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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균율 Jan 11. 2020

독일 진혼곡과 알토 랩소디

Kathleen Battle, Christa Ludwig


작가의 세대에게 진혼곡, 즉 requiem 말하면 에 아홉은 모차르트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와 그의 작품 Requiem을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 Amadeus의 힘이다. 하지만  알려진 고전음악 작곡가requiem 중에는 브람스의 작품도 있다. 브람스의 A German Requiem은 라틴어 기도문에 기초한 원래의 양식과는 많이 다르다. 독일어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그 내용 자체를 가톨릭 교회의 기도문이 아닌 루터의 신교 성경에 있는 텍스트를 브람스가 모아서 만든 새로운 리브레토를 사용했다. 즉 제목에서 말하는 German은 독일인이 아닌 독일어를 의미한다.


총 7악장으로 구성되는데 그 첫 악장의 첫 구절인 "Selig sind, die da Leid tragen, denn sie sollen getröstet werden. (Blessed are they that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에서 엿볼 수 있듯이 죽은 자 들을 위한 기도가 아닌, 남겨진 자들에 대한 위로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1865년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그 9년 전 자신의 멘토였던 슈만의 죽음 등이 동기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고, 특히 남은 슈만 일가와 오랫동안 지속된 관계 속에서 클라라 슈만과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첫 악장에서 바이올린의 사용이 없다거나, 적극적으로 사용된 팀파니의 비극적인 톤, 1악장과 7악장에서 사용된 하프, 등 흔한 관현악곡 구성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일곱 악장 중의 백미라고 생각하는 제5악장은 원래 1866년 버전에는 없었던 것을 2년 후에 추가했다고 한다. 소프라노 솔로가 이끌어가는 이 6분여의 악장은 베토벤 현악사중주 Op.130의 역시 제5악장 Cavatina와 함께, 이 세상의 소리가 아닌듯한 가장 아름다운 악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그리고 작가에게 Kathleen Battle이라는 20세기 후반 최고의 음색을 가졌던 소프라노를 알게 한 작품이기도 하다.


1987년 카고 심포니홀에서 처음 만난 브람스의 A German Requiem은, Kathleen Battle의 그야말로 천상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던 기억과 겹쳐지는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깊고 넓은 우물처럼 생긴 홀의 3층은 어지러울 정도의 급경사인 계단식 의자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5불짜리 학생 티켓의 실체는 3층의 맨 뒷줄이었다. 그 마지막 줄은 마치 홀이 다 지어지고나서 나중에 추가해서 설치한 듯, 그 앞줄과 높이 차이가 사실상 없었다. 앉아 있으면 앞줄에 앉은 청중의 뒤통수와 심포니홀의 높디 높은 천정이 거의 정면에 보였던, 그리고 한참 아래에 있는 오케스트라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Battle의 솔로를 듣고 나니 도저히 앉아 있을 수 없어 마지막 두 악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내려다보며 들었는데, 맨 뒷의 특권이기도 했다. 지금은 타계한 Georg Solti 경의 지휘였다.




Kathleen Battle  (1999, 출처: Wikipedia)

A German Requiem의 음반은 추천할 만한 것들이 여럿 있다. 작가는 당연히 Battle이 솔로를 맡은, 리고 시카고 심포니가 James Levine의 지휘 하에 연주한 음반에서 시작하였다. Battle의 커리어는 사실 이 작품과 함께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신시내티에서 학교 선생님으로 있다가, 1972년에 오디션을 통해 Thomas Schippers에게 발탁되어 이태리에서의 A German Requiem 연주에 참가하게 되고, 1974년에 Schippers가 James Levine에게 소개하면서 대형 소프라노로서의 커리어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Battle은 주변 사람들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견디기 힘든 사람이었다고 한다. 학교 선생님을 하다가 뒤늦게 발견된 상대적으로 초라한 배경 때문이었는지, 혹은 흑인으로서 적지 않았을 차별을 특히 더 못 견뎌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러 가지로 과민한 반응과 요구로 인하여 1994년에 그의 주 무대였던, the Met으로 흔히 알려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퇴출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유독 유명한 여성 연주자에게 많이 있 종류의 일들인데, 역시 백인 남성 중심의 사회였을 20세기 서구 음악계에서 일부나마 그 이유를 찾아야 할지... 하여튼, 불행히도 이 사건은 Battle의 커리어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고, 이후로 오페라 무대에는 서지 못하고 주로 음반과 리사이틀 무대로 청중과 만날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널리 알려진 음반으로는 이전 세대인 Walter가 지휘한 뉴욕필의 연주, 그리고 Otto Klemperer와 Philarmonia 오케스트라의 연주 등이 20세기 중반의 가장 대표적으로 꼽힌다. 특히 Klemperer 음반의 소프라노와 바리톤이 그 유명한 Elisabeth Schwarzkopf와 Dietrich Fisher-Diskau이다.


이 음반을 통해,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모노 시대의 지휘자 중에서는 Walter를 편식하느라 제대로 들어보지 않았던 Klemperer라는 지휘자에 대하여 새롭게 눈을 뜨게 되기도 했다. 그의 50년대 베토벤 녹음들을 들어보면, 경쾌한 Carlos Kleiber가 묘하게 떠올려지는데, 하지만 말년의 연주들은 오히려 극단적으로 템포가 느려졌다고 한다.




이 레퀴엠을 알고 나서 놀라게 된 또 한 가지 사실은, 이 작품을 쓸 때까지 브람스가 단 한 편의 교향곡도 작곡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교향곡의 작곡을 주저했다는 브람스의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의 진혼곡에서 느껴지는 쓰나미 같은 감동이 지나가고 나면, 도대체 무엇을 기다린 것이지 하는 의문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이와 같은 대형 작품을 쓰고도 10년이나 더 걸려 그의 첫 교향곡을 발표했다니, 그가 교향곡에 대하여 얼마나 신중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10년 사이에 발표된 관현악 작품들로 브람스 관현악의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인  Variations on a Theme by Hayden과 합창단과의 협연인 Alto Rhapsody가 있다.


작가는 Alto Rhapsody Walter와 Columbia 심포니 관현악단의 연주로 처음 접했었다. 유학시절 어디에서인가 이 중고 CD 구매한 게 족히 30년은 된 것 같다. 이미 다른 글에서 언급한 대로, Columbia 심포니는 전적으로 스튜디오 녹음을 위하여 결성되어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활동한 관현악단인데, Walter와의 50년대~60년대 초 음반들은 연주에서나 음질에서나 아직도 경쟁력을 잃지 않고 있다.

 

녹음에 참여한 합창단은 Occidental College Concert Choir인데, 당시 Walter와의 협연으로 남겨진 몇 장의 음반을 제외하고는 이제 인터넷 어디에서도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Howard Swan라는 사람이 음악 감독이었다는데, 1934년에서 1971까지 이 대학에 재직하면서 어느 대학에나 흔히 있는 Glee Club을 미국 내 손꼽히는 합창단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합창"이라는, 사실 자주 접하기 어려운 장르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한다. 좋은 선생님 하나의 역할이 얼마나 대단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일례이다. Occidental College는 작가가 다닌 대학원이 있던 파사디나의 바로 옆 동네에 있는, 미국에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휴머니티 칼리지인데, 지금은 대학교 홈페이지에서도 Concert Choir라는 이름으로는 찾기 힘든 것을 보면 아쉽게도 명맥이 유지되지 못하고 그냥 흔한 대학교 Glee Club로 되돌아온 것이 아닐까 한다.




Alto Rhapsody 역시 브람스의 개인적인 인간관계와 엮여 있는데, 슈만의 딸인 Julie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곡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가사를 보면 좀 암울하다. 그 길지 않은 가사에 들어가는 단어들만 보아도 "wasteland," "hatred of men," "unsatisfying egotism." 등등 도대체 결혼을 앞둔 처녀에게 할 이야기가 아닌 말들로 가득 차 있다. "선물"이긴 하였으나, 다행히도 축가로 사용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일설에 의하면 슈만의 사후에 한참 연상인 클라라에게 향하던 그의 연정이, 한동안 슈만가와 한 지붕 안에서 생활하던 당시에, 이번에는 10여 년 연하인 쥴리에게 향했고, 그 쥴리가 결혼한다는 말을 듣고 그 충격을 소화해내는 과정으로 이 곡을 지었다고.... 참, 이 분도 꽤나 어렵게 살았구나 싶다. 그의 진혼곡이 스러진 사람과 그를 보낸 이에 대한 천상의 위로였다면, Alto Rhapsody는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인 연민이다.


곡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 알토 (Contralto) 솔로가 전개해 가는 곡인데, 남성 합창단과 관현악단이 "반주"의 역할을 한다. 도입부에서 베이스가 깔아주는 배경 위에 바이올린이 간헐적으로 쏟아내는 토로가 대비되면서 만들어내는 암울한 분위기로 시작한다. 목관과 금관들이 조금씩 참견을 하면서 점차 고역대의 현들이 이야기를 넘겨받아 반전의 분위기가 조금씩 만들어지고 나면, 잠시의 휴지기가 오는 듯하다가 그야말로 불현듯 솟아오르는 여성 솔로의 소리가 들린다. 그 아래로 다시 베이스의 묵직한 현이 회색의 바탕색을 깔아주면서, 솔로와 목관과 바이올린 섹션의 대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브람스는 서로 다른 종류의 악기군을 어떻게 적절히 배치하여 서로 대비하고 상생을 하는가에 있어 독보적이었던 것 같다. 솔로와 현과 관의 조화가 이렇게까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하고 들을 때마다 감탄을 하게 된다.  


위에 이야기한 Columbia Sympony 음반에서는 미국의 Mildred Miller가 솔로를 맡았고, 위와 같은 사연으로 최근에야 재발견한 Klemperer가 Philharmia Orchestra를 지휘한 녹음에서는 독일 출신의 Christa Ludwig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루드비히의 경우 스스로 Prima Donna가 아닌 Seconda Donna를 자처하였으나, 20세기 후반 50년을 가로지르는 가장 위대한 메조소프라노라고 칭송되는 성악가이다. 오페라 무대는 물론 특히 독일 Lieder들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이기도 한데, Alto Rhapsody 음원도 두세 가지를 Youtube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원래 여성의 가장 저음역을 소화하는 알토(Contralto) 솔로를 위한 작품이라지만, 이 둘의 경우처럼 더 흔하게는 메조소프라노들이  역할을 맡는 모양이다. 알토들에게 주어지는 역할이 적다 보니 솔로들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아서일까? 현존하는 이 곡의 음반들 중 가장 유명한 알토의 연주라면 아마도 Marian Anderson의 그것이 아닐 한다. 밀러와 루드비히 보다 한 세대 전 인물인데, 19세기말에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흑인으로서 태어나 오페라 가수가 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을지를 조금 생각해보면 그의 목소리가 가진  충분히 짐작할만하다. 물론 그나마 유럽에서 커리어를 쌓았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Fritz Reiner 와의 Alto Rhapsody 협연을 어보면, 1950년 녹음의 제한적인 음질에도 불구하고 그의 단단하고 정확하며 감성 가득한 소리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최근 연말을 빙자해서 모 관현악단의 베토벤 9번 연주회에 다녀온 적이 있다. 연주 시간도 70분 가까운 데다가, 작품 자체가 주는 위압감이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듣는 내내 합창단의 소리와 관현악단의 소리가 서로 잘 조율이 되지 않은 듯한, 혹은 전체적인 소리의 크기가 과도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실 이번이 처음으로 9번을 연주회 현장에서 "완곡"한 경험인데, 그래서 이 불편한 느낌이 작품 자체에 대한 불만인지 혹은 연주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감동"을 강요받는 듯한 그 분위기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기억이었다.


듣는 이들에게, 아니 내게, 브람스의 위로와 연민이 훨씬 더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이유 중에는 아마도 베토벤과의 대비도 한몫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강요하지 않는, 같이 고뇌하는 그를, 깊어지는 겨울이 다 가기 전에 연주회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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