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스마트폰은 통신 불가 상태였고 손목시계의 초침은 미동조차 없었다.
고장 난 걸까. 아니면 정말 시간이 멈춘 걸까. 서리는 이곳의 알 수 없는 미스터리 한 일들에 대한 두려움 혹은 궁금증은 뒤로하고 일단 이곳을 벗어나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 원초적인 생존 욕구가 넘쳐흘렀다. 이러는 동안 실종된 서리를 찾아다니는 부모님과 친구들을 떠올리며 불안감이 커져갔다. 그때 어김없이 칼디는 차갑고도 이성적인 대답을 들려주었다.
“이곳의 시간은 멈췄어. 아마 이것 또한 서리 너의 존재가 균열을 냈기 때문이겠지. 난 알 수 있어”
칼디는 뭐든지 직감으로 알 수 있다는 듯 떠들어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칼디의 말이 곧 진실이라는 것에 동감하게 되었다. 믿을 사람이 칼디 밖에 없으니까.
시간이 멈춘 이상 잃을 것도 없겠다 서리는 천천히 이곳을 탈출할 방법을 찾기로 결심했다. 뭐든지 직감적으로 아는 칼디에게 그 해답이 있지 않을까 질문을 던졌다.
“칼디 내가 여기 이단자라고 했지. 그럼 내가 있던 세계로 다시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아는 방법이라도 있어?”
“없어”
망할. 생각보다 아는 건 없었다.
아는 체하는 게 습관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칼디는 깔끔히 모른다고 인정했지만 ‘하지만’이라는 설레는 반전을 건네며 순간 서리에게 기대감을 안겨주었다.
“너는 이곳에 균열을 만든 장본인이야. 이곳을 벗어나는 것보다 이곳에 생긴 균열을 원상복구 하는 게 우선 아닐까? 너 때문에 누군가의 꿈으로 만들어진 수피들이 사라져 가고 있어. 이건 심각한 문제라고.”
벗어날 방도를 찾다가 칼디와 수피들에게 원망을 사게 되었다. 서리로 인해 사라져 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꿈. 서리는 자신이 만들어낸 균열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멈춰진 시간, 열리지 않는 문, 해방되지 않는 수피, 갑자기 등장한 서리. 어느 것 하나 짐작 가는 것은 없었다.
복잡한 마음을 안고 비어있는 자리를 찾아 잠시 앉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을지 사색에 빠졌다. 칼디는 그런 서리를 그저 바라보고는 다시 커피 내리기에 열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리는 칼디의 말대로 일단 자신이 만들어낸 균열을 메꾸고자 무엇이든 하기로 결심이 섰다.
그 첫 번째가 커피를 내리는 것이었다. 자신 때문에 사라져 가는 수피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커피를 마시고 살아가는 수피에게 커피를 내려주는 일이 바로 그런 일이었다.
서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중해서 커피를 내리고 있는 칼디에게 찾아갔다. 바 테이블을 기준으로 커피를 내리는 공간과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느낌이었는데 칼디만 사용하던 그 커피 내리는 공간에 서리가 불쑥 들어갔다. 곁눈질로 그 상황을 보던 칼디는 내리던 커피 때문인지 크게 뭐라 하지는 않았다. 결의에 가득 찬 마음을 안고 느닷없이 들어간 서리는 막상 그 공간에 들어가고 보니 칼디의 눈치가 보였다.
“ 나 여기 들어와도 되지..?”
“이미 들어와 놓고 허락을 구하는 건 무슨 경우야?”
화난 건 아니고 약간 약 올리는 말투다.
서리는 마침 커피 추출이 완료된 칼디에게 자신의 결의를 발표했다.
“칼디,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내가 여기 온 이상 가만히 시간만 보내는 것보단 수피들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너와 함께 커피를 내려보는 거 어때? 너에게도 도움이 될 테고 말이야.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정말 도움이 되고 싶어서 하는 말이야.”
대답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신경은 쓰이는 듯 다 내려진 커피를 계속 응시만 하고 있었다.
“네가 불편하면 다른 거어…”
“좋아. 커피는 내려본 적 있어?”
서리의 말을 끊고는 의외의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서리는 너무 좋았다. 단순히 이방인으로서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넘어서 수피를 위해 커피를 내려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에..
하지만 서리는 커피를 내려본 기억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곳에 오기 전 모든 기억이 사라졌다. 이상하게 모든 기억이 소실된 것 같았다.
커피를 내려본 기억이 없다는 서리의 대답을 들은 칼디는 서리에게 한 가지 숙제를 냈다. 지금 기다리고 있는 수피를 위해 커피를 내려줄 것. 나는 잠시 자리에 얌전히 앉아 커피만을 기다리는 수피를 응시하곤 다시 칼디를 바라봤다. 눈썹을 으쓱하며 나를 잡아 이끌었다.
“수피가 생각보다 인내심이 없어. 빨리 맛있는 커피를 내려보자고”
그렇게 칼디의 지휘하에 커피 추출은 시작됐다. 칼디는 서리에게 원두가 담긴 작은 틴케이스를 건넸다. 대략 20g 남짓. 고소한 향이 그윽한 원두를 앞에 구비되어 있는 코만단테 핸드밀에 털어 넣고 손잡이를 힘껏 돌렸다. 익숙한 핸들링. 많은 힘을 쓰지 않아도 시원시원한 소리를 내며 원두를 곱게 갈아내었다. 갈아낸 원두가 담긴 핸드밀 하단부를 열었고 숨겨두었던 풍부한 향들이 뿜어져 나왔다. 수피가 커피만 먹고사는 게 조금은 납득이 가는 것 같았다.
갈아진 원두는 칼디가 방금 준비해 둔 필터가 장착된 드리퍼에 털어 넣었다. 그리곤 어느새 서리의 손에는 칼디가 쥐어준 뜨거운 물이 담긴 주전자가 있었다. 안쪽에서 가장자리로 점점 커지는 원을 그리며 물을 붓기 시작했다. 원두는 뜨거운 물이 닿자 부풀어 오르며 가스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마치 빵이 오븐에서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원두들은 그 몸집을 키웠다. 부푼 원두에 계속해서 물을 부으며 씻겨 나갔다. 뜨거운 물은 커피를 훑고 지나가며 원두가 가진 다양한 색들을 빼앗아갔다. 처음 추출되어 떨어지는 액체는 꽤 붉었고 투명했는데 그것들이 쌓이고 싸여 수피를 연상시키는 어두운 흑색으로 변해갔다. 과정을 지켜보니 눈앞에 놓인 어두운 커피가 상당히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저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보이지 않는 것에는 힘이 있다. 상상력을 자극하고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만든다. 눈 깜박할 새 만들어진 서리의 커피는 좋은 냄새를 풍기며 맛이 없으래야 없을 수 없는 비주얼이었다.
“나 생각보다 소질이 있던 것일 지도 모르겠는데..?!”
서리는 자신이 내린 커피를 보고 자신만만해져 있는 사이 칼디는 그 커피를 수피에게 가져다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서리는 칼디에게 아쉬움을 한 껏 표현했다.
“내.. 내가 가져다주면 안 되는 거야?”
“커피를 내리는 것도 사실 도박인데 수피와 소통조차 안 되는 네가 이 커피를 가져다주는 건 절대 안 될 일이야”
“내가 수피와 소통이 안된다고 하는 건 칼디 너는 뭐 수피랑 소통이라도 가능하다는 거야?”
사실 칼디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지만 확실한 답을 알고 싶었다.
“당연하지, 수피에게 커피를 주는 것뿐 아니라 그들의 꿈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우리의 몫이야. 각자 꿈에 맞는 커피가 존재하거든. 내가 내린 커피가 이 수피와 맞는 커피인지 구별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부분이야. 예를 들면 병원에 약 처방을 하기 전에 환자와 이 약 주인의 이름이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과정과 같다고나 할까?”
칼디는 수피와 소통을 통해 그에 걸맞은 커피를 제공해 주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한껏 진지하게 설명했다.
소통의 부재는 결국 서리가 수피에게 커피를 제공해 줄 수 없는 이유가 되었지만 되려 서리는 그렇기에 수피와 소통하는 법을 알고 싶었다.
“나.. 나도 수피와 소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이세계에 균열을 가져온 너라면 뭐 방법이 없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나 말고는 그 누구도 수피와 소통할 자격은 없어왔어”
서리는 수피와 소통할 수 있다면 그들의 꿈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그들의 존재를 보호하는데 더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칼디에게 아무리 보채도 그 방법을 알고 있지 않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서리는 욕심을 포기하고 내렸던 커피 용품들을 정리하기 위해 칼디를 등지고 돌아섰다. 그때 갑자기 나무에 금이 가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지면에 진동이 일었다.
‘우거 거걱..’
“이.. 이럴 수가”
떨리는 칼디의 낯선 목소리. 서리는 다급히 칼디 쪽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칼디는 당황한 듯 주저앉아 무언가를 위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서리 또한 칼디의 시선을 따라 위를 올려다보았고 그곳에 자신이 내린 커피를 마신 수피가 건물을 부술 듯이 몸집이 커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