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수피 04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피 Oct 06. 2024

수피

#4

스테인리스 피처 속 뜨거운 물과 커피가 만나 뿜어내는 열기는 건물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천천히 내려지는 커피는 내가 좋아하는 드립커피다. 그 외에도 다양한 커피 기구들이 즐비해있고 그것은 이곳이 평범한 카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평범한 카페에는 어울리지 않는 괴상한 무언가를 마주했다. 서리는 그 괴상한 무언가를 보고 떠올린 단어는 ‘괴물’이었다. 인영 같은 검은 그림자는 바닥에 드리워져있지 않고 공기 중에 존재하고 있었다. 마치 그림이 살아난 것처럼.. 




괴물은 카페 전체를 차지할 만큼 많았다. 그리고 하나같이 머리 위에 갈색 양모를 얹어 놓은걸 보니 애당초 이런 모습의 생명체인 듯했다. 흔히 생각하는 나쁜 짓을 하는 악당보다는 그냥 생김새가 불편한 외계인 정도로 보는 게 적당해 보인다. 인간처럼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고 그 모습은 서리의 눈꺼풀을 몇 번이고 비벼보게 했다. 


“수피야”


검은 괴생명체들에 한눈을 팔던 서리에게 어디선가 말을 걸어왔다. 서리와 비슷한 나이대로 추정되는 젊은 청년. 눈을 마주치고 있지는 않지만 천천히 내리고 있는 커피에 집중하며 신경은 서리를 향해있었다. 서리는 오랜 정적을 뚫고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고 반사적으로 질문이 쏟아졌다.


“누.. 누구세요. 여긴 어디고 이 괴물들은 전부 무엇인가요..!!”


“이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온 게 정말 오랜만이야. 기다리고 있었어”

서리의 말에 동문서답하며 의미심장한 말들만 내뱉었다.


“기다리다뇨. 도대체 이 괴물들은 전부 뭐냐고요!”

새된 목소리로 따지기 시작하자 청년은 서리를 안정시키고 천천히 설명에 들어갔다.


“놀랐지. 처음 본다면 당연히 그럴 만도 해. 내 소개부터 할게. 나는 이곳에서 수피들에게 커피를 내려주는 이름 없는 주인이야. 스스로를 ‘칼디’라고 부르니까 너도 편하게 칼디라고 불러줘”


“칼.. 디?”


“앞에 있는 이 검은 생명체들을 ‘수피’라고 불러. 괴물은 아니고.. 영혼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아”


“영혼..? 영혼들이 내 앞에 있다는 건 내가 죽기라도 했다는 거야?”


서리는 본인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왔다.

이해할 수 없는 설명들은 서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고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기에 반말은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칼디는 오해하는 서리를 이해시키기 위해 수피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어갔다.


“수피는 누군가의 꿈이 모여 만들어진 영혼이야. 너에게도 꿈이 있듯이 하고 싶은 어떤 것들이 조금씩 쌓여 만들어진 결정체지. 난 이 영혼들이 길을 잃지 않고 현 세계의 육체와 다시 만나 합을 이루도록 도와주고 있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현 세계의 육체가 카페에 방문하지 않고 있어 골치 아픈 상황이지.”


꿈의 영혼이니 현 세계의 육체와 합일이니 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서리의 귀를 공격했다. 

마치 서리 자신에게 몰래카메라를 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칼디라는 남자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고 서리와 대화하는 도중에도 커피를 내리는 작업은 계속되고 있었다. 서리는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내리고 있는 커피가 보였고 분쇄되어 담겨있는 커피 원두들을 보니 꽤 균일하고 정교하게 갈려있었다. 좋은 그라인더를 사용한다는 생각에 주변 기물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코만단테. 독일제 제품으로 수동 그라인더 부분에서는 인지도 있는 그라인더다. 이 남자가 생각보다 진지하게 커피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낸 서리는 조금은 흥미가 생겼다.

“칼디 너는 왜 여기서 수피에게 커피를 내려주고 있는 거야?” 


“말했다시피 수피는 육체와 합일을 이루어야 해방되는 존재야. 커피를 마시며 육체만을 기다리지. 커피가 없다면 수피는 이곳에 오지 않아. 결국 밖에 떠돌아다니다 육체를 만나긴커녕 숲 속을 방황하다가 자연히 사라지겠지.”

내리던 커피가 다 추출됐는지 뜨거운 물이 담긴 피처를 바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수피가 이곳에 와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주고 있어. 그 이유가 바로 커피지. 왜 수피가 커피를 마시는지 과학적인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외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존재의 이유와 맞닿아있지 않을까 싶어”


“존재의 이유? 육체를 찾아야 하는 걸 말하는 거야?”

칼디는 서리에게 훌륭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맞아. 수피는 현세계의 육체가 욕망하는 꿈의 결정체야. 결국 육체와 합일을 이루어내야 하지. 육체가 자신과 같은 곳에서 커피를 마시면 합일을 이룰 수 있어. 결국 그거 하나야. 수피는 커피를 마시며 육체를 기다리는 거지.”

상당히 복잡한 내용들이 서리의 머리에 복잡하게 엉커 지기 시작했지만 언뜻 이해되고는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의문점 하나가 서리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고 있었다.


“칼디 너는 이런 걸 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정체가 뭐야?”

정말 단 하나도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질문한 서리를 보고 칼디는 한숨을 푹 쉬며 서리를 이해시키려 했다.

칼디는 자신이 왜 여기서 커피를 내리고 있는지 그 처음의 기억은 없다고 한다. 마치 우주의 시작을 알 수 없는 듯 현재의 자신만 있을 뿐 과거의 자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것이 당연하게도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검은 괴물에게 수피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과 그들이 커피를 마시며 육체를 기다린다는 것. 이곳의 카페는 칼디 자신이 있는 곳과 수피의 육체들이 살고 있는 현세계의 카페 두 곳으로 나뉜다는 점. 그리고 서로 다른 공간이지만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으며 커피라는 매개체를 통해 수피와 육체가 합일될 수 있다는 것까지 모두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들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수피가 해방되는 일이 현저히 줄더니 지금은 아예 전무해졌다. 이는 곳 육체가 현세계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고 현세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현세계의 카페를 방문하면 칼디가 존재하는 이 세계의 카페문도 동시에 열리게 된다. 하지만 수피의 해방이 단절되고부터 카페문은 열리지 않고 있었고 그 정적을 서리가 깬 것이다. 


“ 근데 말이야 이 세계의 문이 열리면서 육체가 직접 들어오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단 말이지. 현세 계와 이 세계는 분리되어 있으니 말이야. 너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 이 세계와 현세계의 균열의 원인이 아닐까.”

칼디는 의미심장한 말을 해댔다.


“내.. 내가 균열을 내기라도 했다는 거야?”

억울한 서리는 분한 마음에 답답함을 호소했다.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머리에 번뜩여 칼디에게 소리쳤다.


“나에게 커피를 내려줘! 이 많은 수피들 중에 내 수피가 있을 수 있는 거잖아. 그럼 나도 수피도 하나가 될 거고 해방될 수 있는 거 아닐까?”

칼디는 여태 내리던 커피의 추출을 끝냈고 가득 채워진 잔을 들고 자리를 이동하며 서리의 제안에 답을 했다.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군. 이 공간에는 나를 제외하고는 수피만 존재할 수 있는 곳이야. 그리고 이 커피 또한 이 공간에 있는 한 수피들만 마실 수 있지. 너는 이곳에 존재할 수 있는 수피가 아니고 현세 계와 이 세계의 균열을 낸 원인이자 커피를 마실 수 없는 이단자야. 난 굳이 테스트해보지 않아도 단번에 알 수 있어. 마치 수피에 대한 모든 걸 처음부터 알아온 것처럼 말이야. 만약 네가 커피를 마시면 들이키는 순간 너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어 버릴 거야. 분명해”

이단자라는 말에 서리는 마음 한 구석에 못이 박히는 기분이었다. 균열을 낸 이단자라는 타이틀을 받고 외딴 세계에 내버려진 존재라니. 


상처받은 서리를 뒤로하고 칼디는 넘칠 듯 표면장력 상태의 잔을 비어있는 자리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정해진 시간이 있는 듯 잔이 내려진 순간 서리가 들어온 문의 틈 사이로 인영이 세어 들어왔다. 내부로 침투한 인영은 문을 타고 위로 올라오더니 공간감을 이루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검은 인영에 갈색 양모. 또 다른 수피가 들어왔다. 그리고 칼디는 수피를 알은 채 하며 서리의 가슴을 후벼 파는 한마디를 건넸다.


“어서 와. 오늘은 느낌이 좋아. 이세계에 균열이 생겼거든”

이전 03화 검은 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