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길을 따라 쭉 늘어진 끈들은 가야 할 길을 제시해주고 있었다.
끈을 따라 나아가야 할 이유는 마땅히 없었다. 그냥 그 길이 보였기에 나아갔을 뿐이다.
때문이었을까. 눈 깜짝할 사이 사라진 끈은 정처 없이 주변만 맴돌게 만들었다.
주변 어디를 보아도 온통 암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을 이끌던 무언가가 사라지고 여러 갈래길 중 선택의 기로에 섰다. 야생동물이 나올 것 같은 침울한 나무 숲 길, 가시에 찔려 살아나갈 수 없을 것 같은 가시덩굴 그리고 어둠으로 가득 차 있지만 오묘한 흑색의 빛이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반짝이고 있는 오솔길이 있다. 오묘한 흑빛은 무섭긴커녕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그곳을 본능적으로 향했고 반짝이는 흑빛에 가까워질 무렵 그 빛은 점점 형태를 갖기 시작했다.
끈. 아까 놓쳤던 끈이 본래 가지고 있던 다채로운 색은 온데간데없이 어둠만을 띄고 있었다. 흑색 끈은 본래끈을 흉내라도 내는 듯 길을 따라 줄지어 늘어져있었다. 따라 걸어가면 갈수록 어둠은 더욱 깊어졌다. 다음 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는 좁아졌고 이상하게도 어느 방향을 가더라도 그 끈은 항상 연결되어 있었다. 뛰기 시작했다. 여태 이렇게 빠르게 뛰어본 적이 있었을까. 그리고 더 이상 뛸 힘이 남아있지 않았을 때쯤 앞에 무언가가 앞을 가로막았다. 작은 오두막 하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며 소리쳐봐도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허비해서인지 점점 어지러움과 울렁임이 시작됐다. 정신은 혼미해지고 부여잡았던 문고리를 끝내 놓치며 정신을 잃었다.
동명의 기이했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서리는 올레길을 걸은 지 2시간 동안 그 기이한 이야기를 계속 되뇌었다. 그리고 곧 정신을 차렸고 본인 또한 끈의 행방을 잃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자각했다. 마치 동명이 건네준 이야기가 곧 자신의 미래라는 것을 예고하는 듯 사건은 비슷하게 흘러갔다. 목에는 식은땀이 흘렀지만 그 땀을 식혀줄 바람은 한 점 불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숲 속은 고요했다.
끈을 찾아야 한다는 일념하나로 서리는 사방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어디를 보아도 동명이 전해준 이야기와는 달랐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 걸까. 서리는 불안한 마음과
급해진 마음 때문인지 본래의 끈이 아닌 검은 끈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나뭇가지 사이사이 드리워진 그림자뿐이었다. 서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사방이 어둠으로 가득했기에 자연스럽게 어둠을 향해 나아갔다. 나아가고 또 나아갔다.
‘스슥’
갑작스레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서리의 귀를 자극했다. 아까부터 희한하게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상황에서 나뭇잎 스치는 소리는 자연적인 소리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분명 무언가 있다. 서리는 소리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차기 시작했고 정강이 옆에 붙어있는 근육이 부풀어 오르면서 평소 운동을 하지 않은 자신을 보며 탄식했다.
하지만 하찮은 체력으로도 최선을 다해 뛰고 있으니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마치 서리가 숲 속 어딘가에 활개 하는 정체 모를 무언가를 따라 잡아가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소리가 코 앞까지 다다랐을 즈음 어두웠던 숲 길에 끝에 도착했고 나무로 둘러싸인 조금은 휑한 황무지와 마주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보이는 오두막집. 사실 동명의 이야기를 듣고 유추해 봤기 때문에 오두막집이라고 생각했지 처음 마주하면 꽤나 잘 다듬어진 목재와 벽돌들로 지어진 단층 건물로 봐선 도무지 오두막집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명이 봤다는 그 오두막집이 서리 앞에 버티고 서있는 이 건물과 동일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곧이어 건물 위 차양에 걸려있는 검은 끈으로 하여금 확신하게 되었다.
동명처럼 검은 끈을 따라가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움직이는 물체가 서리를 이끌었다.
서리는 순간 그 움직이는 물체의 정체를 깜박하고 있었다. 분명 코 앞까지 따라잡았건만 건물이 보이면서부터 그것은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동명이 끈을 통해 이곳으로 이끌린 것처럼 소리의 정체가 서리 자신을 이끈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망설임 없이 건물 앞에 섰다.
똑, 똑
“누구.. 계신가요?”
…
아무런 반응이 없다.
문에 바짝 붙어 귀를 대고 인기척을 느끼려 하지만 정적만 흐를 뿐이었다.
기분이 묘하다. 더 이상의 모험은 불길함만 키울 것 같았다. 다시 돌아가 다른 길을 찾을까 고민을 번복했다.
하지만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니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닌 듯싶었다. 그리고 몇 분을 고민했을까. 서리는 떨리는 두 손으로 문고리를 잡았다. 서리의 행동이 어떤 생각에서였는지는 잘 모르지만 동명이 찾고 있는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문고리는 생각보다 잘 움직이지 않았다. 두 손을 모으고 온몸에 무게를 실어 문고리를 비틀었다.
문고리가 망가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걱정도 잠시 문은 마치 비밀의 방을 여는 듯 연결된 톱니바퀴들이 움직이며 문에 균열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금까지 보이지 않던 온화한 불빛이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기 시작했고 어디선가 맡아본 향긋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서리는 자신의 눈과 코를 자극하는 것들로 하여금 힘을 얻어 더 힘차게 문고리를 돌렸다. 문고리가 한 바퀴 돌아갔을 때 마법처럼 그 문은 평범하고 매가리 없는 나무 문이 되어있었다.
문을 손쉽게 열고 들어간 서리 앞에는 꽤나 기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