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아니지만 살고있는 지 50년이 넘었다. 동네에 있으면서 할머니가 방문하는 곳은 많지 않고 오히려 거리가 좀 있는 시장에 더 자주 간다. 그런 와중에 그나마 자주 가는 곳 중 하나가 모나미용실이다. 할머니는 머리를 볶을 때 꼭 모나미용실에서 한다. 적어도 교회 주변 사는 할머님들은 모나미용실에서 머리를 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나미용실 사장님도 같은 교회를 다니는 권사님이다. 할머니 따라 어른들이 있는 본당예배를 드릴 때나 예배가 끝나자마자 할머니와 붙어있으면 늘 먼저 와서 살갑게 인사해주었다. 나는 늘 모나미용실 이름을 헷갈려서 모나미 미용실이라고 불렀다. 이름 석자로 모른 채 늘 그분을 모나미 미용실 아줌마, 사장님 이런 식으로 불렀다.
대략적인 위치상, 할머니 집을 이사한 후로 모나미용실과 가까워졌을 것이다. 옛날 집과도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현재 집에서 모나미용실에 갔을 때 굉장히 가까웠던 느낌이었다. 그 미용실이 아직 영업하는지는 모르겠다. 어떻게 지내실는지도.
동인천 일대는 요새 이런저런 사업들로 풍경이 바뀌곤 있다고 해도 드나드는 사람이 조금 늘었을 뿐 정착민들은 꾸준히 줄어들고 있다. 일대 가게들도 닫혀있는 일이 많고 이웃 간 연락도 뜸해질 뿐더러 세월도 세월이니만큼 이젠 할머니들만 남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할머니는 적어도 모나미용실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지 않았을까.(끝이 있다면) 그곳은 간판이 큰 것도 아니었고 양철 문으로 된 입구는 동네 가정집 문의 것과 같아서 자칫하면 그냥 지나칠법한 장소였다. 다른 가게들처럼 문을 활짝 열어놓는 것도 아니어서 머리를 하러 가기 전에 할머니는 전화해보거나 그것도 아니면 일단 찾아갔다. 내가 할머니 집에 오래 머무르기라도 하는 날 심심할 때면 할머니는 모나미용실에 돈도 쥐여주지 않고 일단 머리를 자르고 오라고 했다. 그곳에서 다듬고 온 나는 거진 일제강점기 소학교 학생의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갔던 건 중학생 때였다. 여름이었는데, 입맛이 없어서 네모난 나무 밥상에 할머니랑 마주앉아 맨밥에 상추랑 쌈장을 발라 한 그릇 해결하고 삼촌 방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안부 차 들른 모나미용실 아줌마의 뒤를 따라 목 뒤가 시원하도록 깡똥하게 자르고 왔던 기억.
모나미용실의 모나Mona의 뜻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봤다. 처음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뜻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요나라면 몰라도 마땅히 매치된 단어가 없었다. 모나리자의 Mona(유부녀에게 붙이는 경칭, 여사)라면 조금 말이 될지도 모른다. 결국, 교회 Mona들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미용실이자 아지트가 되었으니. 혹은 Mon ami(자네, 당신)일지도 모른다. 모나미(미)용실로 중간이 '미'가 떨어져 나가야 겠지만. 사실 수 없이 모나미용실을 지도에 검색해보다 한번 '모나미 미용실'로 검색했더니 할머니집 동네 부근 점포 하나가 나왔다. 두근거리며 거리뷰를 실행시켜 가게와 주변을 살펴보았다. 지도상 이름은 '모나미 미용실', 실제 간판은 '모나미용실'이었다.
할머니는 늘 너무 까맣지 않은 어두운 갈색에 굵은 컬의 파마가 취향이었다. 그 스타일을 항상 잘 맞춰주어 동일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할머니를 볼 때 머리가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음을 보고 모나미용실이 건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할머니 머리는 조금의 어두운색 하나 없이 새하얀 색이고 누운 그대로 머리카락이 눌려있다. 손으로 빗어 내려도 항상 그 자리가 눌려있기 때문에 정돈하기를 포기했다. 한 달에 한 번 훌쩍 미용실에 다녀오는 건 할머니만의 작은 루틴이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지켰던 루틴들을 이제는 하나씩 내려놓고 있다. 새벽기도, 주일예배, 모임, 미용실, 세탁소, 목욕탕 등 할머니 몸이 닿지 않는 것도 있지만, 그 장소들이 사라진 이유도, 더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이유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