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옛 격언을 받들어, 일 년에 한두 번 부모님을 찾아뵙는 불꽃 효자다. 이는 내가 옛 선조의 지혜를 따르는 슬기로운 후손임과 동시에 경기도와 부산이라는 대한민국 대각 끝에 위치한 물리적 거리 때문임을... 비겁하고 옹졸한 핑계를 대본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불꽃 효자인 나는 진실로 부모님을 보고 싶은 마음이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그러면 난 왕복 고속열차 비용과 무너져 가는 허리, 날아갈 꿀 같은 주말의 휴식, 이 모든 걸 감내하고도 부모님 얼굴을 보러 가자고 다짐한다.
그리고 부모님과 더불어 내가 부산을 찾는 또 하나의 이유. 사실 최근엔 이 이유가 주가 돼 버렸다고 할 수 있는데 그건 바로 두 조카 때문이다. 하루하루 커가는 내 새끼 궁디팡팡 귀염뽀작이들을 한 번이라도 더 눈에 담아두고자, 나는 ‘반지의 제왕 : 반지 원정대’의 심정으로 짐을 꾸린다.
“삐비비빅삐삐빅!”
현관문 비밀번호가 빠른 속도로 눌리는 소리에 게으름과 나른함에 젖어 오매불망 귀염둥이들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나와 부모님은 어느새 현관문 앞에 쪼르르 모여 있다. 그리고 문이 열리고 환한 두 빛덩이가 들어온다.
“아이고~ 왔어~”
우리는 한껏 높은 목소리와 치켜 올라간 광대를 내보이며 조카를 맞이한다. 조카들의 엄마이자, 우리 엄마 아빠 딸은 아이들을 앞세워 “보아라! 내 배로 낳은 이 귀염둥이들을!” 득의양양한 기세로 집으로 들어선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반나절 정도. 난 처음엔 의욕에 넘쳐 조카들을 향해 과한 미소와 관심, 질문을 던지며 삼촌이 지닌 애정을 꺼내 보이려 애썼다. 하지만 아이들은 스타이고 난 한낱 사생팬에 불과했다. 아이들에게 반년 혹은 1년에 한 번씩 나타나는 아저씨는 낯설었다.
엄마가 삼촌이라니까 삼촌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라는 건 알겠는데, 사실 그냥 가끔 보는, 기억에 새겨 질랑 말랑한 아저씨일 뿐이었다(심지어 아저씨도 되지 못한...). 나는 섭섭함에 급격히 텐션을 잃었다. 하지만 그때 동생이 귀띔하길, “시간이 필요해.”
난 조카 창조자의 말을 따랐다. 그저 옆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신나게 노는 조카들을 지켜봤다. 그러자 슬슬 탐색하듯 내게 접근하는 조카들. 아이들은 주변의 사물을 이용해 재빨리 하나의 세계를 구성했다. 의자와 베개, 이불, 효자손, 인형, 자기의 손을 이용해 산과 바다, 동굴, 상어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세계에 나를 초대했다.
“삼촌, 삼촌은 물고기야.”
난 재빨리 손을 이불 위에서 기민하게 움직이며 한 마리의 물고기를 역동성 있게 표현했다. 내게 이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이자, ‘어벤져스’의 아이언맨 배역을 맡은 바와 같았다. 조카들은 나의 높은 세계관 몰입도에 만족했으며, 그들의 친구이자 동족으로 받아들였다. 엉겨 붙는 아이들과 힘 씨름도 한바탕하고, 중간중간 아이들의 관심사나 장기를 뽐낼 시간도 갖는다.
그렇게 점점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나 역시 순진무구한 상상력을 뿜어내던 어린 시절의, 너무 오래돼 기시감으로 느껴지는 감정과 에너지를 받게 된다. 그리고 약속의 시간이 가고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 조카들은 어느새 삼촌의 매력에 빠져, 자고 가면 안 되냐며 엄마를 조른다(후훗. 이 뿌듯함이란). 하지만 조카들의 엄마이자, 우리 엄마의 딸은 두 세계관을 연결하는 존재로서 모든 걸 굽어보고 있다. 이제는 조카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의 체력이 슬슬 바닥날 것이며, 자신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그리고 조카들을 다시 일상의 리듬으로 돌려놔야 내일을 수월하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아쉬움과 안도감이 섞인 오묘한 헤어짐으로 조카들을 보내고 나서도 집은 한동안 들뜬 기운에 저릿저릿하다. 엄마와 아빠는 집을 정리하며 “아이고~ 애들이 왔다 가면 정신이 하나도 없어~”라고 운을 띄운다. 그리곤 광대를 한껏 올린 채로 줄줄줄 아이들 얘기를 끊임없이 이어 나간다.
그리고 다시 나른하고 적막한 노인들의 세계가 펼쳐지고, 각자의 방에서 어두운 밤을 맞이한다. 나는 언젠가부터 창고로 쓰이는, 한때 내 방 때문에 난 부모님 집에 올 때면 늘 거실에서 잔다. 적막한 밤이 지나고, 아침에 들이치는 햇빛과 왠지 모를 뜨거운 시선에 눈을 떴다. 그러자 엄마와 아빠가 내 머리맡 양옆에 앉아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조카들을 보는 눈빛으로.
난 순간적으로 “아! 뭐해!”라며 잠투정 섞인 짜증을 부렸고, 부모님은 호다닥 도망가셨다. 난 창으로 들이치는 아침 햇빛에 이불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이불로 가린 내 얼굴에선 약간은 수줍고, 따스하고, 설레는 미소가 피어났다.
부산에 가면 난 아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