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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스타 May 29. 2023

08. 5,416m

트레킹 일지 Chap.3 하늘을 향한 길, 안나푸르나 트레킹


 모두가 각 분야에서 인생 최고 기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100m 달리기 기록이라던지, 취준생 시절 치른 토익점수 최고점, 분위기에 취하고 조금의 객기도 더한 최대 주량(분명히 진실보다 뻥튀기 됐을) 등 “내가 예전엔 말이야~”란 접두사를 필두로 내세우며 꺼내게 되는 기록들. 그리고 난 내 인생의 최고 기록 하나를 갱신했다. 


 하이캠프에서 하루를 보내고 드디어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의 최고점 ‘쏘롱 라(Thorung La)’를 향한 길. 마지막을 남겨두고 사람들은 모두 신이 나 뒤의 설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나 역시 지금까지 걸어오며 안면을 튼 친구들과 사진을 함께 찍으며 미리 마지막을 자축했다. 그리고 출발! 지금까지의 길보다 훨씬 가파른 경사에, 어젯밤 숨을 쉬기 힘들어 잠에서 깨기까지 한 고산지대의 희박한 산소는 나의 걸음을 힘겹게 만들었다. 정말이지 한 걸음 한 걸음이 기합을 받는 것처럼 힘겨웠는데 나를 포함한 모두가 그저 얼굴을 땅에 박고 힘겨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걸음 하나에 큰 숨 한번. 이렇게 숨 하나하나, 걸음 하나하나를 의식하며 산 적이 있던가? 숨과 걸음은 그야 말로 눈을 깜박이고 가려운 곳을 긁는 무의식의 영역으로 내가 어떻게 숨을 쉬는지, 어떻게 걷는지, 숨을 쉬고 걸을 때 어떤 느낌인지 크게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 인생의 최고점, 쏘롱 라를 향하는 길을 오르며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과의 간격은 점차 벌어지고 길 위엔 오로지 나와 나의 숨소리만이 남았다. 


 황량한 흙밭의 산에 번지는 나의 숨소리는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나의 존재를,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다. 그렇게 나는 느리지만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다들 거북이보다 못한 속도로, 다리에 족쇄를 매단 것 마냥 느리고도 무거운 발걸음을 이어갔다. 심장은 터질 것 같고 다리는 뻐근하고 머리는 어지럽고 눈은 시렸다. 하지만 어차피 길은 하나. 이제 와서 온 길을 돌아갈 수는 없는 일. 정상을 넘어가는, 오로지 단 하나의 길만이 존재했다. 


 배수의 진. 그 시절 이순신 장군님과는 감히 비교하기 힘들겠지만, 사람이 오직 하나의 선택에 놓였을 때 어떤 힘과 인내를 발휘하는지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소중한 한 걸음이 모여 도달한 정상. 5,416m. 내 인생 두 다리 로 오른 최고의 높이였다(글을 쓰는 오늘까지, 아마 평생 깨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기록). 세찬 바람과 발밑에 시원스레 펼쳐진 경관이 나의 노고를 축하하는 듯했다. 


 ‘아, 내가 결국엔 이곳에 올랐구나’하는 벅참과 동시에 최대한 이곳에 머무르고 싶다는 욕심, 세찬 바람에 빨리 떠나고 싶은 고통, 눈 앞에 펼쳐진 저 길을 언제 또 내려가나 하는 걱정까지, 내 인생 최고점 정상에서의 감동을 오롯이 느끼기에는 나는 너무 산만하고도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게 내 인생 최고점을 겨우 15분 정도로 끝내버리고 다시금 내려오는 발걸음. 정상에서의 순간을 더 길게 즐기지 못한 아쉬움과 이제는 그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노동적 걸음만 남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더 큰 즐거움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정상을 향해 오를 때는 땅만 보느라 보지 못했던 풍경이 더 수월하게 들어왔으며, ‘묵티나트(Muktinath)’를 향하는 길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멋을 보여주는 길이었다. 정상에 오르는 것만큼,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값지고도 소중한 내려가는 길. 흔히 어떤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이들이 정상에서 내려오는 과정에  대한 얘기를 할 때, 어떤 이는 정상에 집착을 하기도, 어떤 이는 자연스레 하산하는 과정을 즐기기도 하는 것처럼, 우리는 오르는 것뿐 아니라 내려오는 것 또한 잘 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르고 내려가는 것 모두가 우리의 소중한 인생이니 말이다. 어쨌든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나의 쉽사리 깨지지 않을 기록을 세운 곳으로써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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