그때는 다다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두 사람을 놀려먹었지만 실은 나라고 딱히 별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밤낮으로 신경 쓸 가족이 없고, 노동 시간이 짧아 비교적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을 뿐, 근력 없기론 셋 중 내가 최고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요 몇 년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게 믿는 구석이었는데 이제 그걸로는 안 된다는 걸 받아들일 시간이었다. 침대에 누워 시름시름 앓으가장 가까운 스포츠 센터를 검색했다. 헬스는 너무 격렬하고 요가는 지루할 것 같았다. 수영은...내 몸이 너무 부끄러웠고. 그래서 찾은 종목이 필라테스였다. 지루하지 않으면서 지긋하고 잔인하게 근육을 찢는. 무엇보다 마음에 든 건 코어근육 단련에 최고라는 문구였다. 암! 중년여성에게 코어근육이야말로 중요하고말고.


격리가 끝나자마자 필라테스 센터에 찾아갔다. 인바디 검사를 하고 강사에게 내 몸 상태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역시 근육량 미달. 운동 경험이 전혀 없다는 말에 강사는 먼저 개인 레슨으로 기초체력을 쌓은 후 그룹 레슨으로 옮겨갈 것을 권했다. 비용이 만만치 않았지만 그 자리에서 덥석 결제를 했다. 망설이기 시작하면 결국 못 할 게 뻔했으므로 생각하지 않고 저질러 버렸다. 크게 아프기 전에 치료하는 셈치고 전문가를 믿기로 했다.      


매번 운동을 시작하기 전 강사는 내 몸을 꼼꼼히 체크한다. 어깨와 목을 돌릴 때 관절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손바닥으로 체온을 확인한다. 기구에 올린 발을 꾹꾹 누르고, 몸통과 다리를 잡아 늘여본다. 진단이 끝나면 그날의 운동이 정해진다. 가끔 상태가 안 좋으면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 강사는 내 손을 꼭 잡고 푹 쉬는 요령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나는 말 잘 듣는 환자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최선을 다해 쉰다.

반대로 몸이 괜찮은 날은 바로 다음 타임의 그룹 레슨까지 받는 경우도 있다. 한두 번 그러다 이젠 아예 두 시간짜리 운동이 되어버렸다.


“회원님, 오늘도 그룹 레슨 콜? 괜찮아, 괜찮아, 미안해하지 말고 듣고 가세요.”

추가 레슨비도 필요 없다며 강사는 나를 넓은 레슨실로 밀어 넣는다. 그렇게 운동을 끝내고  팔다리가 몹시 후들거린다. 나는 자매들이 그랬던 것처럼  계단 난간을 붙잡고 옆으로 내려간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한 발 한 발 느리게. 그러면서 다짐한다. 지금은 옆으로 걷지만 언젠간 정면을 보고 당당히 걸어 내려가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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