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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피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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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피 Oct 10. 2024

#6

한 아이가 책상에 앉아있다. 책상 위 타이머는 6시간이 지나고 있음에도 멈출 생각이 없다.

여러 권의 두꺼운 책들이 방의 무게를 한껏 무겁게 만든다. 덜덜 떠는 오른쪽 다리는 잠을 깨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이 아이는 어두운 방안에 조명하나 켜고 공부에만 전념한 지 2년 차에 들어왔다. ‘공무원 정복하기’라는 책 표지는  아이가 무엇을 준비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게 해 준다.


‘똑 , 똑’

방 문을 조심스럽게 노크하고 들어온 사람은 아이만을 믿고 항상 응원하는 어머니다. 온화한 미소는 안쓰러움과 대견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딸, 힘들지 엄마가 체리 닦아왔어. 이거 먹으면서 해”

접시에 잘 닦여 뽀송이는 체리 몇 알이 채에 놓여 있다.

공부에 지쳐 예민해진 아이는 어머니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곤 손으로 나가라는 제스처를 한다.

어머니는 온화한 미소를 지키며 방 문을 도로 닫는다. 문 닫히는 소리를 인지한 아이는 그제야 체리 한 알을 입에 넣는다. 꽤 달고 맛있다. 입에 남아있는 작은 씨를 뱉어내고 채 밖에 접시에 놓는다. 그리고 참았던 눈물이 흐른다.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죄책감, 미안함, 불안감 혹은 스스로에 대한 실망.. 어떤 것이라고 특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 스스로는 알고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속이면서 생기는 자괴감 말이다. 2년 동안 공무원 합격만을 바라보고 공부에 전념하는 자신이 왜 이것을 하고 있는지 이유를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본인의 의지가 아닌 남의 눈치를 보며 의식해 만들어낸 결과이다.


아이는 스스로를 위로하려 다양한 이유들을 만들어냈다. 


‘많은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살아간다’


‘어떻게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가겠어’


‘일단 살 길은 만들어두고 천천히 하고 싶은 일 하자’


.. 하지만 이런 의식적인 자기 위로는 결국 탄로 났다. 아이에게는 꿈이 있었다. 

한쪽 어깨에 통기타를 매고 자신이 만든 곡을 사람들 앞에서 부르는 꿈.

그런 꿈을 가진 사람은 결코 자신을 속여가며 거짓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어느새 타이머가 10시간을 가리키고 있을 때쯤 노트북의 인터넷 강의 페이지를 끄고 수많은 음표들이 그려져 있는 음악 프로그램을 켠다. 조용한 방에서 큰 소리를 낼 수 없는 아이는 헤드셋을 머리에 쓰고 노래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입 모양만 흉내 내본다. 5분 정도의 노래 한 곡은 끝이 났고 힘든 하루에 환기가 됐다. 이미 시작된 마음의 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새로 작곡 중인 악보를 켠다. 음악 프로그램을 통해 노래가 연주되고 아이는 음에 맞춰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는 노래에 취해 자신의 흥얼거림이 방 문틈 사이로 새어나간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새어나간 소리에 방 문은 다시 열렸다.


“딸, 아직도 노래 작곡하고 있는 거니? 합격 전까지는 참고 공부에 매진해 보자고 했잖니..”

아이는 어머니와 약속했다. 합격하기 전까지는 노래에 대한 꿈을 접어두기로.

하지만 만일 합격하게 된다면 노래를 다시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일을 시작하게 되고 사회생활에 

들어가면 노래에 쏟을 에너지가 사라지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렇다고 노래를 포기하고 공부에 매진한다고 합격을 확실시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합격을 한다면 자신의 인생은 행복할까? 가족들을 위해 내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게 맞는 걸까 하는 깊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모든 게 잘못되고 있는 것 같았고 인생의 패배를 맛보는 듯했다. 

아이는 복잡한 가슴을 뒤로하고 외투 하나 걸친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시간은 밤 9시. 하늘은 어두웠고 밝게 빛나는 별들이 무수히 많았다.

이렇게 세상은 넓은데도 작은 방에 갇혀 지낸 스스로에게 미안했다. 아이는 고생한 하루에 대해 보상해 주듯 천천히 조용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아파트 근처에는 잘 조성된 작은 나무 숲이 하나 있었다. 공부에 매진하느라 이 길을 걸은 날이 거의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발걸음을 했다. 아무도 없었고 숲의 나무들은 바람을 만들어 나의 등을 떠밀어주었다. 마치 나무가 아이에게 길을 일러주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은 멎었고 아파트 단지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아파트 단지 쪽문을 경계로 밖으로 나가는 길이 이어져 있었는데 늦은 시간이었기에 집에 돌아가야 함을 직감했다. 아쉬운 마음에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마침 별똥별 하나가 아이의 눈을 따라 떨어졌다.

놀란 아이는 별똥별이 떨어진 지평선 끝자락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끝자락에 맞닿아있는 나무 한 그루 나뭇가지에 검은 끈 하나가 아이의 눈에 걸렸다. 그 검은 끈이 걸려있는 곳은 아파트 단지 쪽문 너머 길가에 있는 나무였다.


‘저런 끈이 왜 나무에 걸려있는 거지?’

호기심을 핑계로 아이는 쪽문을 넘어 끈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익숙한 길은 아니었지만 본능이 앞서며 서서히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두 팔을 힘차게 던져가며 달리고 있었다. 달리는 순간에는 원초적 본능에 이끌려 아무런 걱정 고민 없이 달리기만 했다. 체력만 버텨준다면 죽을 때까지 달려보고 싶었다. 하지만 인생은 판타지가 아니었다. 곧 검은 끈의 길잡이 여행은 길 한가운데를 가로막은 건물 앞에서 끝이 났다. 


‘이 근처에 이런 카페가 있었나?’

낯선 카페 건물 앞에 선 아이는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은은한 커피 향이 마음에 들었다. 

그윽한 커피 향을 온몸으로 막고 있는 문의 문고리를 과감히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소한 커피 향이 코를 자극했고 풍성한 커피 향에 가려진 침 나오는 빵냄새는 아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온 김에 커피 한잔하고 가면 좋을 듯했다. 마침 커피는 잠도 깨우니까.


“어서 오세요 손님. 처음이시죠?”

커피를 내리고 계시던 사장님은 아이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네 집 앞에 이런 카페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냄새가 너무 좋아요”


“여기 시작한 지는 2년 정도 됐는데 이쪽 길을 잘 안 지나가셨었나 본데요? 하하”

사장은 아이의 말에 장난 섞인 말투로 대꾸해 줬다.


2년이라는 시간이면 아이가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한 시간과 맞물린다. 그 때문에 이 카페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사장은 아이를 바 자리에 안내했고 작은 메뉴판 하나를 천천히 소개해줬다.


“처음 오셨으니까 커피 설명 간단히 해드릴게요. 커피는 에티오피아, 콜롬비아, 예멘 이렇게 세 가지가 준비되어 있고요. 한층 더 깔끔하고 좋은 향을 느껴보고 싶으시다면 핸드드립 커피를 추천드릴게요. 선택이 어려우실 수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시고 말씀해 주세요.”

커피 원두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여러 가지가 있으니 고르는 재미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아이에겐 고민의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예멘.. 예멘으로 주세요!”

고민 없이 바로 고르는 아이를 보고 사장은 조금 아이러니했다. 


“뭘 좀 아시네요. 저도 예멘 참 좋아하는데 손님이 예멘을 고르시니까 정말 반가운데요”


“하.. 그냥 이름이 독특해서 골라봤어요. 맛있는 커피일까요?”

맛없다고 말 할리 없지만 아이는 단순히 사장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맛이라..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네요. 너무 주관적인 부분이라서요. 예멘이라는 나라가 참 매력적인 곳이거든요. 사막기후로 커피나무가 자라기 열악하고 작은 대륙의 크기를 갖고 있음에도 아주 좋은 커피를 생산하고 있어요.  그리고 가장 매력을 느끼는 건 그 나라의 이야기죠.”

아이는 사장이 하는 이야기에 큰 흥미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사장의 검은 동공 속 오묘한 빛을 보고는 그가 느꼈다는 이야기의 매력이 궁금해져 곧장 질문했다.


“예멘의 이야기를 하려면 커피의 첫 시작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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