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평균율 Dec 25. 2019

드뷔시와 라벨

Alban Berg Quartet


18-19세기 고전음악의 헤게모니가 독일과 이태리에 있었다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는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라고 할만하다. "The Three B's"로 통칭되기도 하는 바흐, 베토벤, 브람스가 한 세기에 걸쳐 고전음악의 절정을 완성하였고, 모차르트 이후 바그너와 베르디가 오페라의 모습을 꽃피우던 19세기의 중반이 지나가면서, 유럽의 다른 민족들의 음악이 들리기 시작한다.


감성 충만한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 그리고 이후에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에프, 그리고 쇼스타코비치 등 러시아 권의 작곡가들의 약진이 가장 두드러지긴 했지만, 그 이외에도 북구의 시벨리우스와 그리그, 보헤미아의 드보르작과 말러 정도는 현대 대중들에게도 충분히 친숙하다. 특히 시벨리우스의 경우 북구의 어두운 감성을 십분 발휘한 작가이면서 동시에, 어쩌면 "The Three B's"를 계승하는 고전주의의 마지막 대가라고 할만하다.


그런데, 이 전환기의 가장 흥미로운 작곡가들 중에는 일단의 프랑스 작곡가들이 있는데 쇼송, 프랑크, 포레, 드뷔시, 그리고 라벨 등이다. 이 중에 가장 친숙한 이름은 드뷔시일 터인데, 이 글에서는 그와 그의 라이벌이었다고 흔히 알려진 라벨, 이 두 사람의 현악사중주 두곡을 여다 보자.




묘하게도 위에 언급된 프랑스 작곡가들은 모두 현악사중주를 하나씩만 남겼는데, 그중 드뷔시는 1893년도에 그리고 라벨이 11년 이후인 1904년에 발표하였다. 19세기 초 베토벤이 만들어 놓은 현악 사중주의 전형에 비하여서는, 물 흐르듯 유려하게 시작하는 도입부에서 두 작품이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라벨의 사중주가 처음 발표되었을 당시 파리 문화계에서 좋은 반응을 듣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드뷔시의 사중주의 모방작처럼 들린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사실 라벨의 경우 드뷔시의 사중주를 모델로 삼았다고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였고, 굳이 따져보자면 드뷔시의 선구적인 사중주에 대한 오마쥬에 가깝지 않았나 생각된다. 들어보면 그 피상적인 유사점은  각기의 2악장에서 가장 쉽게 다가오는데, 둘 다 "Assez vif – très rythmé"이라고 동일하게 연주법이 기술되어 있고, 특히 손가락으로 현을 튕겨 맑고 리듬 가득한 소리를 내는 Pizzicato 주법에 의해 그 테마가 소개되는 공통된 방식이 워낙 인상적이다.


사실, 한 음악 작품이 인식되고 분류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리듬이라는 점은 금만 듣다 보면 쉽게 공감할 수 있는데, 일례로 몇 년 전에 뜬금없이 데모송으로 쓰여 세간의 화제를 모았던 '다시 만난 세계' 라는 kpop의 대표곡에서도 이런 면을 찾아볼 수 있다. Kpop 아이돌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 만한 '소녀시대'의 데뷔곡인데, 아이돌 음악에서 하지 않은 Rock 스러운 전개에서부터,  틈 없이 펼쳐지는 건강미 넘치는 안무까지, 작가의 최애 곡이다. 덕후들 사이에서 "'다만세'가 갑"이라는 말에 다들 수긍한다고 한다. 


노래의 영문 제목 'Into the New World' 관련이 있는 모양인데, 도입부에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 테마를 하나 차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4악장 명한 메인 테마인 "라~시도~라라~ 솔~솔라라~"를 노래 입부 첫 소절인 "전해 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에서 그대로 샘플링한 것인데, 원곡과 전혀 다른 리듬과 강약에 얹혀 "라시도~시라라 솔~미솔라라~"  표현된다. 하지만, 아마도 누가 어디라고 미리 이야기를 해주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같은 멜로디로 인지되지 않을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멜로디의 진행에 있어 시간을 쪼개는 방식이 비슷하면 조금 다른 템포 혹은 코드 진행이라도 유사하게 들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이 수입되어 처음 소개되는 과정에서 표절시비가 났을 때 실은 이런 오해인 경우들이 흔히 있다. 고전주의 음악과 함께 자라난 당시의 청중에게 라벨의 사중주가 드뷔시의 모방처럼 들린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겠다. 베르디의 오페라만 듣다가, 처음으로 심청가와 수궁가를 연이어 들었을 때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상황일 것이다.




두 사중주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비교해서 들어보면 사실 두 곡은 서로 매우 다르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일단, 전체적으로 라벨의 사중주가 훨씬 생동감 넘치는데, 각기 G단조와 F장조라는 차이에서도 보이듯이 말이다. 1,4 악장과 위에 언급한 2악장에서 모두 이런 차이가 많이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라벨의 2악장에서는 드뷔시의 2악장에 비하여 Pizzicato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그 자체로 테마를 전개하지 않을 때에도 현 하나쯤이 튕겨지면서 간간히 늘어지는 나머지 현의 소리를 경계하며, 마치 멀리서 잔소리하듯, 그리고 간혹은 전면에 나서 리듬을 끌고 간다. 문, 이 라벨의 2악장을 25현 개량 가야금으로 편곡해서 원곡의 템포로 연주하면 정말 멋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몽환적인 드뷔시의 3악장과 나른한 라벨의 3악장이 가진 공통분모 역시 적지 않고, 스스로 선언하였듯이 라벨의 사중주는 드뷔시 사중주에 기반을 둔 것임에는 분명하다. 건반 악기와 달리 음과 음의 연결이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가능한 현악기의 특성을 십분 사용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데,  이 두 곡을 피아노용으로 편곡하면 어떤 모습이 될지 사실 매우 궁금하기도 하다. 글쎄... 이 사중주들은 상상이 쉽지 않다.


어쨌든 이 두 사중주 사이에 연결된 끈을  발견하는 것 역시 충분히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래서인지 이 두 곡은 흔히 하나의 음반에 수록되곤 한다. 작가가 주로 즐겨 듣는 Alban Berg 사중주단의 1986년 녹음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은 비엔나 음악 아카데미의 교수들이 모여서 시작되었고 베토벤 사중주 전집을 포함하여 상당히 많은 음반을 만들어 낸  유럽의 대표적인 사중주단인데, 특히 많은 실내악 연주가들이 그렇듯이 1980년대의 활동이 눈부시다. 19세기뿐만 아니라 20세기에 만들어진 음악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는데, 그래서인지 이들을 위하여 쓰이고 이들에 의하여 초연된 사중주곡들이 여럿 있는 모양이다.


베토벤 후기 사중주 이야기에서 언급했던 Guarneri 사중주단에 비하여 소리의 생김새가 상당히 다르다. 과르네리가 절도 있으면서 동시에 깊은 울림이 있는 음색을 들려준다면, 알반 베르크는 조금 더 감성적이고 섬세하다. 베토벤에 관한 한 과르네리가 더 어울리다고 생각되지만,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 새로운 작곡가들의 섬세하고 미려한 작품들을 연주하기에 알반 베르크가 적절한 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드뷔시와 라벨이 활동한 시기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파리를 중심으로 번성하던 때여서 인지 이들의 음악에도 인상주의라는 표현이 흔히 쓰였고 이는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하여 드뷔시와 라벨 모두 상당한 거부감을 보였다는데, 특이한 점은, 라벨은 드뷔시의 경우 이 표현이 어느 정도 맞다고 하면서도, 자신에게는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의 이 말이, 피상적으로 유사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이 두 작곡가를 잘 비교해 주는 이야기 일 수도 있겠다.


드뷔시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 '바다(La Mer)' 등의 대표작들, '백과 흑(En Blanc and Noir)'등으로 대표되는 피아노 소품들, '전주곡(Prelude)'들과 '연습곡(Etude)'들, 그리고 적지 않은 수의 노래들까지, 사실 당시의 파리 음악을 대표할 만한 많은 작품을 남겼고, 이는 20세기 고전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인상주의 이건 아니건 간에 그의 작품들은 고전음악 전반에 걸쳐 가히 혁명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라벨 경우 작품의 수도 많지 않고, 대중적인 작품은 더구나 드물다. 한때 볼레로라는 단악장 관현악곡이 영화에 삽입되면서 마치 관능적인 음악의 끝판왕처럼 인식되던 때도 있었는데, 이 작품은 작곡가 스스로의 평가가 그리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와서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곡이 되면서 라벨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주는 불행한 결과를 준 것 같다.


많지 않은 그의 작품들을 듣다 보면, 드뷔시를 위시한 당시의 새로운 조류를 받아들였지만, 오히려 이를 이용하여 고전주의 음악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된다. 19세기 고전주의와는 분명히 차별되지만, 동시에 훨씬 더 전통을 고수한, 그리고 조금 더 무게감이 느껴지는 그런 작품들을 남겼다. 예를 들어, 손열음을 이야기하면서 언급한 A minor 피아노 삼중주 역시 마치 콘체르토를 연상시키는, 라벨의 진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형 작품이다.




드뷔시와 라벨, 그리고 동시대의 에릭 사티는 작가의 고전음악 편력에 청량음료 같은 작곡가 들이다. 정신을 통째로 빼앗아가는 바흐, 마음을 후벼 파는  베토벤, 그리고 삶을 돌아보게 하는 브람스 모두 소중하지만, 그들이 만들어 놓은 패러다임은 간혹 너무 많은 너지를 요구한. 마치 소풍에 가져간 엄마 김밥 옆에 빠지 않던, 환타 한병 같은 것이 이들 파리지앵들의 음악이. 그런데, 불행히도 아직 콘서트장에서 이 두 사중주의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대관령과 아스펜 음악제를 제외하곤 실내악 연주회를 가본 게 벌써 수십 년이 된 것 같다. 머지않은 새해에는 곧 고쳐볼 일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