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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페세 Jun 03. 2021

도시락 먹는 시간

도시락을 먹는 호사를 누린다, 매일


나는 결혼을 잘 했다. 자랑이다. 


현실을 탓하며 게으르게 살던 알량한 청춘의 때, 곧 죽어도 예쁜 여자랑 결혼해야지, 그런 생각은 했다. 


허황되더라도 꿈은 커야 한다. 

내 경우가 그렇다. 꿈을 버리지 않았더니 실제 예쁜 여자와 결혼했다. 

그저 꿈을 이뤘으니 결혼을 잘 한 것인가? 그래서 하려는 말은 아니다.


아내는 결혼 전에 아이들을 가르쳤다. 

힘든 일이었다. 

가르친다기보다 그냥 번잡한 꼬맹이들 수발들기였던 것 같다.


아이들을 태워 오고 수업 하고 간식 먹이고 또 데려다 주고 그런 일을 수년 간 반복했다. 

결혼 후에도 그 일을 한동안 계속했다. 첫 아이가 생길 때까지.


아이를 낳고는 지금까지 전업주부로 살고 있다. 

두 아이를 대학생이 되도록 키웠고 살림을 하고 가족을 돌봤다. 

장인어른은 처음 우리집에 다녀 가시며, 화장대 위에 남편 아침밥 굶기지 말라고 쓰신 쪽지를 올려 두셨다. 

그 덕분인지 이때까지 아침밥 거른 적이 거의 없다.


아침만이 아니다. 요즘은 매일 도시락을 싸준다. 

지난 20년 간 이런 적이 없었다. 

직장인이 도시락을 싸와서 먹는 건, 분위기가 되지 않으면 힘들다. 

계속 점심 약속이 있고 가끔은 팀원들과 밥을 먹으며 관계도 쌓아야 하는 직장인에게 도시락 점심은 무리다.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그랬는데 요즘은 매일 도시락을 먹는다.


분주히 돌아가는 사무실에서 점심시간을 서로 잘 맞출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리에서 혼자 일 하다 보면 도시락이 편하다. 다행히 아내는 점심을 싸주는 것이 즐겁다고 했다. 

이건 정말이다. 그냥 내맘대로 하는 추측이 아니다.


어제는 2시쯤에  톡이 왔다. 

왜 안 보내? 

뭘 안 보냈다는 건가? 속으로 생각하며, 뭘?이라고 했더니 점심을 먹었으면 먹었다는 소감을 보내라는 얘기.

아, 오늘은 빠뜨렸네. 그래서 사진 찍어 놓은 걸 얼른 보냈다. 하트 두 개와 함께. 

그랬더니 도시락 먹은 피드백을 받는 게 요즘 자기의 행복이라고 말해준다. 크아~ 달달하구나. 


아침이면 빨간 도시락 가방을 식탁에 올려둔다. 내용물을 알 수 없다. 

물어도 안 알려준다.  점심 때 열어봐, 라고 말한다. 


메뉴가 매일 다르다. 생활비를 모두 도시락 재료 사는 데 쓰는 것 같다. 

아내가 즐거워 하니 나도 즐겁다... 아차, 이게 아니지. 황공할 따름이지. 요즘 배가 불렀고나.


오늘 원고를 써야 해서 자료 검색을 하다가 스타강사 김미경 씨 기사를 읽었다. 

30년 동안 억척스레 일하며 쌓아 올린 성공의 비결을 말하고 있었다. 

일하는 여성. 사회를 바꾸는 여성들. 일 때문에 알게 된 여성들이 많다. 

똑똑하고 공부도 많이 했고 자신감과 통찰력 넘치는 여성들. 그들에게서 배우는 게 많다.


어제도 그랬다. 

대기업 퇴사 후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님과 선정릉을 내려다보며 나눈 대화 중 느낀 바가 컸다. 


가끔 아내가 말했다. 

오늘 만난 사람은 마케팅 이사님이야? 교수님이야? 멋지네. 근데 나는 여태 뭐 했을까. 

자조하는 건 아니지만 약간의 한숨 같은 것. 부러움 같은 것. 


한동안의 헛발질로 형편이 말이 아니게 됐을 때.

아내는 마트 물건을 집다 도로 내려 놓고는 혼잣말을 조그맣게 했다. 

나도 돈을 벌었어야 했을까. 

한 번도 돈을 걱정해본 적 없는 사람이. (하긴 돈을 왜 걱정하나. 내 걱정을 해야지) 

그럴 때 나는 아무 말을 안 한다. 아니 못한다. 몸이 작아지고 입이 합죽이가 된다. 

무슨 말을 해도 어색하다. 그냥 못들은 척 하는 게 맞다.


주부로서 시간을 연봉 환산한다면 얼마나 될까? 

엄마로서 월급을 책정하면 얼마를 줘야 할까? 아내로서는? 

인터넷에 자료가 있겠지만 아마도 적지 않을 것이다. 

월급 명세서와 연봉계약서가 없을 뿐. 돈을 벌지 않고 있는 게 아니다. 경제 활동을 하고 있다. 


나도 그걸 안다. 

아내이자 주부로, 엄마로 멋지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여보, 용기를 가져. 

이렇게 속삭이는 게 도움이 될까?


오늘도 도시락을 먹었다. 

바질을 발라 그릴에 구운 닭가슴살과 찐고구마. 바나나 퓨레를 곁들인 또띠야. 

그리고 성주참외와 유기농 블루베리, 견과류를 넣은 가정식 그릭 요거트. 

여기에 베지밀 에이 190밀리리터.... 아이구야.


오늘도 도시락은 맛있고 그래서 결심이 생긴다. 

.....그래, 아프지 말고 돈 마이 벌자.


내 입으로 들어간 최근의 도시락 메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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